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425화 (425/621)

425. 이삭 줍는 공자님 (4)

뒤쪽에서 떨고 있는 자들은 강남사호였다.

그들은 악몽 같은 밤을 보냈다.

그들 중 이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저거 우리가 먹었던 심인멸혼단 아닙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구나.”

말을 마친 일호는 자신의 아랫배를 움켜잡았다.

어제의 고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고통은 이제까지 겪어 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단지 육체에 고통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각은 영혼에 각인되었다.

그것도 잠시, 표정을 푼 일호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영호 선배도 당한 것 같구나.”

“그럼 우리가 오해를 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말을 마친 이호는 심장을 움켜잡았다.

그 모습을 본 일호가 말했다.

“진짜 심인멸혼단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럼 가짜라고 생각하고 계셨다는 말입니까?”

“너는 심인멸혼단이 무림에서 금지된 이유를 아느냐?”

일호의 엉뚱한 질문에 이호는 눈을 멀뚱거리다가 답했다.

“……그야, 죽지도 못하고 고통만 안기니 금지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형님.”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그럼 이유가 뭡니까?”

이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주변에 있던 삼호와 사호도 눈을 가늘게 뜨며 일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들의 시선에 일호는 참담한 표정으로 영호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저게 하나에 얼마짜리인 줄 아느냐?”

“…….”

모두는 대답을 못 했다.

비싸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무림에서 금지된 약이라 전해져서 이제는 쓰는 이도 없는 독약이었다.

그러니 알 수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무려, 은자로 오십 냥이다. 비싸서 안 쓰니 금지되었다고 잘못 알려진 것이지.”

“헉.”

이호가 탄성을 터뜨리자 일호가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쉿, 조용히 해라. 잘못하다가는 들킨다. 은자 오십 냥짜리를 지금 우리 넷에게 먹인 것이다. 문제는 하나가 더 있다.”

“그게 뭡니까?”

“진짜 비싼 것은 저 독약이 아니다.”

“그럼 뭡니까?”

“바로 이 해약이지.”

일호는 손에 든 백색 호리병을 들어 보였다.

이 호리병은 한빈이 준 것이다.

“대체 그게 얼마이기에…….”

“무려 은자 백 냥이다.”

“그럼 여기 호리병에 든 세 알의 값이 삼 백 냥이란 말입니까?”

“그렇다. 백 냥에 한 달…….”

일호가 백색 호리병을 가리켰다.

강남사호는 어제 차례대로 제압당한 후 한빈에게 백색 호리병을 하나씩 받았다.

그들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호리병을 보며 사색이 되었다.

호리병에 든 해약은 세 알.

한 알당 지속 시간은 한 달이었다.

즉, 석 달이 지나면 죽음보다도 더 끔찍한 고통을 맛봐야 한다.

만약 독약의 효과를 무시하고 해약을 거르게 된다면?

그것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일호는 동생들을 바라봤다.

이것이 심인멸혼단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의심했었다.

하지만 동생들의 고통을 보자 일호는 확신했다.

심인멸혼단의 증상은 복용한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고통받는 부위가 사람마다 다른 것이다.

자신은 아랫배, 이호는 심장 그리고 삼호와 사호도 달랐다.

이게 진짜라면 언제까지 해약을 받을 수 있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서생 복장의 고수가 죽는다면 자신들도 그 뒤를 따라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때 이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어제 대협이 지시한 대로 영단산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해약을 영단산으로 보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너는 그걸 믿느냐?”

“네? 저런 고수가 거짓말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너는 저자가 정파의 인물로 보이느냐?”

“그건 아니죠. 저리 악랄한 인물이 어찌 정파의 인물이겠습니까?”

“그럼 사파의 인물이라 생각하느냐?”

“흠…….”

이호는 턱을 어루만지며 고민했다.

쉽사리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삼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는 사파의 인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째서지?”

“사파 놈들이 돈에 얼마나 벌벌 떠는데요. 그놈들이 저렇게 비싼 독을 쓰겠습니까?”

“내 생각도 마찬가지다.”

“그럼 첫째 형님의 생각은…….”

“아무래도 천산에서 온 인물 같구나.”

“그렇다면 마교라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상대를 죽이지 않고 현 강호에서 쓰지도 않는, 말도 안 되는 독을 쓸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헉.”

“우리는 영단산으로 가서는 안 된다. 일단 저자를 지켜야 한다. 저자의 목이 달아나면 우리는 남은 평생을…….”

일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어제의 통증이 느껴지는 것만 같아서였다.

일호의 말에 나머지 형제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형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저도 따르겠습니다.”

말을 마친 모두는 입술을 굳게 닫았다.

그 모습이 마치 석상처럼 보일 정도로 그들은 절실한 표정을 지었다.

* * *

며칠 후 정오. 하남 최대의 곡물 시장이 위치한 양주현의 한 음식점.

한빈 일행은 한가롭게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이 층에 자리 잡은 한빈은 턱을 괴고 지나가는 수레들을 바라봤다.

“제법 활기가 넘치는군요.”

누구에게 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혼잣말로 이 거리를 평가한 것이다. 하지만, 흑미랑은 재빨리 답했다.

“추수가 끝난 지방의 곡식이 다 이곳으로 모이니 그럴 수밖에 없죠.”

“흑 소저는 곡물 경매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 아나요?”

한빈이 묻자 흑미랑은 눈을 새초롬하게 떴다.

자신을 무서워하는 자는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소저라 칭한 사람은 한빈이 처음이었다.

계속 무사라 부르기도 뭐하고.

하오문 호북 지부의 문주라는 것을 밝힐 수도 없으니.

할 수 없이 택한 호칭이었다.

살짝 얼굴을 붉힌 흑미랑이 말을 이었다.

“아마 오늘 밤부터 암상이 열릴 거예요.”

“암상이라…….”

한빈은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암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금지된 품목을 거래하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세금 때문에 관아의 눈을 피해 거래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소금이야 국가의 전매 상품이지만, 곡물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하지만 이렇게 대량으로 거래될 때면 관에서는 세금을 매긴다.

그 액수는 생각보다 어마어마했다.

문제는 이 세금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상인이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덕분에 대량의 거래는 암상을 통해 이뤄진다.

반면 소량의 거래는 정상적인 시장에서 유통하게 되는 것이다.

정상적인 시장에 풀린 곡물은 적혈맹호대가 쓸고 있을 터.

한빈은 암상에 집중하면 되었다.

한빈이 양주현을 목적지로 정한 것이 바로 곡물 때문이었으니.

오늘 밤부터는 보이지 않는 전쟁을 시작해야 했다.

생각에 잠긴 듯한 한빈의 모습에, 흑미랑이 말을 이었다.

“대부분 곡식은 그곳에서 거래되고 남은 곡물은 그 후에 관아의 통제하에 거래되겠죠. 문파에서 쓸 곡물이라면 그냥 시장에서 구입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암상은 워낙 변수가 많아서요. 어쨌든 추천해 드리지는 않아요. 암상에서 거래하다가는 괜히 눈탱이…….”

흑미랑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어색하게 웃었다.

하오문의 예비 주인에게 쓰는 말치고는 너무 저렴했다.

거기에 암상을 추천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상대를 무시하는 행동이 될 수도 있었다.

암상에서 거래되는 곡물의 양은 한 문파에서 소화하기 힘든 단위로 거래된다.

즉, 흑미랑의 말은 그녀가 보기에 하북팽가 정도의 규모라면 굳이 암상을 통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과 같았으니까.

하지만 흑미랑의 생각은 다음 한빈의 말에 무참히 깨졌다.

“그럼 나랑 같이 오늘 암상이나 둘러보죠. 어디서 열리는지는 아시죠?”

“그건 그렇지만…….”

흑미랑은 다시 말끝을 흐렸다.

하오문도 특유의 촉이 발동한 것이다.

팽한빈이라는 사람을 하북팽가의 일원으로만 생각한 것은 자신의 실수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한빈을 바라보며 이곳 양주현에서 일어날 평지풍파를 예상했다.

그때였다.

점소이 몇이 커다란 쟁반을 가져와 탁자 위에 음식을 놓기 시작했다.

탁. 탁.

순식간에 그들 앞에 진수성찬이 놓였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음식이 한꺼번에 나온 것이다.

한빈은 기분 좋게 젓가락을 들었다.

그것도 잠시,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이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영호가 입을 쑥 내밀고 있었다.

한빈이 한참을 바라보고 있어도, 영호는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한빈은 힐끔 고개를 돌려 흑미랑을 바라봤다.

흑미랑은 옆에 있는 영호는 신경도 안 쓰고 오리고기를 입에 넣고 있었다.

“아, 정말 맛있네요. 공자님.”

“흑 소저, 무사님은 왜 저러고 있는 겁니까?”

“직접 물어보세요. 그런데 몰라서 그러신 건 아니죠?”

“흠, 진짜 모릅니다.”

한빈은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아무리 쏘아봐도 영호는 꼼짝하지 않았다.

한빈은 못 참겠다는 듯 물었다.

“무사님, 왜 그러고 계세요?”

“…….”

영호는 입을 내민 채 한빈을 바라보지 않았다.

한빈이 다시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걱정돼서 그럽니다. 이 약이 정말 효험은 있는 건가요?”

영호는 품에서 백색 호리병을 꺼내 흔들었다.

“저를 못 믿습니까?”

“이걸 먹었는데도 계속 잠이 옵니다.”

영호가 지금 밥을 못 먹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한빈이 준 환약을 먹었지만, 계속 밤만 되면 눈이 감긴다.

며칠 전 새벽에 환약을 하나 먹은 뒤, 백색 병에서 다른 환약 하나를 꺼내 먹었다.

남은 환약은 모두 세 알.

한 달마다 환약을 먹으면 몽검이라는 병이 나을 것이라 했다.

물론 첫 번째 먹은 환약은 독이었고.

그다음 먹은 약은 해약이었다.

독으로 인한 고통을 겪지 않은 영호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서생이 말하길 몽검은 기연이라고 했지만, 영호는 그것이 병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아무리 깨어 있으려 노력해도 무용지물이었다.

그때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밤이 되면 잠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습니다.”

“하하, 그때는 고민이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럼 지금은…….”

“고민이 없어지신 거지요.”

한빈이 씩 웃자 영호는 입을 탁 벌렸다.

요즘 확실히 달라진 것은 있었다.

문제는 고민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희망이 없어진 것이라는 점이었다.

영호가 넋을 놓고 있는 동안, 흑미랑은 음식의 반 이상을 해치웠다.

흑미랑은 이렇게 폭식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단지 한빈과의 동행이 생각보다 힘들었다.

한빈은 밤에 잠을 자지 않았다.

한빈이 영호에게 밤이 되면 잠이 드는 게 당연하다고 한 대목에서 흑미랑은 먹던 음식을 뿜을 뻔했다.

한빈은 자신과 동행한 뒤 한 번도 잠을 잔 적이 없었다.

자는 대신 누군가를 패고 돌아왔다.

사실 처음에는 흑미랑도 궁금했다.

하지만 어제부터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잠을 청했다.

며칠간의 기억을 떠올린 흑미랑은 자신의 얼굴을 만져 봤다.

푸석푸석한 게 확실히 예전 같지 않았다.

젓가락을 놓은 흑미랑은 주위를 돌아봤다.

한참을 보던 흑미랑은 다시 젓가락을 잡고는 한숨을 쉬었다.

“휴.”

“왜 그래요? 흑 소저.”

“아무래도…….”

흑미랑은 한빈의 얼굴을 힐끔 보고는 말을 멈췄다.

차마 한빈에게 외모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지금 흑미랑이 한숨을 쉰 이유는 한 가지였다.

흑미랑은 음식을 먹기 위해 면사를 벗고 있는 상태였다.

평소 같으면 흑미랑의 외모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흑미랑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어쩌다 마주친 사내들은 시선을 돌리기 바빴다.

그러니 흑미랑이 미칠 지경이 된 것은 당연했다.

한빈에게는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흑미랑도 한 명의 여인이었다.

외모가 이리 망가지는데 속이 멀쩡할 리 없었다.

잠시 후, 한빈 일행은 암상의 경매에 참여하기 위해 음식점을 나섰다.

한빈 일행이 음식점에서 사라지자, 여기저기서 헛숨이 터져 나왔다.

“아까 봤나?”

“그럼 봤지 왜 못 봤겠나!”

“어둠의 기운을 그리 뿌리며 다니는 무사는 처음 봤네.”

“그러게 말일세. 숨이 막혀서 죽을 뻔했네.”

“자네는 숨이라도 쉬었지. 나는 숨도 참았네.”

그들은 한빈 일행이 사라진 곳을 바라봤다.

그들이 말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영호였다.

영호는 음지에서 활동하던 살수였다.

그러지 않아도 살기를 풍기는 그가 음식에는 손도 안 대고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있으니, 사람들은 숨도 쉬지 못했던 것이다.

* * *

그날 밤. 한빈 일행이 멈춘 곳은 커다란 장원의 앞이었다.

그 장원의 대문은 아무렇지 않게 열려 있었다.

그곳을 들어가려던 한빈이 걸음을 멈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