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 이삭 줍는 공자님 (2)
묘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심미호의 모습에 설화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언니.”
“주군은 어디 계셔?”
“공자님은 급한 일이 있다고 먼저 출발하셨어요. 그런데 갑자기 전서구가 날아와서는 적혈맹호대와 합류하래요. 그리고 이건…….”
설화는 품속을 뒤지더니 쪽지 하나를 주섬주섬 꺼냈다.
심미호는 그 쪽지를 받아 들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뭐지?”
읽어 본 쪽지의 내용이 황당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간단했다. 지나가는 길에 시장에 나온 곡물을 장악하라는 것이었다.
장악이라?
어느 선까지 사들여야 장악이라는 말인가?
거기에 적혈맹호대는 지금 자금이 한 푼도 없었다.
주군인 한빈이 준 돈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여행 경비였다.
곡물을 사들일 돈으로는 한참 부족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상황.
그 모습에 설화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헤헤, 저도 처음에 봤을 때는 무슨 일인가 했어요.”
“그러게 말이다. 그런데 무슨 돈으로…….”
“돈이라면 청화와 제가 조금 있어요. 그 돈으로 먼저 해결하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서재오 대협도 돕기로 했어요.”
“설화야, 네가 돈이 어디 있다고 그래?”
심미호는 의심의 눈초리로 설화를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설화는 적혈맹호대의 대원들에게 당과를 얻어먹는 처지였다.
주군인 한빈과의 계약은 철저한 무급.
심미호도 그런 설화가 안타까워서 보일 때마다 당과를 사 주곤 했다.
그런데 곡물을 사들일 돈이라니?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때 설화가 다시 품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 모습에 심미호는 고개를 내저었다.
누구 봐도 볼품없는 가죽 주머니였다.
저 가죽 주머니에 돈을 넣어 봤자 은으로 열 냥 정도 들어가면 그게 한계일 것이었다.
물론 많은 돈일 수는 있었다.
하지만 주군의 지시를 이행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돈이었다.
주군은 왜 불가능한 지시를 내렸을까?
그것이 심미호가 가장 궁금해하는 점이었다.
그때 설화가 가죽 주머니를 열었다.
순간 가죽 주머니를 바라보던 심미호의 눈이 커졌다.
그 안에는 한눈에 봐도 보통 물건이 아니라 생각되는 구슬이 들어 있었다.
마치 햇볕을 빨아들일 것 같은 기운을 내뿜고 있는 그것은 바로 야명주였다.
“헉, 그 정도라면…….”
“이건 작은 거예요. 다른 것도 하나 더…….”
“왜 그러니?”
“공자님이 강호에서는 재산의 삼 할은 숨기는 거라고 하셨어요.”
“그거 실력 아니니?”
“어쨌든 숨기라고 하셨는데…….”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구나. 주군이 네게 비자금을 맡기고 가신 거구나.”
“이건 제 건데요.”
“그게 무슨 말이니? 주군이 준 게 아니리 네 물건이라고?”
“이거 주웠어요. 제가 주운 거라서 제 것이라고 공자님이 그러셨어요.”
“헉.”
심미호는 입을 딱 벌렸다.
그러고는 야명주와 설화를 번갈아 바라봤다.
야명주는 천산에서 나는 최상급 야명주가 분명했다.
그동안 불쌍해 보였던 설화의 주변에서 광채가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때였다.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휘릭.
심미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백미랑과 광개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심미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 분은 어디 갔다 오셨나요?”
“돈하고 영약 좀 찾으러 갔다 왔습니다.”
광개가 어깨에 멘 자루를 가리키자, 심미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광개가 어깨에 메고 있는 자루는 두 개였다.
“그게 뭔가요? 광개 대협.”
“이건 바로…….”
광개가 당당하게 두 개의 자루를 바닥에 놓았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지면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이 전해졌다.
하지만 하나는 아예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거운 자루 하나와 가벼운 자루 하나라?
호기심이 동한 심미호가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광개가 물었다.
“뭐부터 보겠습니까?”
“저는 무거운 자루부터요.”
“여기 보시죠.”
광개가 자루를 열자 심미호가 고개를 자루의 입구에 가까이 댔다.
순간 심미호가 탄성을 흘렸다.
“헉, 이게 대체…….”
그 모습에 옆에 있던 소대섭이 눈을 크게 떴다.
“뭔데 그렇게 놀라? 심 부대주.”
“직접 보세요.”
소대섭은 고개를 숙여 자루 안을 들여다봤다.
그곳에는 은괴가 잔뜩 들어 있었다.
놀라는 둘을 본 광개가 어색하게 웃었다.
“금괴가 없어서 은괴로 바꾸다 보니 양이 조금 많아졌습니다.”
“대체 이건 어디에서 난 돈입니까?”
소대섭이 묻자, 광개는 턱짓으로 백미랑을 가리켰다.
아니 정확히는 백미랑의 등에 업힌 청화를 가리킨 것이었다.
소대섭은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설화가 청화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청화도 저하고 같이 야명주를 주웠거든요. 헤헤.”
설화의 설명에 소대섭과 심미호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심미호는 호흡을 가다듬은 뒤 옆에 있는 자루로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저 가벼운 자루는 뭐예요?”
“영약입니다. 이것도 한번 보시겠습니까?”
광개가 자루를 풀자 심미호는 반사적으로 자루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순간 심미호는 비명을 질렀다.
“헉.”
얼마나 놀랐는지 심미호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 모습에 소대섭이 재빨리 물었다.
“대체 뭐가 들어 있기에 그러는 거지? 심 부대주.”
“영약은 맞아요. 그런데…….”
심미호가 말끝을 흐리자, 소대섭이 재빨리 자루를 확인했다.
반응은 소대섭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소대섭은 얼어서 아예 움직이지도 못했다.
자루에 있는 것은 겨울에만 볼 수 있다는 백사였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물컹물컹한 뱀의 특성상 가벼워 보였던 것뿐이었다.
광개는 자루를 닫고 소대섭에게 말했다.
“팽 공자가 적혈맹호대에 달여 주랍니다.”
순간 소대섭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심미호도 마찬가지로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천수장에서 노란 무말랭이만 먹던 시절이 기억나는 것은 왜일까?
왠지 저게 주식이 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에, 심미호는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 * *
한편 한빈은 흐뭇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력편 상급(上級)]
[속(速) : 칠십(六十), 한계 : 팔십]
[……]
[안(眼) : 칠십(六十), 한계 : 팔십]
영호의 목숨을 노리고 몰려든 자객 덕분에 모든 실력편의 구결이 어느 정도 차올랐다.
한빈은 문득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과연 구결을 한계까지 수집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고민도 잠시, 한빈은 고개를 저었다.
무림이라는 것은 항상 위험에 대비해야 했다.
다다익선은 강호에서도 진리였다.
한빈은 흐뭇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오늘 밤에는 어떤 먹잇감이 올지 기대되어서였다.
그때였다.
한빈은 다시 용린검법의 실력편을 보았다.
한계라?
지금 생각해 보니 한계까지 채우면 어떤 보상이 있을 것 같은 기대가 들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용린검법의 끝에 한 걸음 더 다가간다는 의미였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한빈은 갑자기 걱정되었다.
‘내가 너무 심하게 팼나?’
그들이 다시 안 오면 어떻게 할까 걱정까지 되는 한빈이었다.
한빈과 표정이 판박이인 이가 근처에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영호였다.
영호의 표정을 한빈보다 몇 배는 더 심각했다.
영호는 도무지 자신의 상태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취권이나 취검은 들어 봤어도 몽검이란 무공은 처음 들어 봤다.
꿈에 취해서 검을 휘두른다면 그게 몽유병이지 무공이겠는가?
실제라면 더 소름이 돋았다.
강호의 양지에 얼굴을 드러냈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살인을 저지른다라?
“흠.”
영호는 있는 대로 미간을 좁혔다.
그 모습에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물었다.
“무사님도 고민이 많으시군요.”
“네, 고민이 많습니다. 몽검이라는 것이 진짜 있습니까?”
“네, 고서에서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건 몽유병이나 똑같은 것이 아닙니까? 만약 애먼 사람에게 해라도 입힌다면…….”
이것은 진심이었다.
몰래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의식중에 일어난 일이라면 문제였다.
한마디로 무림 공적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니 말이다.
“그건 아닙니다. 고서에는 분명히 무인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 들었습니다. 무사님은 정도를 걷고 계시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영호는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겨우 참았다.
살수 출신에 위상호 밑에서도 음지의 일만 했던 그였다.
그는 정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영호는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기연이 아니라 저주였다.
영호는 서생이 가지고 있는 돈을 뺏고 빨리 임무를 완수하고 싶었다.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간다면 위상호는 지금의 상태를 치료해 줄 것이었다.
잠시 후. 날이 어두워지자 영호는 갑자기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영호는 두려움을 겨우 떨쳐 냈다.
오늘 밤에는 꼭 서생이 가진 돈을 탈취하리라 결심했다.
영호는 흑미랑을 바라봤다.
“오늘은 여기에 자리를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네, 그래야겠네요.”
“저는 자리를 정리하고 근처에서 은신하고 있겠습니다.”
“같이 안 계시고요?”
“공자의 근접 호위는 흑 무사님께 맡기고 저는 근처에서 자리를 잡겠습니다. 아무래도 어제의 일이 걸립니다.”
“네, 그렇게 하시죠.”
흑미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영호는 숨 쉴 틈도 없이 잠자리를 마련했다.
푹신한 풀을 깔고 그 위에 가죽을 덮었다.
그러고는 가운데에 모닥불을 피웠다.
누가 봐도 한빈의 호위 무사 같은 모습이었다.
물론 영호는 오늘 서생의 주머니를 털 작정으로 서두르고 있었다.
모닥불이 타오르자 한빈은 꼬치를 올려놨다.
순간 고기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때 그 광경을 바라보는 네 쌍의 눈이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강남사호였다.
그중 일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자가 영호의 호위인가?”
“네, 확실합니다. 어제 보낸 자객들의 말에 의하면 분명 서생 복장을 한 이에게 맞았다고 들었습니다.”
답한 이는 강남사호 중 이호였다.
하지만, 일호는 더욱 눈을 가늘게 떴다.
“저자가 호위라면 자객을 죽이지 않고 왜 살려 보냈을까?”
일호가 고개를 갸웃하자 이호가 답했다.
“자객의 말에 의하면 죽은 척했답니다. 진짜 죽을 때까지 팼답니다.”
“죽을 때까지 팼다고?”
“얼굴과 상처를 보니 죽을 때까지 팬 것이 맞습니다. 진짜 안 죽은 것이 용하더군요.”
“그럼 저자가 그런 고수라는 것이지?”
“네, 행동도 능청스럽지 않습니까? 영호도 대단합니다. 누가 지켜볼까 하는 생각으로 자신이 호위인 척하고 있지 않습니까? 일단 영호의 멱부터 따고 저 서생 복장의 무사를 처치하시죠.”
“음.”
일호는 고민하는 듯 검지로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강남사호는 강남 정파에서도 이름이 꽤 알려졌다.
소위 말하는 강남의 대표 협객 중 하나가 바로 강남 사호였다.
그런데 누군가의 목을 벤다?
이 일이 알려진다면 협객의 명성에 금이 갈 것이었다.
일호는 여인과 서생 그리고 영호의 목숨을 모두 거두기로 했다.
그다음 일호의 고민은 간단했다.
이제부터는 가장 효율적인 살인의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했다.
일호는 이호를 바라봤다.
“네 생각대로 진행하자.”
“알겠습니다, 조장.”
일호가 고개로 신호하자 대화를 지켜보던 삼호와 사호가 민첩하게 움직였다.
일호는 미리 검을 빼 들었다.
그러고는 그 검을 천으로 감쌌다.
일호가 자신의 검을 천으로 감싼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은 살기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일호는 자신의 가죽 신발도 천으로 감쌌다.
양지에서 활동하고 있었지만, 일호는 완벽한 잠행을 할 수 있는 위씨세가의 몇 안 되는 무사였다.
영호와 서생 복장의 무사를 처치하는 것은 자신 하나면 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