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 이삭 줍는 공자님 (1)
한빈의 말에 영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네?”
“노숙하면 당연히 호위 무사가 자리를 준비해 주는 게 이치에 맞지 않나요?”
한빈의 말에 영호는 다시 콧김을 내뿜었다.
그것도 잠시, 그는 표정을 수습하고 주변에 있는 나뭇가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살기가 느껴졌다.
영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분명 서생을 노리고 온 자들이 분명했다.
살기가 느껴지는 곳을 향해 영호가 내달리려 할 때였다.
영호의 목 뒤가 따끔했다.
마치 벌레에 물린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 눈이 감겨 왔다.
털썩.
영호는 그 자리에서 뻗었다.
마지막으로 눈이 감기면서 본 것은 여러 쌍의 가죽신이었다.
분명 무인들의 신발.
영호는 속으로 비명을 외쳤다.
‘제기랄!’
이대로라면 서생과 여자 호위 무사뿐 아니라 자신의 목도 달아날 것이 훤했다.
하지만 영호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영호의 의식이 끊기자 그의 주변으로 몰려드는 검은 그림자.
그들은 풀잎 밟는 소리를 내며 포위망을 좁혔다.
사사 삭.
영호를 둘러싼 검은 복면의 사내 중 하나가 말했다.
“너희 실력이 많이 늘었군. 어떻게 감쪽같이 잠재운 거지?”
“…….”
“내가 나무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려고 하는 것이다. 저자의 목을 베어 가면 가주님께서 상을 내리시겠지. 저자를 잠재운 자가 멱을 따는 것이 공평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
하지만 검은 복면의 사내 중 앞으로 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내 지시가 없이 행동한 것에 대해서는 일체 책임을 묻지 않을 테니 어서 나와 보아라.”
“…….”
침묵은 계속 이어졌다.
복면인의 우두머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의 목표는 영호였다.
이번 일은 은밀하게 처리해야 했다.
그래서 여자 무사와 서생에게 영호가 떨어질 때를 기다렸다.
그가 일행한테서 멀어지자, 복면인의 우두머리는 명령을 내렸다.
그가 내린 명령은 단순한 포위.
그런데 누군가가 포위를 넘어서 아예 제압까지 해 버린 것이다.
명령에는 벗어났지만, 일을 수월하게 만든 수하에게 상을 내리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니!
복면인의 우두머리는 자신이 너무 엄하게 수하를 대했다고 생각했다.
“일단 앞으로 나오거라. 나온다면 내가 직접 상을 내리지.”
그때 수하들의 사이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상이요?”
“이번 임무가 끝나면 마을에서 내 친히 마음에 드는…….”
우두머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검은색 복면인들 사이에 쪼그려 앉아 있는 흰색 의복을 입은 서생.
분명히 영호와 같이 다니던 서생이었다.
우두머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용히 처리하려고 기다렸는데, 제 발로 이렇게 찾아오다니……. 네놈의 운을 탓하거라.”
“일단 내 운을 탓하는 건 제 마음이고요. 상으로 뭘 줄 거냐고 물어봤잖아요.”
“평범한 서생인 줄 알았더니 맛이 간 놈이구나.”
우두머리는 혀를 찼다.
그때 우두머리의 수하 중 하나가 조용히 귓속말로 속삭였다.
“조장님, 얼마 전에 향시가 끝나지 않았습니까?”
“그게 저놈과 무슨 상관이냐?”
“생각해 보십시오. 향시에서 떨어지고 머리가 휙 간 서생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냥 목숨을 거두는 선에서 끝내시지요.”
“흠, 시험에서 떨어져서 상태가 저 모양이라…….”
우두머리는 서생 복장의 한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영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의 목에 손을 갖다 댔다.
한빈의 은침을 뽑아 들고는 소매에 닦았다.
그 모습에 복면인들이 눈을 크게 떴다.
우두머리는 잽싸게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즉시 합격진을 펼쳐라!”
그의 외침에 복면인들이 재빨리 각각의 방위를 점했다.
한빈은 은침을 품에 넣으며 물었다.
“대체 누가 보내서 온 놈들이지?”
“…….”
“혹시 위씨세가?”
“…….”
“머리가 나빠도 한참 나쁘네. 황금 삼천 냥을 훔쳐서 가문을 배신한 사람이 변변한 호위 하나 없이 다닐 줄 알았나?”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이자의 호위라는 거지.”
“그게 무슨 말이냐?”
“미안하지만, 그 이상은 영업 비밀이야.”
“대체 네놈의 정체는…….”
“에이, 비밀이래도.”
한빈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몸을 숙였다.
한빈의 손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영호의 검이었다.
한빈은 영호의 검을 검집째 들고 휘휘 저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마치 먹잇감을 바라보는 맹수처럼 입맛까지 다시고 있었다.
한빈의 이런 행동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다.
실력편의 속성을 이루고 있는 구결이 각각 열 개 정도가 부족했다.
환골탈태는 외모와 응용편의 구결만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었다.
한혈마 효과로 용혈을 한계까지 사용하자 실력편이 한 단계 올랐다.
[실력편 상급(上級)]
중급에서 상급으로 오른 덕분에 속성을 이루고 있는 구결의 한계가 늘어났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겼다.
한계가 늘어났지만, 중급 수준의 속성 숫자만 채워지고 더는 늘어나지 않는다.
[속(速) : 육십(六十), 한계 : 팔십]
[……]
이전에 실력편 중급의 한계까지는 정상적으로 회복되지만, 나머지 구결을 채우기 위해서는 수집을 해야 했다.
하지만, 영호에게서도 흑미랑에게서도 구결을 나타내는 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 복면인에게 일렁이는 점이 보인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하늘이 내린 수련의 기회였다.
복면인들의 우두머리는 한빈의 그런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검집에서 검도 뽑지 않고 휘두르는 모습이, 그저 강호 초출 같았다.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 때도 방심하지 않는 법이며.
오래된 거목일수록 가지는 아래로 휘어지는 법이었다.
상대는 분명 애송이였다.
복면의 겉으로 우두머리가 입을 씰룩이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씰룩이는 입술이 멈춤과 동시에 그는 손짓했다.
공격을 수행하라는 신호였다.
동시에 복면인들은 질풍처럼 달려들었다.
그때였다.
한빈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놈들!”
순간 복면인들이 얼음처럼 굳었다.
우두머리는 미칠 것만 같았다.
상대는 분명 사술을 쓰는 자였다.
사자후 한 번에 자신의 몸을 옥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때였다.
눈앞에 검집이 통째로 날아드는 것이 보였다.
팍, 팍.
멀리서 한빈을 지켜보던 흑미랑은 눈을 크게 떴다.
한빈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
강호인 중에 저렇게 자비를 베푸는 자가 있던가?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밀면 무림인은 백이면 백 그자의 목숨을 거둔다.
하지만, 한빈은 달랐다.
상대의 목숨이 끊어질까 봐 조심스레 검집을 휘두르고 있다.
흑미랑은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어떻게 저리 고귀한 심성을……!”
하나 그 놀라움은 머지않아서 다른 감정으로 바뀌었다.
한빈의 매질이 자비가 아니라 악랄함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 * *
다음 날 아침, 영호는 지저귀는 산새 소리에 눈을 떴다.
짹짹.
눈을 뜬 영호는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비명을 질렀다.
“헉!”
그러고는 자신의 목을 다급하게 만져 보았다.
다행히도 목이 붙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는 모닥불이 재를 남긴 채 꺼져 있었다.
그 주변에는 서생과 여자 무사가 눈을 붙이고 있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그때 한빈이 눈을 뜨고 일어났다.
한빈은 한걸음에 달려와 영호의 손을 잡았다.
“어이쿠, 대협.”
“대협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혹시 기억 안 나십니까?”
“무슨 기억 말입니까?”
“어제 산적들이 습격해 왔습니다.”
“산적이라…….”
영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제 마지막 기억으로 봤던 가죽 신발을 떠올리니 대충 이해가 갔다.
가죽 신발을 신는 것은 보통은 무림인이었다.
그것은 소리를 최대한 줄이기 위함이었다.
거기에 철질려 같은 암기도 어느 정도 보호할 수 있었다.
산적이라면 무림의 한 축이라 볼 수 있으니, 어제 본 자들이 산적일 수도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살아남았느냐는 점이었다.
그때 막 일어난 흑미랑이 다가와 말을 이었다.
“대협, 일어나셨네요. 제가 어제 일을 설명해 드릴게요. 그러니까…….”
흑미랑의 말에 영호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설명은 간단했다.
영호가 휘청거리며 걸어오더니 일류 무사에 버금가던 산적들을 모두 해치웠다는 것이었다.
설명을 듣던 영호는 자신의 검집을 확인했다.
그는 검집에서 검을 뽑아 봤다.
검신은 말끔하니, 전투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영호는 검을 집어넣고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물었다.
“제 검신은 깨끗합니다. 그런데 제가 적들을 해치웠다는 말씀입니까?”
“대협은 검을 뽑지 않으셨어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검을 뽑지 않고 검집째 들어서 휘두르셨어요. 그것도 기묘한 솜씨로 말이죠. 그것은 현세의 검법이 아니었어요.”
“헉.”
영호는 입을 벌린 채 자신의 검집을 확인했다.
순간 영호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검집 여기저기에 혈흔이 보였다.
‘정신을 잃은 자신이 대체 어떻게…….’
영호가 놀라고 있을 때, 한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공부하다가 전에 본 내용인데, 몽검(夢劍)이라는 것이 있더군요. 그러니까…….”
한빈의 말에 의하면 꿈을 꾸면서 검을 휘두르는 특이한 무공이라 했다.
영호는 처음 들어 보는 무공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목이 붙어 있는 이유는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았다.
한빈은 영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 *
한빈이 바라보는 방향에는 하남과 호북의 경계가 있었다.
수십 마리의 적토마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빠르게 서안의 작은 마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따가닥.
따가닥.
그 선두에는 사내와 여인이 있었다.
그들은 적혈맹호대의 대주인 소대섭과 부대주인 심미호였다.
심미호는 슬쩍 자신이 탄 적토마를 바라봤다.
본래였으면 붉은 갈기를 휘날렸을 적토마는 지금은 황토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얼마나 바삐 달려왔는지 말해 주고 있었다.
게다가 적토마의 속도도 처음보다는 확연히 느려졌다.
심미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을의 앞을 바라봤다.
그녀가 예상한 대로 그곳에는 수십 마리의 적토마가 대기하고 있었다.
심미호는 재빨리 소대섭을 바라봤다.
“대주, 저기가 주군과 약속한 장소인가 봐요.”
“저기가 맞군.”
“그런데 저기 있는 사람들은 누구죠?”
“어디를 말하는 건가? 심 부대주.”
소대섭이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심미호가 말했다.
“저기 말이에요. 꼭 설화를 닮지 않았어요?”
“설마, 옷만 비슷한 거겠지…….”
소대섭이 고삐를 늦추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심미호는 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저 멀리 적토마 사이에서 어슬렁거리는 아이는 설화와 꼭 빼닮았다.
그것도 잠시, 심미호는 고개를 저었다.
저 아이가 설화일 리가 없었다.
자신들은 적토마를 타고 쉬지 않고 달려왔다.
그런데 주군인 한빈과 함께 떠난 설화가 어떻게 저곳에 먼저 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때였다.
설화를 닮은 아이가 고개를 돌리더니 심미호가 탄 말을 향해 달려왔다.
그런데 그 속도가 문제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가까워진 아이가 외친다.
“부대주 언니!”
“어?”
심미호가 눈을 크게 떴다.
앞에 있는 아이는 설화를 닮은 것이 아니라 진짜 설화였다.
“왜 그렇게 놀라는 거예요? 언니.”
“여긴 무슨 일이니, 설화야? 그리고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온 거야?”
“헤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그렇게 됐다니 그게 무슨…….”
심미호는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