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419화 (419/621)

419. 오비이락(烏飛梨落) (6)

완벽하게 비밀을 지키는 방법.

이런 안전한 방법 때문에 대부분의 무림세가와 문파들은 하오문에 전서를 맡긴다.

이보다 의뢰하는 문파들의 비밀을 더 잘 지켜 낼 방법이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곳에 누가 온다 해도 저 비둘기만 보고 어떤 문파라고 구별할 수는 없지 않은가?

비둘기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무림의 어떤 고수가 와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문이나 문파가 가지고 있는 전서구의 세세한 모습까지 기억할 수 있는 자는 없을 테니까.

그것은 하오문이 자랑하는 전서구 관리 업무였다.

하오문의 입장에서도 이런 방법이 편했다.

그들은 단지 비둘기만 관리해 주면 되었다.

영호는 나머지 비둘기를 바라봤다.

남은 비둘기는 열댓 마리.

자신이 봐도 그 비둘기가 어느 가문 혹은 어느 문파의 비둘기인지는 모른다.

자신이 저 비둘기의 주인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은 하오문을 믿어야 하는 이유기도 했다.

영호는 자신이 맡긴 비둘기의 다리에 쪽지를 넣은 대롱을 묶었다.

그러고는 벽 쪽으로 갔다.

벽에서 천을 걷어 내자 찬바람이 휙 하고 들어온다.

이곳은 반대편의 숲과 연결된 통로였다.

통로를 지나면 숲이 나오고, 비둘기는 위씨세가를 향해 날아가게 된다.

숲의 앞쪽은 하오문이 잘 관리한 덕분에 비둘기에게 해를 가할 맹금류도 없다.

영호는 비둘기를 날린 후 천을 덮고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이것은 안도의 한숨이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래도 뭔가 빠뜨린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전서구도 무사히 보냈고…….

생각을 이어 가던 영호는 자신이 빠뜨린 것이 뭔지 알았다.

그것은 뒷간에 갔다가 아직도 오지 않은 서생이었다.

“대체 이놈은 왜 이렇게 안 오는지…….”

* * *

서생은 조그만 방에 앉아 쪽지 하나를 확인하고 있었다.

순백색의 방은 서생의 하얀 얼굴과 묘하게 어울렸다.

일렁이는 호롱불 때문인지 서생의 표정이 변하는 것만 같았다.

서생은 물론 한빈이었다.

한빈이 다시 주문현으로 간 것은 우연이었다.

한빈이 남긴 흔적 덕분에 주문현이 발칵 뒤집힌 것도 우연이었다.

하지만, 한빈과 영호가 만난 것은 우연이 아녔다.

그것은 전생에서 끌고 온 인연이 분명했다.

한빈은 영호가 위씨세가에서 일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전생에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한빈과 귀검대의 목숨을 구한 것도 영호였다.

위씨세가의 함정을 가장 먼저 알려 준 것이 영호였고.

그 때문에 가장 먼저 목숨을 잃었던 그였다.

마지막에 죽을 때는 위씨세가에서 보낸 첩자가 아닌 귀검대의 일원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빈은 지금 어떤 의도로 영호를 대하고 있을까?

물론 일단 위씨세가의 속셈을 알기 위해서였다.

한빈은 쪽지를 확인하고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한빈은 미리 준비된 종이를 깔고 가느다란 붓을 들었다.

스스슥.

눈 깜짝할 사이에 원래 있던 필체와 똑같은 글자가 종이 위에 가득 찼다.

두 개의 쪽지를 번갈아 확인한 한빈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봐도 완벽한 필체였다.

한빈은 새로 쓴 쪽지를 대롱에 넣은 후 누군가에게 건넸다.

대롱을 받은 이는 여인이었다.

마치 백미랑과 쌍둥이라고 할 만큼 비슷하게 생긴 여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흑미랑.

실제로 백미랑의 쌍둥이가 맞았다.

물론 백미랑과는 다르게 흑색의 의복을 입고 있다.

그 의복이 아니라면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외모였다.

“하오문의 주인께 인사드립니다. 주인의 뜻을 받들겠나이다.”

“그냥 팽 공자라고 불러 주세요.”

“아, 그랬죠.”

흑미랑은 어색하게 웃었다.

한빈도 마주 웃었다.

하는 짓까지도 백미랑을 빼다 박았다.

흑미랑은 비둘기의 다리에 대롱을 다시 매단 후 흰색 방의 옆에 있던 천을 열었다.

천을 열자 그물이 보인다.

흰색 방은 동굴의 끝과 연결되어 있는 방이었다.

동굴의 끝에는 전서구를 잡을 수 있는 그물이 설치되어 있던 것.

이것은 하오문의 영업 비밀이었다.

문파와 무림세가의 비밀이 철저히 보장되는 듯하지만, 하오문은 통로의 끝에서 이렇게 전서구를 잡아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이 챙긴 정보는 하오문의 힘이 된다.

이것은 하오문의 지역 문주들만 아는 비밀이었다.

물론 한빈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전생에는 한빈도 쓰던 방법이었으니 그리 놀라울 것은 없었다.

지금 같은 경우는 도리어 흑미랑이 놀란 상황.

“팽 공자님은 어떻게 알고 계셨어요?”

“제가 눈치가 빠른 편이죠.”

“헉, 눈치 가지고 하오문의 비밀을 알아채셨다고요?”

“눈도 좋은 편입니다. 언젠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동굴 입구를 본 적 있는데 그물이 보이더군요. 그물을 조금 더 안쪽을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그나저나 아까는 말도 없이 떠나셔서 서운했어요. 저희가 구해 드린 물건은 마음에 드시는지요?”

“네, 마음에 듭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자신의 소매를 걷었다.

투명한 천이 한빈의 팔을 감싸고 있었다.

어찌나 투명한지 그저 맨살로 보이기도 했다.

그것은 만년 묵은 누에가 뽑은 실로 만들었다는 만년잠사로 만든 상의(上衣)였다.

웬만한 병장기로는 뚫을 수 없다는 무림의 보물이었다.

서열로 따진다면 무림의 기물 중 오십 번째 안에는 들어가는 물건이었다.

이 물건을 얻기 위해 들인 돈이 무려 황금 천 냥이었다.

솔직히 하오문이 아니었다면 이 물건을 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실 회복력이 뛰어난 한빈에게는 어찌 보면 필요 없는 물건.

그렇다면 한빈은 왜 이 물건에 막대한 금액을 지불해 가며 샀을까?

그것은 바로 이 만년잠의가 한혈마 효과의 부작용을 없애 주기 때문이었다.

만년잠의는 안팎의 모든 공격도 막아 주는 효과가 있었다.

밖의 공격도 막아 주지만, 안쪽에서 나오는 땀마저 막아 버린다.

덕분에 만년잠의를 실제로 착용하는 무인은 없었다.

하지만 한빈은 달랐다.

용린검법의 효용 덕분에 완벽하게 밀착된 만년잠의의의 압박을 견딜 수 있었다.

덕분에 한혈마 효과의 부작용을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었다.

즉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고 구룡십팔보를 펼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제 언제든지 쉬지 않고 하북까지 달려갈 수 있는 상황.

여기까지 생각한 한빈이 미간을 좁혔다.

얼마 전 한혈마 효과 때문에 뒹군 것이 억울해서였다.

만금 전장 호북 지부에 있던 위씨세가의 비자금을 찾은 것과 만년잠의를 구한 것은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지만, 지금은 만년잠의가 필요 없어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하북으로 급히 갈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호가 보낸 쪽지를 보고 위씨세가의 가주인 위상호의 계략을 알아챘다.

위상호는 양쪽의 싸움이 금방 결판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거기에 위상호가 원하는 것은 하북팽가만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한빈은 생각이 깊어졌다.

앞으로의 일들을 상상하며 계획을 세우는 한빈의 표정을 시시각각 변했다.

한빈을 바라보고 있는 흑미랑의 표정도 변화무쌍하게 바뀌었다.

한빈의 행보에 따라 하오문의 운명이 바뀐다고 생각하니, 그 표정 하나하나가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팽 공자님, 왜 그러세요?”

“판이 바뀌었습니다.”

“판이 바뀌다니요?”

흑미랑의 표정이 호기심으로 물들었다.

한빈은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바둑판인 줄 알았더니 장기판이네요. 이제 거기에 맞춰서 말을 배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

흑미랑이 입을 벌렸지만, 한빈은 눈길도 주지 않고 재빨리 붓을 들었다.

그러고는 여러 장의 쪽지를 쓰기 시작했다.

쓰스슥.

쓰윽.

일필휘지로 내용을 적는 한빈의 모습에 흑미랑은 더 크게 입을 벌렸다.

검을 저리 빨리 쓴다고 하면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붓을 저리 빨리 놀리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하오문의 상징적인 주인으로 인정받은 하북팽가의 사 공자는 하늘이 내린 기재가 맞았다.

아니,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맞는지도 의심스러웠다.

무림에는 기인이사가 많다지만, 하북팽가의 사 공자처럼 갑자기 사람이 바뀐 경우는 없었다.

뭐, 십 년 정도 산속 깊은 곳에서 수련하다가 나왔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북팽가의 사 공자는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가능한가?

흑미랑은 하북팽가의 사 공자의 몸속에 달마나 장삼봉 같은 절대 고수의 혼이 들어간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언니인 백미랑의 말에 의하면 하북팽가의 사 공자는 현실적이어도 너무 현실적이었다.

어쩔 때는 민초들을 위하는 것 같으면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이익은 철저히 챙긴다는 것이 백미랑이 보내온 정보였다.

흑미랑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한빈의 앞에 쪽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때 한빈이 작게 웃으며 흑미랑을 바라봤다.

“이것 좀 부탁드립니다.”

“그게 대체 뭔가요?”

“말을 움직여야 하는데 말이 너무 멀어서요.”

“그럼 이게 다 전서구로 보낼…….”

“네, 맞습니다. 쪽지 위에 목적지는 적어 놨습니다.”

“이걸 우리가 봐도…….”

“됩니다. 한 식구잖아요.”

한빈이 씩 웃었다.

순간 흑미랑은 숨을 멈췄다.

가슴이 요동쳤기 때문이었다.

한빈의 웃음 때문이 아니었다. 한빈이 하오문을 식구로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하오문을 양지로 끌어올릴 전설의 인물이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 생각하는 흑미랑이었다.

그런데 한빈이 그를 식구로 인정하자, 그동안 설움을 받던 하오문의 과거가 떠올랐던 것이다.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흑미랑의 감정.

반면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이해가 안 되어서였다.

등을 맡길 수 있다면 식구가 맞았다. 그리 감격할 이유는 아니었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뒷간을 간 것치고는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 것 같군요.”

“잠시만요, 팽 공자님.”

“네?”

“만년잠의 말이에요.”

“혹시 문제라도 있습니까? 돈이 부족한 겁니까?”

한빈이 품을 뒤지자 흑미랑의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니에요. 그 반대예요. 황금 사백 냥 정도가 남아서요.”

“아, 그건 그냥 가지고 계세요. 하오문도 돈 들어갈 때가 많지 않습니까?”

“가, 감사해요. 팽 공자님.”

흑미랑은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만년잠의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물건이 맞긴 했다.

하지만 찾는 이가 없어서 어느 상단에 묻혀 있었기에, 생각보다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었다.

다른 이 같으면 이익으로 남기겠지만, 한빈은 하오문의 미래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솔직히 말한 것인데 돌아온 대답이 가지고 있으라니!

황금 사백 냥이 남의 집 애 이름도 아니고 배포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한빈은 고개를 갸웃한 채 재빨리 몸을 돌렸다.

지금 가지고 있는 황금 이천 냥도 최대한 빨리 녹이는 것이 좋았다.

원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하오문에 만년잠의를 사고 남은 돈을 맡긴 것은, 하오문의 은밀한 일 처리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흑미랑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공자님.”

“네, 말씀하시죠.”

“아까 바꿔치기한 쪽지에는 무슨 내용이 써 있었나 물어봐도 될까요?”

“비밀입니다.”

한빈이 씩 웃었다.

* * *

영호는 얼굴이 벌게진 채 콧김을 뿜고 있었다.

하오문이 생사람을 잡는 곳은 아니지만, 혹시 실수라도 했다면?

그런 경우 하오문이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서생 놈이 분명히 어떤 실수를 해서 하오문의 문도들에게 취조를 받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 화살이 자신에게도 날아올 터였다.

영호는 움찔하며 통로를 바라봤다.

낌새가 이상하면 언제든 튀어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