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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417화 (417/621)

417. 오비이락(烏飛梨落) (4)

한빈의 걸음이 호북의 초입에서 멈춘 것은 어찌 보면 천운이었다.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었다.

“진짜 운이 좋네.”

말을 마친 한빈은 품에서 서생들이 쓰는 모자를 꺼내 썼다.

이제 누가 봐도 무인이 아닌 서생.

만금 전장 안으로 들어간 한빈은 입을 막고 작게 헛기침했다.

“흠.”

그 소리에 점원이 급히 달려왔다.

점원은 깔끔한 흰색 의복에 두건까지 흰색으로 쓰고 있었다.

이곳이 의원인지 전장인지 모를 정도.

거기에 주변에서는 차향이 은은히 풍겨 온다.

만금 전장이 왜 중원 최고의 전장인지를 보여 주는 것만 같았다.

한빈의 앞에 멈춘 점원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옵쇼. 무슨 일을 도와드릴까요?”

“전장에 맡긴 돈을 찾으러 왔습니다.”

“돈이라면…….”

점원은 말끝을 흐리며 한빈을 바라봤다.

서생처럼 보이는 의복으로 봐서는 돈이 별로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점원은 눈을 크게 떴다.

얼굴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귀티는 숨길 수 없었다.

점원은 재빨리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그는 이곳 만금 전장의 중급 점원이었다.

중급 점원까지 오르기까지 산전수전 다 겪은 그였다.

이제 이 년만 버티면 수석 점원이 된다. 그 후 지점장까지는 올라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 때문에 점원은 조심, 또 조심하며 손님들을 대하고 있었다.

점원은 다시 한번 한빈을 바라봤다.

외모에서 풍기는 기품은 그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 말하고 있었다.

점원을 손을 비비며 말을 이었다.

“돈을 찾으러 오셨다면 이쪽으로 와 주시지요. 전표는 가지고 오셨는지요?”

“전표라…….”

한빈은 말끝을 흐리자, 점원이 불안한 듯 눈매를 좁혔다.

“혹시 전표도 없이 전장에서 돈을 찾으러 오신 겁니까?”

살짝 높아지는 억양.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내가 찾는 돈에는 전표가 필요 없습니다. 그냥 이곳의 책임자에게 안내해 주시죠.”

“우리 지점장 나으리를요?”

점원이 한빈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그 모습에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손을 들어 가슴에 갖다 댔다.

그러고는 검지와 중지 그리고 엄지로 묘한 모양을 만들어 냈다.

그 모습에 점원의 눈이 커졌다.

저 표시는 만금 전장 호북 지부에서 귀빈들에게 알려 준 수신호였다.

그것도 최고 귀빈을 나타내는 신호.

점원의 심장이 갑자기 방망이질 쳤다.

최고 귀빈을 지척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귀빈의 말 한마디는 수석 점원으로 가는 기회가 될 터였다.

점원은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귀빈을 뵈옵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흠.”

한빈이 다시 헛기침하며 따라가자 점원은 힐끔 뒤를 돌아봤다.

그 모습에 한빈이 씩 웃으며 말했다.

“인피면구 처음 보십니까?”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점원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봐도 인피면구가 맞았다.

선배 점원들에게 주워듣기로는 최고 귀빈들은 맨 얼굴을 드러내는 법이 없다고 했다.

저 하얀 피부에 스물도 안 되어 보이는 서생이라?

저런 서생이 귀빈들 특유의 기품을 팍팍 풍기고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그때였다.

한빈의 목소리가 점원의 귓가에 울렸다.

“뭐 하세요? 어서 암실로 안내하시죠.”

“아, 알겠습니다. 어르신.”

점원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말투까지 바뀐 점원의 모습에 한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금 전장의 최고 귀빈은 익명으로 돈을 맡길 수도, 익명으로 돈을 찾을 수도 있다.

익명으로 맡기고 찾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그러니 맨 얼굴을 드러낸 채 귀빈의 암어를 제시하는 일은 없었다.

* * *

점원이 안내한 곳은 주변이 온통 검은색으로 된 방이었다.

그 방의 가운데에 검은색 탁자가 있었는데, 그 위에는 지필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곳까지 안내한 점원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빠져 나갔다.

점원이 빠져나가자 한빈은 팔짱을 끼고 그것을 바라봤다.

한빈이 이곳에 온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물론 돈을 찾기 위해서였다.

한빈은 슬쩍 붓을 들었다.

한빈은 정신을 집중하고 붓을 들었다.

스스-슥.

한빈의 붓이 종이 위를 누볐다.

[구(九).]

[일(一).]

[……]

[사(四).]

열여섯 개의 숫자를 주르륵 쓴 한빈은 붓을 놨다.

툭.

그러고는 그 종이를 가지고 검은색 벽을 향해 걸어갔다.

한빈은 숫자가 적힌 종이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열여섯 개의 숫자는 하나의 글자를 만들고 있었다.

대(大).

이것은 만금 전장이 최고 귀빈들과 서로 약속한 표식이었다.

지금 한빈이 있는 곳은 암실이라 불리는 공간이었다.

만금 전장 내의 모든 익명의 거래는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한빈은 종이를 든 채 잠시 기다렸다.

순간 검은색 벽에서 손 하나가 불쑥 나온다.

검은색 벽에 검은 천이 드리워져 있기에 눈치채기 힘들었다.

처음 오는 자라면 대부분 깜짝 놀라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종이를 건넸다.

종이를 쥔 손은 검은색 천 사이로 스르륵 사라졌다.

검은색 벽 너머로는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여왔다.

스륵.

스륵.

책장 넘기는 소리가 멈추고 벽 건너편에서 감정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를 내드리면 되겠습니까?”

“전부.”

한빈이 짧게 말했다.

순간 건너편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흠.”

“불가능합니까?”

“아, 아닙니다. 내어 드리죠. 하늘이 높으니…….”

벽 반대편에서 뜬금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한빈은 당황하지 않고 답했다.

“검이 그곳을 따르리.”

한빈의 말이 끝나자 검은색 벽에서 손이 다시 불쑥 튀어나왔다.

한빈이 건넸던 종이 대신 만금 전장의 인장이 찍힌 전표 한 뭉치가 나왔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그 전표를 쥐고 암실에서 빠져 나왔다.

한빈이 암실을 빠져나가자 검은색 벽 뒤에서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휴.”

그는 만금 전장 호북 지부의 책임자인 박정한이었다.

길게 한숨을 내쉰 그는 텅 빈 암실을 보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것도 잠시, 그는 재빨리 서찰을 작성했다.

그 서찰은 일정 금액이 전장에서 빠져나가면 본점으로 올려야 하는 보고서였다.

책임자 박정한은 마지막으로 그곳에 금액을 적었다.

황금 삼천 냥.

사실 말도 안 되는 액수였다.

이것을 한 번에 맡긴 자도 없지만, 이렇게 한 번에 찾아간 자도 없었다.

이 정도의 금액을 찾는다면 이유는 하나였다.

그것은 바로 무림인들의 전쟁을 뜻한다.

이것은 지레짐작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 전장업에 몸을 담은 박정한의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확신이었다.

이 정도의 금액이 빠져 나가면 항상 무림에서 평지풍파가 일어났다.

* * *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점원의 안내를 받아 만금 전장 호북 지부를 나왔다.

한빈은 두둑한 전표를 보고는 입맛을 다셨다.

“쩝.”

이건 한빈도 예상 못 한 액수였다.

한빈이 암제의 유산을 맡겨 놓은 것은 만금 전장의 본점인 서안 지부.

서안 지부에 맡겨 놓은 재산을 이곳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암제의 유산은 대부분이 돈이 아닌 보물이었기 때문이다.

보물의 가치를 산정해서 돈으로 찾으려면 실물이 있어야 가능한 법이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한빈이 맡겨 놓은 보물이 없었다.

그렇다면 한빈이 쥐고 있던 돈의 출처는 어디일까?

한빈이 들고 있는 돈은 바로 위씨세가의 비자금이었다.

회귀하기 전 토굴에서 받았던 만금 전장의 전표가 바로 돈을 찾을 수 있는 표식이었다.

뭐, 그때 준 표식이 아니라도 전생에 이곳을 뻔질나게 드나들었으니 일정 부분은 빼낼 수 있을 것이었다.

“황금 삼천 냥이라…….”

황금 삼천 냥이면 전생에 자신의 뒤통수를 쳤던 죄의 일 푼 정도는 용서해 줄 수도 있었다.

그래도 구 할 구 푼의 죄가 남아 있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적의 보급로를 끊을 수 있는 한 수였다.

한빈은 이 흑막의 뒤에 위씨세가의 가주가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한빈은 전표를 품속에 갈무리하고 재빨리 사라졌다.

이제 돈을 얻었으니 필요한 물품을 찾아야 할 때였다.

한빈은 허공에 떠 있는 용린검법을 바라봤다.

시간이 지나자 실력편의 속성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이제 필요한 공력을 모으면 기사회생을 쓸 수 있었다.

기사회생을 쓴 후에는 필요한 물건을 손에 넣기 위해 호북과 하남이 맞닿아 있는 풍림현으로 향해야 했다.

때마침 그곳은 위씨세가가 있는 곳이었다.

한빈은 재빨리 구걸십팔보를 펼쳤다.

시원한 바람이 한빈이 있는 자리를 스치고 지났다.

그 자리에는 낙엽만이 뒹굴 뿐이었다.

한빈은 필요한 물품을 들고 호북 지부의 하오문으로 향했다.

호북 지부의 하오문이 있는 곳은 호북 지부의 만금 전장이 있는 주문현에서 오십 리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한빈은 아무도 모르게 마을로 들어왔다가 소리 없이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파장은 예상 외로 컸다.

* * *

그날 저녁.

주문현의 입구는 관에서 나온 병사들이 통제하고 있었다.

상인들은 마을 초입에 멈춘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가장 당황한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위상호의 오른팔인 영호였다.

위상호가 내린 살(殺)이란 명령의 중심에는 하북팽가가 있었다.

하지만 하북팽가만 죽이고 끝낼 생각이었다면 이 일을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것이 가주인 위상호의 생각이었고 그의 오른팔인 영호는 그 명을 충실이 이행하고 있었다.

가주가 원하는 것은 하북의 혼란.

그에 따른 식량 부족.

모든 것이 가주 위상호가 예상한 대로였다.

이제 마지막 목을 죄어야 할 때였다.

그 목을 죄기 위해서는 만금 전장 호북 지부에 맡겨 놓은 자금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만금 전장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폐쇄된 상황이었다.

병사들은 마을을 봉쇄한 채 이유도 물어보지 않고 있었다.

영호는 대충 상황을 살폈다.

이런 경우라면 대역 죄인이 마을로 숨어들었다든지.

마을 안에서 큰 사고가 났을 경우밖에 없었다.

영호는 자신의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만금 전장으로 들어가서 돈만 찾아오면 되는데 그 간단한 일이 초반부터 막힌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던 영호는 입구를 지키는 병사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은밀하게 전낭 하나를 그의 허리춤에 찔러 넣었다.

전낭을 받은 병사는 눈썹을 꿈틀하더니 손짓한다.

그 손짓에 영호는 희망을 품고 상체를 기울였다.

“들여보내 주실 수 있습니까? 군관 나으리.”

“미안하지만, 안 되겠소.”

병사가 손을 저었다.

영호는 그 모습에 눈을 가늘게 떴다.

돈은 받아 놓고 시치미를 떼는 모습이 얄미워서였다.

만약에 인피면구를 쓰지 않았다면 표정이 탄로 날 정도였다.

영호는 재빨리 마음을 다잡고 다시 물었다.

“들여보내 주지 않을 거면 왜 돈을…….”

“쉿. 내가 언제 돈을 받았다 그러는 것이오? 대신 정보를 하나 가르쳐 주겠소.”

“정보라면…….”

“쉬잇, 목소리를 낮추시오. 지금 이곳을 통제하는 이유가 뭔지 아시오?”

“…….”

“주문현 안에 지금 역병이 돌고 있소.”

“역병이라니, 그게…….”

“씁, 그건 모르겠지만, 누군가 마을이 인위적으로 역병을 퍼뜨리려는 것 같소. 이건 정보를 전한 값으로 받아 두겠소.”

말을 마친 병사는 전낭을 자신의 품에 넣었다.

그때였다.

영호의 뒤에서 누군가 안타깝게 외쳤다.

“허허. 이걸 어떻게 하나!”

그 목소리에 영호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서생 복장의 사내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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