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413화 (413/621)

413. 용담호혈 (5)

지도를 꺼낸 한빈은 백미랑을 바라봤다.

“여기……. 여기 그리고 이곳이 하오문 지부가 있는 곳이죠?”

“…….”

백미랑은 눈매를 좁혔다.

하오문의 운명을 맡길 자이긴 했지만, 어떻게 숨어 있는 하오문의 지부까지 모두 파악한단 말인가?

살짝 정신이 혼미해진 백미랑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 하오문의 숨어 있는 지부까지 알고 계셨던 거예요?”

한빈은 그 모습에 그윽하게 웃었다.

대충 답변도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대충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하오문도 개방의 분타가 어디 있는지 훤하게 알고 있지 않습니까? 개방도 마찬가지겠지요.”

말을 마친 한빈은 슬쩍 광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백미랑도 광개를 바라본다.

멀리 떨어져 있던 광개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광개를 본 백미랑이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었다.

“저 거지 새끼가…….”

“뭐라고 하셨나요?”

“아, 아니에요. 팽 공자님.”

백미랑은 재빨리 표정을 바꾸며 손을 내저었다.

그녀의 속에서는 천불이 끓고 있었다.

역시 개방은 하오문의 영원한 경쟁자이자 조금도 도움이 안 되는 원수였다.

그렇게 광개는 백미랑에게는 심하게 거슬리는 존재가 되었다.

한빈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대충 내가 맞는 것 같군요. 제가 말한 곳에서 말을 준비해 놓으라 하십시오. 돈은 얼마가 들든 상관없습니다.”

“네, 준비해 놓을게요. 팽 공자님.”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깜짝 놀란 백미랑과 소대섭이 함께 외쳤다.

“팽 공자님!”

“주군!”

급박한 외침에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고 물었다.

“다들 왜 그럽니까?”

“주, 주군. 갑자기 어디를 가십니까?”

“밥 먹을 준비해야지.”

“네?”

“밥 안 먹어?”

“그런데 왜 제게는 돈을 맡기시고, 백 문주께는 그런 부탁을 하셨는지…….”

소대섭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백미랑도 마찬가지로 한빈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모두의 시선이 모인 가운데 한빈이 피식 웃었다.

“소 대주 말이 맞아. 날이 밝으면 헤어질 거니까.”

“그럼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아무 데도 안 갈 건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주군, 방금 제게는 헤어질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까. 내일 아침이 되면 소 대주와 적혈맹호대는 길을 떠나야 하잖아.”

“네, 맞습니다. 주군의 표정을 보면 한시가 급한 것 같으니까요.”

“나는 여기 남아 있을 거야.”

“네?”

소 대섭이 눈을 크게 떴다.

옆에 있던 백미랑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하지만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피워 내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한빈의 속마음은 달랐다.

모든 상황을 계산해 보면 일이 터지기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십 일 정도였다.

적혈맹호대가 급히 간다고 해도 그들이 하북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이십 일 후.

물론 그것도 지친 말을 버리고 새로운 말로 갈아탈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한빈의 구걸십팔보라면 말보다도 빠르다.

문제는 그것을 계속 펼칠 수 있느냐 하는 점이었다.

말보다 열 배는 빨리 달릴 수 있지만, 사천에서 하북까지 쉬지 않고 달릴 수는 없는 일.

먼 거리를 간다는 가정하에, 사람이 말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과 적혈맹호대가 도착할 때쯤이면 모든 일은 끝날 것이 분명했다.

하북팽가와 천리 표국의 전쟁이라?

한빈이 보기에는 분명 서로 간의 오해가 있을 터였다.

그 오해를 막기 위해서는 무공보다는 속도가 중요했다.

둘이 격돌한 후에는 이미 늦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오해가 풀리지 않아서 맞붙게 된다면, 하북팽가가 승리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속도.

경공에서만큼은 나뭇잎을 타고 대해를 건넜다는 달마의 옷자락을 잡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현재 구걸십팔보보다 더 빠른 경공술은 어디에서 배워야 할까?

해답은 하나였다.

그것은 태극검제가 남긴 태극칠성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

한빈의 눈앞에 태극칠성보를 밟는 태극검제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분명 그의 몸에서 진기를 느낄 수 없었다.

내공을 사용해서 태극칠성보를 펼친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태극칠성보를 익히면 사천에서 하북까지 쉬지 않고 달릴 수도 있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한빈이 생각해도 불가능했다.

태극칠음보는 일곱 걸음에 모든 집중력을 쏟는 보법.

내공은 안 쓰더라도 정신력을 소모하게 된다.

그러니 발상을 바꿔야 했다.

태극칠성보가 내공을 쓰는 보법이 아니니, 장점을 구걸십팔보에 응용한다면?

그런 가정의 끝에 도달한 것이 태극칠성보의 극의를 구걸십팔보에 이식한다는 것이었다.

무거운 태극칠성보의 극의를 가벼운 구걸십팔보에 녹인다는 것.

그렇게만 된다면 ‘속(速)’의 구결에 영향을 받지 않고 구걸십팔보를 펼칠 수 있게 될지도 몰랐다.

가능할까?

그 질문은 필요 없었다.

가능하게 만들어야 했다.

태극칠성보의 흔적을 마차에 싣고 왔으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팽대위, 팽혁빈을 비롯한 가문의 사람들과 동행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팽대위와 팽혁빈은 한빈보다 이틀 먼저 사천당가에서 떠났다.

그런 관계로 그들은 지금 하북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 조금도 모를 것이었다.

자신이 돌아갈 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으면 하는 것이 한빈의 바람이었다.

한빈은 고개를 돌려 하북팽가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 표정에는 살짝 근심이 드러나 있었다.

한빈의 표정을 본 모두는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도 한빈의 마음을 조금도 읽을 수 없었다.

설화와 청화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해가 뜨자 모두는 한빈의 앞에 늘어섰다.

한빈의 앞에 선 소대섭과 이무명은 깊숙이 포권하고 있었다.

이무명은 수염을 떼고 붉은 무복을 입고 있었다.

수염을 떼니, 자세히 보지 않으면 한빈과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모두는 그 모습에 익숙했지만, 백미랑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 대체…….”

“비밀입니다.”

한빈이 백미랑을 보며 웃었다.

하지만 백미랑은 웃을 수 없었다.

이처럼 얼굴이 비슷하게 태어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친척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알아본 바에 의하면 둘 사이에는 조금의 혈연관계도 없었다.

어찌 보면 하늘이 내린 인연일지도 몰랐다.

이무명이 한빈으로 변장하고 있다면?

백미랑은 살짝 어깨를 떨었다.

생각지도 못한 한 수였기 때문이다.

백미랑이 입을 벌리고 있는 사이, 적혈맹호대는 떠났다.

이제 한빈을 보좌할 설화와 청화 그리고 백미랑이 남았을 뿐이었다.

물론 광개도 남았다.

왜 남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제 한빈도 떠나야 했다.

적혈맹호대는 지름길을 따라 달리고.

한빈은 마차 안에서 태극칠성보를 연구하며 하북 쪽으로 향해야 했다.

모두가 떠나자 한빈은 조용히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적혈맹호대 대원들은 한빈이 이곳에 남아 있으리라 생각하고 사력을 다해 하북으로 향할 터.

한빈은 그들이 떠난 후 따로 움직이면 되었다.

마차는 백미랑이 몰기로 했다.

그녀는 제법 고삐를 잡아 봤다고 했다.

보기보다는 못 하는 것이 없는 듯한 인물이었다.

마부석의 옆에는 광개가 앉았다.

평소 같으면 마차 안에 같이 있겠다고 바득바득 우길 광개였다.

물론 마차 안으로 들어오려 해도 냄새난다고 한빈에게 쫓겨났겠지만, 광개는 자진해서 마부석에 앉았다.

한빈이 마차 안에서 할 일은 단 하나였다.

그것은 태극칠성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기한은 단 닷새.

그 시간이 지나면 아무리 노력해도 늦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마부석에서 앉은 백미랑이 물었다.

“팽 공자님, 저희는 어디로 갈까요?”

“서안으로 가 주십시오.”

“서안을 지나면 조금 돌아가는 건데요. 괜찮으시겠어요?”

“네, 괜찮습니다. 그곳을 들렀다가 가는 것이 훨씬 빠를 겁니다.”

“대체 그곳에 뭐가 있나요?”

“만금 전장이요.”

한빈이 빙긋 웃자 백미랑은 고개를 갸웃한 채 말고삐를 다시 힘껏 잡았다.

백미랑은 고개를 흔들었다.

더 물어봐도 한빈이 비밀이라고 둘러댈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백미랑은 머릿속으로 현재의 상황을 그려 봤다.

하북팽가와 천리 표국이 붙는다면?

아마도 두 세력의 문제만을 아닐 것이었다.

백미랑은 둘의 싸움이 하북을 황폐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관이 이 문제에 개입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했다.

관무불가침이라는 말에는 무림인들끼리 알아서 지지고 볶으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마차 안에서 태극칠성보의 조각을 펼친 한빈은 뭔가 생각났는지 손가락을 튕겼다.

그 소리에 설화가 재빨리 반응했다.

“공자님, 뭐가 필요하세요?”

“이번에는 설화를 부른 게 아니야. 뭔가 생각난 것이 있어서.”

“뭐가 생각나신 건데요?”

“이 태극칠성보라는 보법……. 지금 생각해 보니 무색칠음보와 비슷한 것 같단 말이야.”

“그러고 보니 이름이 비슷하네요.”

설화가 고개를 끄덕일 때, 앞에서 말고삐를 잡고 있던 백미랑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지금 제 얘기 하신 거예요? 팽 공자님.”

“말은 광개에게 맡기고 이쪽으로 잠깐 오시죠.”

“잠시만요…….”

백미랑은 고삐를 광개에게 맡기고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백미랑은 마차가 달리는 상황에도 마치 허공에 계단이라도 있는 듯 편안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무림의 고수가 날듯이 들어왔다면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백미랑처럼 편안히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그보다 몇 배는 놀라운 경공술이었다.

그녀가 앞에 서자 한빈은 조용히 입술을 뗐다.

“제게 무색칠음보에 대해서 알려 주실 수 있을는지요?”

“알려 드릴 수는 있는데, 이게 구결 같은 걸로 전달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제가 적혈맹호대에게 시킨 훈련이 제가 받았던 수련 방법이었어요. 이렇게 몸으로 체득하는 방법밖에는 몰라요.”

“그럼 진기의 흐름 같은 건 어떻게 제어하십니까?”

“무색칠음보는 내공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흠.”

한빈은 잠시 탄성을 흘렸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태극칠성보의 근본으로 가는 길에는 무색칠음보가 있음이 분명했다.

그때부터 한빈은 백미랑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백미랑은 미칠 것만 같았다.

한빈을 존경하는 마음이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끝없는 질문 덕분에 귀에서 피가 나올 것만 같았다.

무색칠음보는 문주들에게 전해지는 하오문의 비기.

하지만 무색칠음보는 비급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익혀야 하는 무공이었다.

그런데 한빈은 그것을 정리하려고 백미랑을 볶고 있는 중이었다.

오죽하면 밖에서 마차를 모는 광개가 귀를 막고 있을까.

설화와 청화도 고개를 창문 밖으로 삐죽 내밀며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설화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언니, 불쌍하네.”

“우리가 아닌 게 다행이죠.”

그때였다.

한빈의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마차 안에 울렸다.

이건 분명히……. 설화가 재빨리 외쳤다.

“거지 아저씨! 공자님이 마차를 멈추라고 하세요!”

순간 광개가 말고삐를 세차게 당겼다.

위윙.

말이 투레질을 치며 멈췄다.

난데없는 상황에 모두가 놀라 한빈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은 백미랑에게 다시 물었다.

“지금 바람을 느끼면서 달리는 게 무색칠음보의 수련 방법이라고 하셨죠?”

“네, 그런데 그건 특별한 게 아니라…….”

“그거면 됐습니다.”

한빈은 손뼉을 짝 친 후 마차 밖으로 태극칠성보의 흔적을 옮겼다.

* * *

한편 하북팽가의 가주전.

그곳에서는 하북팽가의 원로를 비롯한 당주 등 수뇌부가 모여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이전에 비해 몇 배는 초췌해져 있었다.

하북이 조용한 곳은 아니기는 해도 이런 대규모의 다툼은 없었다.

이 때문에 갑자기 시작된 하북팽가와 천리 표국의 전쟁은 모두를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용담호혈이라 불리는 하북에서 용과 호랑이가 서로의 발톱을 드러내고 싸우게 된 것.

접객당주가 눈을 가늘게 뜨며 팽강위를 바라봤다.

“가주님, 우리도 낭인을 어서 모집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 모든 낭인이 천리 표국 쪽으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더 지체하다가는 병력을 모두 빼앗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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