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412화 (412/621)

412. 용담호혈 (4)

눈빛에서 느껴지는 낭인왕 이세명의 살기.

하북성의 성주 조세현을 비롯한 모두가 의아한 눈으로 이세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세명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하북팽가의 가주 팽강위.

모두는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안 되었다.

이 자리는 무가지회에서 활약한 하북팽가를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런데 왜 하북팽가의 가주인 팽강위를 죽일 듯 쏘아본다는 말인가?

그때였다.

이세명이 움직였다.

쿵. 쿵.

마치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려는 듯, 한 걸음 한 걸음에 내공을 담고 있다.

이세명은 순식간에 팽강위의 앞에 섰다.

이세명은 팽강위가 서 있는 탁자의 반대편에서 눈을 매섭게 뜨고 있었다.

누가 봐도 원수를 바라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팽강위가 물었다.

“자네, 왜 그러나?”

“혹시 오래전에 하남의 영단산을 지난 적이 있나?”

“…….”

팽강위가 고개를 갸웃하자, 이세명이 다시 물었다.

“지난 적이 있나, 없나? 그것만 말해 주게.”

“하남이라면 하남정가가 있는 곳 아닌가? 우리가 그곳을 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자네도 그곳을 자주 지났을 것이 아닌가?”

“…….”

“일을 하다 보면 영단산을 지나치지 않을 수 없을 텐데……. 안 그런가?”

“나는 오래전에 지나쳤지. 그리고 그곳에서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후에는…….”

이세명은 살짝 말끝을 흐리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러고는 깊은 한숨 소리와 함께 나무 조각 하나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탁.

팽강위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 나무 조각을 바라봤다.

나무 조각은 세월의 흔적이 묻어 꼬질꼬질해져 있어, 형태를 알아볼 수 없었다.

“이게 뭔가?”

“잘 살펴보게.”

이세명이 나무 조각을 가리켰다.

팽강위가 나무 조각을 잡고는 조심스럽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순간 팽강위의 눈이 커졌다.

그 모습에 모두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북성주인 조세현도 마찬가지였다.

조세현이 온 것은 자신의 딸과 하북팽가의 사 공자를 연결하려는 것.

조세현은 무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출세였다.

그런 그가 한빈에게 관심을 두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것은 바로 한빈이 황실에서도 탐내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진시에서 장원의 자리에 오른 인재와 한빈 중 누굴 택하겠냐고 하면 조세현은 당연히 후자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탁자를 가운데 두고 서 있는 팽강위와 이세명의 모습은 마치 백척간두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몸을 지탱하고 있는 두 명의 무인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 상대를 툭 치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위태로운 상황.

하북성에서 하북팽가의 가주 팽강위는 호랑이라 불리고, 천리 표국의 국주인 이세명은 용이라 불린다.

조세현은 자칫 잘못하면 자신이 맡은 하북성에서 일생일대의 대사건이 벌어질 것이라 확신했다.

바로 오늘의 일이 시발점이고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저 나무 조각이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없었다.

한참을 바라보던 조세현은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바로 호패였다.

그것도 반 토막이 난 호패.

하도 더럽혀져 있어 알아볼 수가 없었지만, 호패가 분명했다.

호패는 맞는데, 현재 쓰이는 일반적인 호패가 아닌, 십 년도 더 지난 물건이었다.

십 년 전 지금의 황제가 자리에 오르며 호패의 형태가 바뀌었으니, 조세현이 보는 것이 맞았다.

모두는 팽강위와 이세명의 주변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모두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팽강위는 반 토막 난 호패를 다시 탁자 위로 올려놨다.

탁.

그러고는 이세명을 바라봤다.

“이건 분명…….”

“팽가의 도법이지.”

이세명이 말을 받고는 눈썹을 바르르 떨었다.

부정적인 감정이 이세명의 얼굴을 뒤덮는다.

그 모습에 팽강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체 이 호패는 무엇인가?”

“그보다 먼저 말해 주게. 이 호패를 영단산에서 봤는가?”

“…….”

팽강위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고 생각에 잠겼다.

하북팽가와 하남정가와의 교역은 자신이 직접 참여했었다.

오 년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러니 큰 사건이었다면, 자신이 이 호패를 알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하남정가와의 교역 도중 일어난 큰 사건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산적 몇 명 죽이고 일반 백성을 구했던 일은 몇 번 있었다.

그것은 특별한 일일까?

물론 아니었다. 교역 물품을 수송하다 보면 빈번히 발생하는 것이 그런 일이었다.

그때 이세명의 차가운 목소리가 팽강위의 귀에 꽂혔다.

“그 호패의 주인은 바로 잃어버린 내 동생일세. 물론 호패에 얼룩져 있는 건 내 동생의 피겠지.”

“자네의 동생이라고?”

팽강위는 재빨리 반 토막 난 호패를 바라봤다.

호패가 잘린 부분은 분명히 팽가의 도법이 확실했다.

잘린 부분에는 피가 덕지덕지 얼룩져 있었다.

호패의 주인을 벤 것은 팽가의 도법이라는 것에 반반할 수 없었다.

과연 어떻게 된 일일까?

팽강위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겉으로는 경쟁 구도를 그리고 있지만, 실제로는 막역한 사이인 친우의 동생이 팽가의 도법에 목숨을 잃었다니!

이건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그때 이세명의 서늘한 목소리가 실내를 덮었다.

“이제부터 전쟁일세. 팽가와 천리 표국, 아니 낭인 전체의 전쟁일세.”

“잠시만 기다리게, 이건 오해가 분명…….”

“됐네. 친구로서의 관계는 오늘이 마지막.”

말을 마친 이세명은 탁자 위의 술잔을 잡았다.

술을 단숨에 들이켠 이세명이 말을 이었다.

“이별주는 잘 마셨네. 이건 팽가를 향한 내 마음일세.”

이세명이 술잔을 잡은 손에 내공을 불어 넣었다.

바사삭.

순식간에 술잔은 가루가 되어 바닥에 흘러내렸다.

이세명은 바닥에 흩어진 가루를 지그시 밟았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천천히 자리를 떠났다.

냉랭해진 분위기 속에 모두는 눈치를 보기 바빴다.

그것도 잠시, 하북의 무림세가와 중소 문파들이 팽강위에게 몰려들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팽 가주님, 걱정하지 마시죠. 다 오해일 겁니다. 오해는 밝혀지는 것이 강호의 법칙이지요.”

“…….”

하지만 팽강위는 답할 수 없었다.

오랜 친구 사이를 갈라놓는 절묘한 사건.

그것은 우연일 리 없었다.

문제는 이세명이 빈말을 뱉을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부터 낭인을 포함한 천리 표국과 하북팽가가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함은 기정사실.

팽강위는 무고한 자를 죽인 적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세명이 내민 증거 앞에서는 할 말이 없었다.

팽강위는 입술을 굳게 다물며 눈을 빛냈다.

이 싸움에서 이겨야 자신의 무죄를 증명할 수 있었다.

아무리 친구지만, 걸어오는 싸움에 도망갈 수는 없었다.

지금 도망간다면 그것은 순수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꼴이었다.

힘으로 누르고.

그 뒤에 증명한다.

그것이 하북팽가가 강호를 살아가는 법칙이었다.

팽강위의 주변에는 그를 돕겠다는 사람들로 넘쳐 났다.

“저는 하북팽가를 지지합니다.”

“저의 문파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든 불러만 주시면 하북팽가를 돕겠습니다.”

모두가 웅성거리는 가운데, 이제 모두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 돌아왔다.

그때였다.

무사 몇 명이 다급하게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같은 문파나 세가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몇 명의 무사는 각자의 수장을 찾아갔다.

그러고는 각각 서찰을 전했다.

순간 다시 소란이 일기 시작한 연회장.

모두는 누군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누군가는 바로 팽강위였다. 그들이 팽강위를 바라보는 시선은 몇 시진 전 선전포고를 하고 떠난 이세명의 눈빛과 다를 바 없었다.

다만 다른 것은 팽강위에게 경멸의 눈빛을 보내며 뒤돌아섰다는 것이었다.

팽강위는 일이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거기에 시점도 묘했다.

하북팽가의 주요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집법당주 팽대위와 대공자 팽혁빈 그리고 막내가 모두 하북을 떠나 있는 상태였다.

만약 자신이 이세명이라면 주요 전력이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줄까?

그것도 복수에 눈이 멀어 있는 상태인데?

그 질문의 답은 하나였다.

하북팽가의 주요 전력이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은 한 달.

이세명의 공격은 보름이 지나지 않아 시작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팽강위의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묘하게 적이 점점 많아지는 느낌이었다.

팽강위를 돕겠다는 무림세가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그것도 누군가의 서찰을 받고 말이다.

* * *

삼 일 후.

칠음현을 눈앞에 둔 한빈 일행은 여느 때처럼 공터에서 자리를 깔았다.

자리를 깔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토끼 사냥이었다.

적혈맹호대의 대주인 소대섭과 부대주인 심미호를 제외한 모두는 무색칠음보를 배우기 위해 백미랑을 따라나섰다.

잠시 후, 여기저기서 들리는 곡소리.

“으악.”

“어이쿠, 사람 죽네.”

멀리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한빈은 빙긋 웃었다.

수련은 잘되어 가고 있었다.

적혈맹호대는 기척을 숨기고 토끼를 잡고.

백미랑은 그런 적혈맹호대를 기습한다.

이것이 이 수련의 핵심이었다.

백미랑은 일곱 걸음의 묘수를 적혈맹호대에 가르쳤지만, 그것을 바로 펼칠 수는 없었다.

백미랑의 교육법은 간단했다.

그 교육법은 ‘인생은 실전’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었다.

토끼를 잡는 것이 아닌 사람을 잡는다는 것이 좀 달랐지만, 효과는 만점이었다.

한빈이 봐도 어제와 오늘의 속도가 달랐다.

토끼 두 마리를 잡아야 끝나는 것이 훈련의 규칙.

거기에 백미랑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기척을 숨기는 것을 보면…….

백미랑은 타고난 교관이었다.

한빈은 하오문의 사천지부 문주가 아닌, 교관으로서 백미랑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물론 광개도 백미랑을 돕고 있었다.

그때였다.

적혈맹호대의 훈련을 관리하던 백미랑이 한빈에게 다가왔다.

“팽 공자님.”

“무슨 일입니까?”

“얘가 소식을 물고 와서요.”

백미랑은 자신의 어깨 위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조조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앉아 있었다.

백미랑은 조조가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쪽지를 한빈에게 전했다.

한빈은 그 쪽지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곳에는 간략하게 두 문장이 적혀 있었다.

[용호상박(龍虎相搏).]

[천하낭인 소집령(天下浪人召集令).]

난데없는 글자에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실로 묘한 문구였다.

하지만 한빈은 직감적으로 하북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았다.

이것은 하북에서 날아온 편지가 분명했다.

천하낭인 소집령을 발동할 수 있는 것은 낭인왕 이세명.

그리고 용이란 그를 말함이었다.

문제는 용호상박이라는 문구였다.

호랑이라면 하북팽가인데…….

한빈이 눈매를 좁히자 백미랑이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하북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

“그런 것 같군요.”

한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적혈맹호대의 대주 소대섭을 불렀다.

잠시 후, 적혈맹호대 대주 소대섭은 부대주 심미호를 불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소대섭은 재빨리 물었다.

“주군, 무슨 일입니까?”

“너희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

“네, 말씀하시지요.”

“칠음현에 들르면 그곳의 만금 전장을 찾아가거라.”

한빈은 쪽지 한 장을 건넸다.

그 쪽지는 만금 전장에서 돈을 찾을 때 쓰이는 암어와 금액이었다.

그 금액을 본 소대섭의 눈이 커졌다.

“황금 열 냥이라니요?”

“그리 큰돈은 아니니 놀라지 말고.”

“네?”

“그리고 이것을 보여 주고 돈을 찾아 가장 빠른 말을 준비해라. 말이 지치면 말을 바꿔 타고.”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인지…….”

“우리는 최대한 빨리 하북으로 향한다.”

한빈은 손가락으로 북쪽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소대섭은 재빨리 포권했다.

그때 한빈이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설화가 평소 들고 다니던 보따리를 들고 왔다.

한빈은 재빨리 보따리 속에서 지도 한 장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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