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411화 (411/621)

411. 용담호혈 (3)

백미랑이 눈을 크게 뜨자, 한빈이 피식 웃었다.

“큰일을 부탁하려는 건 아니니 안심하시죠.”

“뭐, 제가 가진 정보라면 당연히…….”

“그게 아니라 토끼 잡는 것 좀 도와주시죠.”

“그야 뭐……. 네?”

백미랑은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토끼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우리 적혈맹호대의 대원들에게 토끼 잡는 법을 가르쳐 주시면 됩니다.”

“갑자기 토끼라니요?”

“토끼구이 맛있죠?”

“네, 맛있긴 하죠.”

백미랑이 토끼구이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입꼬리를 올린 한빈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요. 요즘 토끼들은 눈치가 빨라서 잡기가 힘드니 백 문주께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아.”

백미랑은 탄성을 흘렸다.

그녀는 한빈의 말뜻을 겨우 해석할 수 있었다.

백미랑은 재빨리 품속에서 전서 통을 꺼내 조조에게 매달았다.

그러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그 소리에 조조가 백미랑의 손을 떠났다.

달빛 아래 조조가 점이 되어 없어지는 것을 본 백미랑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는 생각보다 철두철미한 사람이 분명했다.

토끼라는 것은 적을 말함이 분명했다.

소리 없이 적들을 감시하라는 것이 한빈이 내린 명령이라 생각했다.

백미랑이 조조를 통해 보낸 전서는 다름이 아닌 하오문에 내린 긴급 명령서였다.

지금부터 하오문은 모든 눈과 귀를 열고 열두 시진 내내 강호의 모든 문파를 감시할 것이었다.

어떤 비용이 발생하든.

어떤 희생이 생기든 말이다.

결의에 가득한 백미랑의 표정을 본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이 백미랑에게 부탁한 것은 진짜 경공술을 말함이었다.

적혈명호대에 구걸십팔보를 가르치고 싶었지만,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구걸십팔보가 생각보다 까다로운 무공이었기 때문이다.

거지들만의 자유로운 생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 구걸십팔보 아니던가?

구걸십팔보를 익히기 위해서는 생각 자체에 한계가 없어야 하는데, 적혈맹호대의 대원들은 이미 다 만들어진 그릇이었다.

사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홍칠개는 개방에 적혈맹호대를 일 년 정도 맡기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었다.

당장 써야 하는 무력대를 개방에 맡긴다?

그것은 한빈이 승낙할 수 없었다.

그런데 구걸십팔보에 비견될 만한 경공술을 본 것이다.

어찌 보면 은밀함에서는 구걸십팔보보다 한 수 위였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쓱 한빈의 옆으로 다가온다.

“주군.”

살짝 고개를 숙인 이는 이무명이었다.

그는 한빈과 외모가 비슷하게 생긴 덕분에 지금 턱수염을 붙인 상태.

그를 본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행렬의 후미에서 경계 임무를 행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자 한빈으로서는 의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 호위 무슨 일이지?”

“다름이 아니라……. 저도 배울 수 있을까요?”

“뭘 배워?”

“하오문의 무색칠음보 말입니다.”

그의 말에 옆에 있던 백미랑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것도 잠시, 백미랑은 표정을 숨기고 말을 이었다.

“무색칠음보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하오문의 문주에게만 전해 내려온다는 전설의 보법 말입니다. 방금 제 옆을 지나가시면서 펼치신 게 무색칠음보 아닙니까? 일곱 걸음 동안에는 어떤 흔적도 어떤 기척도 어떤 향기도 남기지 않는다는 경공술 말입니다.”

“…….”

백미랑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이무명을 바라봤다.

사실 그녀가 놀란 것은 무색칠음보를 알아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색칠음보를 펼쳐 그를 지나갔는데, 자신의 기척을 들킨 것이 더욱 놀라웠던 것.

그녀의 표정을 본 이무명이 말했다.

“무색칠음보의 단위는 말 그대로 일곱 걸음! 그 중간에 기척을 들키지 않기가 더 힘들죠.”

이무명이 웃자 백미랑이 희미하게 웃었다.

“재미있는 분이군요.”

“그런 얘기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팽 공자님과의 관계가…….”

“호위 무사입니다. 하하.”

“형제가 아니고요? 많이 닮았는데요.”

백미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순간 이무명이 당황한 듯 양손을 흔들었다.

“주군과 제가 닮았다니요. 절대 아닙니다. 헉.”

순간 이무명이 당황한 듯 헛숨을 내쉬었다.

손을 흔들다가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줄을 건든 것이다.

줄이 끊어지고.

툭.

이무명이 소중하게 차고 다녔던 가죽 주머니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무명은 가죽 주머니를 잽싸게 주워서 안쪽을 확인했다.

그 모습에 백미랑이 물었다.

“소중한 게 들어 있나 보네요?”

“아, 아닙니다.”

이무명이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자 한빈이 나섰다.

“비밀입니다.”

그 말에 백미랑이 소매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흘렸다.

“호호. 제가 감당 못 할 비밀 같군요. 하오문 속담에 감당 못 할 비밀을 들을 바에는 귀를 후벼 파라는 속담이 있죠.”

“하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무명이 어색하게 웃자 한빈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한빈은 그 가죽 주머니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한빈을 처음 만났을 때는 그것을 목에 걸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것은 반 토막 난 호패였다.

한빈은 앞으로의 임무가 험할 수도 있으니 소중한 것이라면 감싸라며 가죽 주머니를 건넸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다급히 달려왔다.

사사-삭

그 소리에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달려온 것은 다름 아닌 광개였다.

더 이상한 것은 광개의 손에는 대여섯 마리의 토끼가 들려 있다는 점이었다.

식사도 끝났는데 갑자기 토끼라니?

한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손에 든 건 뭐지?”

“허허, 토끼라네. 보고도 모르나?”

“그게 아니라, 식사 시간도 끝났는데 왜 토끼 고기를 들고 있냐는 말이야.”

“여기 소저가 배고프신 것 같아서 급히 다녀왔지.”

“그러니까, 여기 있는 백 문주가 배고플 것 같아서 번개처럼 토끼를 잡아 왔다는 건가?”

“그게 정답일세.”

“그 이유는?”

한빈은 짓궂은 표정으로 광개를 바라봤다.

시선을 받은 광개가 슬쩍 눈을 피한다.

그것도 잠시, 광개가 당당히 외쳤다.

“헐벗고 굶주린 자를 보고 피한다면 그것은 강호의 도리가 아니지!”

말을 마친 광개는 토끼를 쥔 채 가슴을 탕탕 쳤다.

그 모습에 한빈은 피식 웃었다.

누가 봐도 사심 가득한 모습이었다.

개방의 분타주가 하오문의 사천 지역 문주를 좋아한다?

본래 하오문과 개방은 견원지간이라 볼 수 있었다.

누구의 정보가 정확하니.

누구의 정보가 더 빠르니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예상 못 한 전개였다.

과연 둘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한빈의 의문은 눈 깜짝할 사이에 풀렸다.

백미랑은 기분 나쁜 듯 광개를 바라봤다.

“지금 제 복장을 보고 시비 거시는 건가요? 개방의 하남 분타주님!”

누가 봐도 탐탁지 않은 말투였다.

당황한 광개는 손을 내저었다.

“저는 그게 아닙니다. 배고프신 것 같아서…….”

“지금 헐벗었다고 했잖아요.”

백미랑은 당당히 자신의 옷을 가리켰다.

딱 붙는 옷 덕분에 잘록한 그녀의 허리가 유난히 도드라진다.

거기에 어깨를 살짝 드러낸 상의는 바람만 불어도 벗겨질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만월루에서와 마찬가지의 복장.

뭐, 어찌 보면 헐벗은 것은 맞았다.

그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우리와 동행을 하자면 복장은 고쳐야 할 것 같군요. 복장이 눈에 띄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네, 알았어요.”

백미랑이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대화에 적혈맹호대의 대원 중 몇몇은 실망의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 * *

삼 일 후.

하북의 천화루.

하북의 중심가에 우뚝 솟은 천하제일의 주루인 천화루이다.

한 층 한 층 올라갈 때마다 음식값이 두 배로 뛴다는 천화루.

이곳의 구 층에 불이 켜진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일 년에 두어 번은 불이 켜진다지만, 오늘은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이곳에 불이 켜질 때는 하북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자들의 비밀스러운 대화가 오갈 때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모두가 들떠 있는 표정으로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포권하며 모두의 인사를 받기에 바빴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호랑이처럼 딱 벌어진 체격의 중년은 어울리지 않은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그는 다름 아닌 하북팽가의 가주 팽강위.

그가 모두에게 인사를 받는 이유는 간단했다.

십대세가의 대표들 덕분에 하북팽가의 사 공자에 대한 활약이 가려진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중 몇몇 무용담은 벌써 하북까지 날아왔다.

지금 하북팽가의 분위기는 진시에서 장원을 배출한 것 같았다.

그때 무씨검가의 가주가 팽강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 공자가 진짜 진룡소협입니까? 팽 가주님.”

“하하, 그렇다고 합니다.”

“무가지회를 들었다 놨다 한 게 진룡소협이라던데……. 그게 사 공자였다니!”

무씨검가 가주의 표정은 복잡했다.

자신의 딸인 무소율과 파혼했지만, 그 후 한빈과 인연을 맺어 놓았었다.

어찌 보면 아쉽지만, 그 후에 인연을 맺어 놓은 것은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쉬움이 아예 없다고 하면 인간이 아닐 터.

그는 긴 한숨의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팽 가주님, 혹시 말입니다.”

“말해 보시죠, 무 가주님.”

“사 공자의 혼처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무씨검가와 파혼한 뒤로는…….”

팽강위는 말끝을 흐리며 슬쩍 무씨검가 가주의 눈치를 봤다.

팽강위는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자식 농사에 있어서 막내는 버린 패였다.

그런데 그런 막내가 지금은 가문을 빛내고 있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무씨검가와 파혼할 때만 해도 막내가 상대 가문에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정반대였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천천히 팽강위 쪽으로 걸어왔다.

순간 팽강위의 눈이 커졌다.

상대는 다름 아닌 하북성의 새로운 성주 조세현이었다.

무림인의 행사에 성주가 직접 방문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의 등장에 소란스러웠던 연회는 잠시 잠잠해졌다.

성주 조세현은 미안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즐기시지요.”

그의 말에 다시 사담이 이어졌다.

그때 조세현은 슬쩍 팽강위에게 가까이 붙었다.

조세현이 가까이 오자, 팽강위는 재빨리 포권했다.

“성주 대인 오셨습니까?”

“과한 인사를 하지 마십시오. 그러지 않아도 팽 가주를 뵙고 싶었습니다.”

“저를요?”

팽강위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성주는 엄연한 관료.

그가 자신을 보고 싶다고 한 것은 둘 중 하나였다.

하나는 부담을 가질 정도의 부탁을 하거나.

두 번째는 하북팽가를 질책하려는 것.

분명 둘 중 하나의 의도라고 생각했다.

팽강위는 성주 조세현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묘했다.

당당함보다는 조심스러운 듯 머뭇거리는 조세현.

팽강위는 재빨리 물었다.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대인.”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습니다. 팽가의 사 공자는 혼처가 정해졌습니까?”

“혼처라니요?”

“혹시 아직 정해져 있지 않다면 제가 월하노인이 되어 줄 수도…….”

성주 조세현의 말에 주변의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너도나도 꿀을 발견한 벌처럼 팽강위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다.

팽강위는 난데없는 상황에 진땀을 빼야 했다.

하지만 이 상황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게 몇 시진이 흐른 뒤였다.

연회장의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무사 하나가 뛰어왔다.

뛰어온 무사는 낭인왕이자 천리 표국의 국주인 이세명에게 다가갔다.

하북팽가와 천리 표국은 경쟁자이지만, 그 수장인 팽대위와 이세명은 오랜 친구였다.

거기에 더해 이세명은 한빈의 후견인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 무사는 두툼한 서찰을 이세명에게 건넸다.

봉투에서 서찰을 꺼낸 이세명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그는 봉투에서 나무 조각 하나를 꺼냈다.

그 나무 조각을 유심히 살펴보던 이세명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변한 표정에 이어 그는 기세를 피워 냈다.

그것은 살기였다.

그 살기에 모두가 대화를 멈추고 이세명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세명은 모두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딘가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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