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 용담호혈 (2)
자리에서 일어난 위상호는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의 물건을 유심히 보던 그는 붓을 들었다.
쓱쓱.
붓을 놀리던 그는 봉투 두 개에 서찰을 각각 넣었다.
그러고는 각각의 봉투에 글자 하나를 똑같이 적었다.
[살(殺).]
글자를 조용히 바라보던 위상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마치 그림을 그린 후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는 화가처럼 만족한 표정을 짓던 위상호는 손뼉을 쳤다.
짝. 짝.
그 소리에 가주전의 천장에서 검은 그림자가 소리 없이 내려왔다.
검은 그림자는 복면을 한 채 눈만 내놓고 있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마치 명령을 기다리는 사냥개와도 같았다.
그의 이름은 영호(影虎).
그림자 속에서 언제나 상대를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 있는 위상호의 오른팔이었다.
충성심 가득한 영호의 모습에 위상호가 말했다.
“일어나라.”
“네.”
“네게 맡길 중요한 일이 몇 개 있다.”
“언제든 맡겨만 주십시오. ”
복면의 사내는 깊숙이 고개를 숙이자, 위상호가 서찰 두 개를 그에게 건넸다.
“여기 있는 대로 하면 된다.”
“존명.”
서찰을 바라보는 흑의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까지 두 개의 서찰을 같이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흑의인의 모습에 위상호가 말했다.
“실수가 아니다. 딱 하나만 기억하면 된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표적이 있는 곳을 용담호혈로 만들면 된다.”
“용담호혈이라니요?”
영호의 눈빛에서는 의문이 피어났다.
용담호혈의 뜻을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의 눈빛을 본 위상호가 말했다.
“용과 호랑이가 한판 붙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냐?”
말을 마친 위상호는 조용히 어딘가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북쪽이었다.
* * *
그날 해가 길게 꼬리를 드리우며 기울어 가는 사천의 어느 야산.
한빈 일행은 산자락을 지나고 있었다.
태극칠성보의 흑적이 담긴 청강석 조각 때문인지.
수레바퀴는 힘겨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삐걱. 삐걱.
수레를 끄는 말도 힘이 들었는지 콧김을 내뿜는다.
휘이잉.
그 모습에 한빈이 손을 들었다.
“모두 정지. 여기서 자리를 편다.”
한빈의 지시에 적혈맹호대 대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빈은 팔짱을 끼고 주위를 관찰했다.
주변 오백 걸음 이내로는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다.
한빈이 긴장을 풀고 수레에 쌓인 흔적을 확인하려 할 때였다.
광개가 한빈의 옆으로 다가왔다.
“팽 공자,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네.”
“말해 봐.”
“혹시 밥은 안 주는가? 아까부터 밥도 못 먹었다네, 친구.”
“우리 광개 소협은 알 만한 분이 왜 그러실까?”
“그게 무슨 말인가?”
“중간중간에 육포 줬잖아. 그게 점심이었어.”
“흠, 간식이 아니라?”
“그래.”
“아, 그렇군······.”
광개가 미간을 좁히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한 가지만 더 물어보겠네. 중요한 일은 다 끝나지 않았나? 그럼 하북으로 가는 길은 편하게 가도 되지 않나? 그런데 왜 이리도 급하게 돌아가려는 것인가? 친구.”
광개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암제와의 대결.
그리고 무림세가와 사도련의 화해.
무림 공적이 나타났을 때 사도련과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논의.
거기에 사천당가의 복구 작업까지.
급한 일은 모두 끝난 상태였다.
그런데 한빈은 객잔도 지나치고 급하게 하북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광개는 한빈이 급하게 움직이는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다.
광개의 의문 가득한 표정을 본 한빈이 웃었다.
“왠지 뒤통수가 근질근질해서.”
“헉.”
광개가 눈을 크게 떴다.
그것도 잠시,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나는 항상 근질거리는데, 그게 이상한가? 친구.”
“너는 안 감아서 그런거고.”
“그건 팽 공자의 오해라네. 나도 머리를 감았다네.”
“언제 감았는데?”
“한······ 일 년 전?”
“저리 가.”
한빈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옆에 있던 설화와 청화도 코를 막는다.
광개가 머리를 감싸 쥐며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우리 개방도 중에는 내가 제일 청결하다네! 그런데 왜 그렇게 나를 몰아붙이나······.”
“됐고. 일단 토끼나 잡아 와.”
“토끼라니? 그게 무슨······.”
“우리 애들이 네가 해 주는 토끼구이 먹고 싶대. 저기 심 부대주도 그렇고.”
한빈이 고개를 돌려 심미호를 가리켰다.
시선을 받은 심미호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자, 광개가 헛숨을 들이켰다.
“헉. 내가 고기를 구워 줄 수는 있다네. 그런데 잡아 오는 건 다른 사람을 시켜도 되지 않나?”
“지난번에 네가 그랬잖아.”
“내가 뭐라고 했나?”
“토끼구이의 비결은 토끼를 어떻게 잡느냐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내가 언제 그런 헛소리를······.”
“표정을 보니 기억나기는 하나 보네.”
“······.”
광개는 대답 대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억울하긴 했지만, 한빈의 말이 맞기 때문이었다.
한빈에게 토끼구이의 비법을 숨긴답시고 말한 것이 토끼를 잡는 방법이었다.
토끼를 어떻게 잡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건 자신의 입으로 뱉은 말이었다.
지나가는 말을 기억해 뒀다가 이렇게 써먹는 한빈이 얄미울 뿐이었다.
광개는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낙엽 밟는 소리만 남기고 사라졌다.
사사-삭.
그 모습을 보던 한빈은 피식 웃었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어딘가를 바라봤다.
그곳은 다름 아닌 위씨세가가 있는 방향이었다.
한빈은 사천당가를 떠나면서도 꺼림칙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맛있는 육수에 담긴 국수를 면만 먹고 국물을 맛보지 못한 느낌과도 같았다.
뭔가 개운하지 않은 느낌.
한빈은 그 원인이 위씨세가라고 생각했다.
원래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강호의 진리.
전생에 뒤통수를 친 가문에 이번 생이라고 다를까.
잠시 후.
광개는 기다란 나뭇가지에 토끼를 주렁주렁 가지고 나타났다.
광개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구걸십팔보가 강호 최강의 경공술이긴 해도, 해가 거의 넘어간 산자락에서 저리 많은 토끼를 잡아 올 수 있다는 것은 그의 경지가 평범치 않다는 증거였다.
한빈은 슬그머니 적혈맹호대 대원들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심미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주군, 왜 그런 표정으로 보세요?”
“생각해 보니 하북으로 가는 동안 적혈맹호대에게 토끼를 잡는 훈련을 시키면 괜찮을 것 같아서.”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식량도 넉넉한데 왜 토끼를 잡아요?”
“저기 광개를 한번 봐. 갈 때랑 올 때의 분위기가 달라진 거 안 보여? 다 훈련의 성과야. 내일부터는 적혈맹호대 대원들은 식사 시간마다 토끼 두 마리를 잡는 것으로 하지.”
“네?”
“경공술 익히기 싫어?”
“아무리 그래도······.”
“내 덕분에 공구에 진기를 담을 수 있는 경지까지 이르렀잖아.”
“아.”
심미호는 입을 벌렸다.
한빈의 말에는 한 점 거짓이 없었다.
처음에 사천당가 아래로 가는 통로에 대한 공사를 맡았을 때는 사실 아무 생각도 없었다.
한빈이 시키니 그냥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이렇게 기연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돌 한번 잘못 깎으면 통로가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
통로를 지탱하는 부목을 잘못 다듬어도 영영 햇빛을 못 볼 수 있었다.
그런 절박함 속에 얻은 깨달음이 톱과 정에 기를 싣는 방법이었다.
톱과 정에 기를 실을 수 있는데 칼에 실지 못한다?
그것은 말이 안 되었다.
덕분에 적혈맹호대의 무력은 한 단계 상승할 수 있었다.
심미호는 매일 식사 때마다 토끼를 잡아야 한다는 사실이 귀찮기는 했지만, 한빈이 깨달음을 주려고 내리는 수련 방법이라 생각했다.
심미호가 눈을 빛내며 앞으로 어떻게 토끼를 잡아야 하나를 걱정하고 있을 때였다.
옆에서는 토끼구이가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어느덧 식사가 끝나고 남은 토끼구이는 하나.
모두가 입맛을 다시고 있다.
물론 그들은 섣불리 남은 하나의 토끼구이에 손을 뻗지 않았다.
그저 한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음식에는 서열이 있는 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새 한 마리가 모닥불 주변으로 날아왔다.
짹짹.
그 새는 조그만 대롱을 다리에 매고 있었다.
그것은 전서 통이 분명했다.
한빈은 그제야 백미랑이 자신에게 말해 준 것이 기억났다.
백미랑만이 쓰는 연락 방법이라고 했다.
‘조조라 했던가?’
한빈은 재빨리 전서 통을 조조라 불리는 새의 다리에서 떼어 냈다.
전서 통에서 쪽지를 꺼내 읽기 시작한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설화가 물었다.
“왜 그래요? 공자님.”
“조금 묘해서.”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보통 지렁이를 밟으면 어떻게 되지?”
“꿈틀하죠.”
“그런데 지렁이가 죽은 듯 가만히 있네. 그 이유가 뭘까?”
한빈이 어딘가를 보며 물었다.
물론 그 어딘가는 위씨세가가 있는 방향이었다.
암제와 관계가 있다면 위씨세가가 이쯤에서 움직여야 했다.
하나, 하오문이 보내온 정보를 바탕으로 하면 아직까지는 움직임이 없다고 한다.
한빈은 강태공이 되어 보기로 했다.
하지만 강태공처럼 곧은 바늘을 쓸 수는 없는 법.
거기에 맞는 낚싯바늘과 미끼를 만들어야 했다.
그때 설화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음······. 혹시 이 문제 맞히면 상금이 있는 건가요?”
옆에 있던 청화도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상금 있으면 저도 낄래요.”
한빈의 옆에 바싹 붙는 설화와 청화.
한빈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 맞히면 상으로 남은 토끼구이를 주마.”
“정말로요?”
“잠시만요. 생각해 보고요.”
설화와 청화가 입맛을 다셨다.
그때 광개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허허, 내 요리를 가지고 그렇게 상품으로 쓰다니······.”
“에이, 무슨 말을 그리 섭섭하게 하나? 내 손에 들어왔으면 내 요리지.”
한빈이 씩 웃을 때였다.
어디선가 사향이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한빈은 코를 씰룩하며 눈매를 좁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광개와 설화 그리고 청화도 마른침을 삼켰다.
모두가 긴장하고 있을 때였다.
어둠이 깔린 숲속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사락. 사락.
잠시 후, 그 소리의 주인공의 모습이 나타냈다.
발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백미랑.
그녀는 생긋 웃으며 토끼구이를 가리켰다.
“제가 문제를 맞혀도 토끼구이를 주시는 건가요?”
“한번 맞혀 보시죠.”
“지렁이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는 지렁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렁이가 아니라면?”
“음, 머리를 묻고 있는 백년 묵은 구렁이의 꼬리일 수도 있고요. 살짝 삐져나온 용의 수염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
한빈은 아무 말 없이 백미랑을 바라봤다.
한빈은 사실 백미랑에게 놀라고 있었다.
첫 번째는 은신술에 놀랐고.
두 번째는 남의 말을 엿듣는 지청술에 놀랐고.
세 번째는 상황을 바라보는 그녀의 지혜에 놀랐다.
한빈이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자, 백미랑이 다급히 물었다.
“제가 토끼 고기를 먹을 자격이 되나요?”
“먹어도 좋습니다.”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미랑은 아무렇지 않게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토끼구이를 잡았다.
그러고는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녀의 미모와 화려한 복장 때문인지 그 모습은 이상하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토끼구이를 먹는 그녀의 모습은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 없었다.
그때 조조가 그녀의 어깨로 날아가더니 소리를 냈다.
짹. 짹.
마치 토끼구이를 달라는 듯 물끄러미 아래를 바라보는 조조.
백미랑은 아무렇지 않게 토끼구이를 살짝 떼어 내어 조조의 입에 던져 주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계속 따라올 건가요?”
“하북까지는요. 주인, 아니 팽 공자님.”
백미랑이 싱긋 웃자, 한빈이 마주 웃었다.
“그럼 밥값 좀 해야겠습니다.”
“밥값이라니요?”
난데없는 말에 백미랑이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