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409화 (409/621)

409. 용담호혈 (1)

미소를 머금은 한빈이 답했다.

“물론 그것도 아닙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조용히 뒤쪽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당무천은 입맛을 다셨다.

누가 나타날지는 뻔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손녀인 청화와 같이 다니는 설화라는 아이가 나타날 것이 분명했다.

당무천이 무슨 일인지 호기심에 눈을 가늘게 뜨고 있을 때였다.

한빈의 옆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모습에 당무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예상했던 설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검은 그림자의 정체는 무너진 사천당가의 전각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여 준 심미호였다.

심미호가 나타나자 당무천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허허, 인사도 없이 간 줄 알았더니……. 정말 수고했네.”

무인의 손을 잡는 것이 강호의 예의에서 어긋났지만, 당무천은 그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사실 아랫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무방비 상태에서 손을 잡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이런 실수를 한 것은 당무천이 심미호를 비롯한 적혈맹호대 무사들을 무인이 아닌 목수나 석공으로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천당가를 위해 헌신했던 적혈맹호대의 무사들을 당무천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제 일이 끝나자 자취를 감추었다.

품삯이야 하북팽가로 보내면 되지만, 사천당가의 가주로서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눈앞에 나타나니 자신도 모르게 손을 잡은 것이다.

심미호가 생긋 웃으며 답했다.

“아니에요. 다 품삯 받고 하는 일인데요, 뭐.”

“그래도 그대들이 아니었다면 전각들이 무너진 채로 겨울을 날 뻔했네.”

“아니에요, 가주님.”

심미호는 손을 내저으며 쓱 한빈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시.”

“네,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주군.”

심미호는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순간, 뒤쪽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적혈맹호대 대원들.

심미호는 그들에게 다가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그 모습에 당무천은 조용히 한빈을 바라봤다.

당무천은 한빈이 대체 무슨 속셈인지를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마무리 못 한 한빈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진짜 여기를 떠난다는 건가?”

“네, 나중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한빈은 빙긋 웃으며 적혈맹호대 대원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언제 꺼냈는지 사천당가 복구 작업 때 쓰던 징과 망치를 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당무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였다.

적혈맹호대 대원들이 연무장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매의 눈으로 바닥을 살폈다.

한참을 살피던 심미호가 한빈을 바라봤다.

“이 부분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심 부대주. 다치지 않게 조심해서 작업해.”

“네, 걱정하지 마세요.”

심미호가 생긋 웃으며 징을 연무장 바닥에 대었다.

그러고는 망치질을 시작했다.

탕.

순간 갈라지는 청강석.

쩡.

순간 당무천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놀란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태극검제에게 한빈을 부탁받았던 현문도 눈을 크게 떴다.

현문도 당무천과 마찬가지로 한빈이 당분간은 사천당가에 머물 것이라고 생각했다.

태극검제가 남긴 무공은 도저히 포기할 수 있는 선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안심하고 있었는데 한빈은 생각지도 못한 선택을 했다.

태극검제가 남긴 흔적을 통째로 가져가기로 한 것.

현문은 이런 방법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현문이 두 눈을 크게 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동안, 한빈과 적혈맹호대 대원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저기는 조심해서 파내고……. 아니, 아니.”

“저희한테 맡기세요, 주군.”

“그래, 심 부대주만 믿을게.”

한빈은 그 어느 때보다 화사하게 웃었다.

청강석을 바닥에서 분리하는 작업이 끝나자, 적혈맹호대 대원들은 그것을 마차로 옮겼다.

황당함에 입을 벌리고 있던 당무천이 다급하게 한빈을 불렀다.

“팽 공자.”

“네, 어르신.”

“이렇게 가면 어떻게 하나? 조금만 더 머물면 안 되겠나? 지금 가면 우리 청화도 서운해할 텐데…….”

살짝 말끝을 흐리는 당무천.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어르신.”

“그동안 청화는 자네와 설화를 가족처럼 생각했다네. 이렇게 떠나 버리면 사천당가에 남을 청화가 서운해하겠지.”

그때였다.

대화를 듣고 있던 청화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 모습에 당무천이 급히 물었다.

“왜 그러느냐?”

“저 섭섭하지 않아요.”

“허허.”

당무천이 허허롭게 웃었다.

청화가 자신의 친손녀라는 것이 밝혀진 것은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청화도 한빈과 설화를 진짜 가족처럼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데 그 인연을 잊고 가족에게 정을 붙이려는 청화의 모습에 묘한 기분을 느꼈다.

당무천의 입가에 웃음이 사라지기도 전에 청화가 말을 이었다.

“저는 공자님 따라갈 거예요, 할아버지.”

“헉!”

당무천이 비명을 질렀다.

그때 설화도 손을 번쩍 들었다.

“저도요.”

“아.”

당무천이 탄성을 흘렸다.

생각해 보니 비무대회 때문에 설화를 양손녀로 받아들였던 것이 지금에서야 기억난 것이다.

당무천은 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품에서 전낭 두 개를 꺼냈다.

그는 전낭을 설화와 청화에게 건넸다.

“이건 할아비가 주는 거니 넣어 두어라.”

“가, 감사해요.”

설화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돈 때문이 아니었다.

설화에게 전낭 속에 있는 물건은 돈이 아닌 정이었다.

* * *

그날 밤, 위씨세가의 가주전.

떡 벌어진 어깨에 짙은 눈썹의 사내가 아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위상호.

천하 십대세가 중 한 곳인 위씨세가의 가주였다.

그는 지금 사천당가에서 일어났던 일을 보고받고 있었다.

그는 위씨세가의 가주라는 직책 말고 다른 비밀스러운 신분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의 위씨세가를 만든 원동력 중 반은 그 신분 덕분.

그 신분은 바로 암제의 오른팔인 ‘지선’이라는 이름이었다.

지선은 암제의 바로 밑에 있던 팔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제까지 얼굴을 드러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왜 지선이라는 별호로 불렸을까?

그것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그의 심계 때문이다.

암제가 암암리에 활동할 수 있었던 힘은 모두 위상호의 머리에서 나온 계략 덕분이었다.

물론 주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암제에게 받은 것도 있었다.

그것은 막대한 부와 무공 비급.

그것을 바탕으로 천하 십대세가의 반열에 오른 것이 바로 칠 년 전이였다.

턱수염을 쓸어내리는 위상호의 눈빛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그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아들 위지천은 계속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금와 상단의 상단주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솔직히 저도 암제라는 괴인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를 비롯한 누구도 암제라는 인물을 아는 자는 없었습니다.”

“진정 아무도 몰랐더냐?”

위상호가 눈매를 좁히며 묻자 위지천이 그제야 뭔가 기억났는지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러고 보니…….”

“괜찮으니 작은 단서라도 말해 보아라.”

“하북팽가의 사 공자와 아는 사이인 것 같았습니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

위상호는 눈매를 좁혔다.

암제와 자신의 관계는 가족들도 모른다.

사실 위상호에게는 원대한 포부가 있었다.

그것은 군림천하.

위상호는 암제를 재주 부리는 곰으로 만들고 싶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자신이 챙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변수가 생겼다.

그런데 그 변수가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암제의 유산을 가져간 자가 있다면 그것을 빼앗아 오면 되었다.

그것을 뺏는다는 것은 천하를 손에 넣는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지선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암제의 위에 또 다른 절대자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 절대자와의 연결 고리는 암제의 유산이었다.

그것을 차지할 수 있다면 자신이 중원에서 군림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암제의 유산을 찾는 일.

그중에는 무림 칠대기보 중 무려 두 개가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위상호는 자기 아들에게 당시 상황을 상세히 캐묻고 있었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 팽한빈은 언제부터인가 지선 위상호에게도 요주의 인물이었다.

지선의 위치에서 끝없이 관찰했던 후기지수 중 한 명이었다.

자기 일에 훼방을 놓은 자로 추정되는 후기지수.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추측일 뿐이었다.

고작 스무 살밖에 안 되는 후기지수가 어찌 그런 활약을 펼칠 수 있다는 말인가?

지선 위상호가 하북팽가의 사 공자를 보며 인정하는 것은 오로지 경공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암제의 손에서 피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암제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암제의 얼굴을 아는 것은 괴아와 팔선뿐.

그러고 보니 괴아가 관리하는 귀락천의 장원에서도 연락이 끊겼다.

생각을 정리한 위상호가 다시 말을 이었다.

“혹시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특이한 무공을 펼치더냐?”

“그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다만이라니? 어서 말해 보아라.”

“경공이 뛰어났습니다. 암제를 유인해서 같이 동귀어진했습니다.”

“그렇다면 죽었단 말이냐?”

“그러니까…….”

위지천은 자신의 아비에게 나머지 일들을 상세히 털어놓았다.

위씨세가가 사천당가를 떠나오기 직전까지의 상세한 상황을 들은 위상호가 눈매를 좁혔다.

“그렇다면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무공을 잃었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오른팔은 앞으로도 쓸 수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의 상처는 화타가 온다 해도 치료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음.”

위상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도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손짓했다.

“수고했으니 그만 쉬어라.”

“네, 알겠습니다.”

위지천은 재빨리 포권한 후 자리를 빠져나왔다.

사실 위지천이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금선과 위씨세가와의 관계.

그런데 아비 위상호는 그에 대해서는 일절 되묻지 않았다.

그것도 잠시, 위지천은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의 아비 위상호가 하는 일에 실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들 위지천이 나가자 위상호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마치 바둑판을 보고 고민하는 신선처럼 위상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지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아들 위지천이 걱정하는 금선과의 관계는 정리된 지 오래였다.

금선에게 뇌물을 받지 않은 십대세가의 가주가 있을까?

금선은 그만큼 인맥 관리에 뛰어났다.

조금 더 그와 친밀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의심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금선과 관련된 인물에 대한 것은 나머지 십대세가의 가주들이 스스로 덮을 것이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였다.

그것은 암제의 유산을 손에 넣을 방법을 찾는 일이었다.

위상호는 수염을 쓰다듬다가 의자의 팔걸이에서 손을 뗐다.

그러고는 의자 팔걸이의 옆에 있는 조그만 원형 장치를 돌렸다.

원형 장치를 돌리자 그의 뒤에 있던 벽이 열렸다.

스르륵.

벽 속은 서책과 조그마한 상자들로 꽉꽉 차 있었다.

그는 서책 몇 권과 상자 몇 개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서책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 서책에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무림의 비사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암제와 팔선들이 수집한 정보들이었다.

하오문에도 없고.

개방에도 없는 진귀한 기록들이었다.

서책이 어느 한 곳에 멈췄다.

그것은 십 년 전 어느 사건에 관한 기록이었다.

그 기록을 보던 위상호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암제의 유산을 찾을 방법을 알아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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