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 보이지 않는 위협 (5)
묘한 태극검제의 말에 현문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그 선물을 깨닫는 데 칠 년이 걸렸네.”
“칠 년이라니요?”
“저 아이는 얼마나 걸릴는지……. 내가 보기에는 아무리 빨리도 오 년. 아마 당분간은 사천당가를 떠나지 못할 걸세.”
“왜, 팽 공자를 잡아 두시려고 하는 겁니까?”
“아껴서 그런다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 친구에게 전대 태극검제에게 느꼈던 알 수 없는 현기가 느껴지더군.”
“대체…….”
“아까 전대 태극검제와 만났던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
“네, 그러셨죠.”
“그때 나는 전대 태극검제에게 후인을 어떻게 찾아야 하느냐고 물어봤다네.”
“그 대답에 대해서는 저도 궁금합니다, 사형.”
“전대 태극검제가 하시던 말씀이, 보면 알 거라 하더군.”
“그럼 딱 보고 팽 공자가 전대 태극검제가 말씀하신 후인이라는 걸 알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그런데 문제가 생겼지.”
“무슨 문제입니까?”
“겨우 전대 태극검제가 부탁했던 후인을 찾았더니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개구리라는 게 문제지.”
“흠.”
“전대 태극검제는 내게 약속을 했다네.”
“무슨 약속을 했습니까?”
“후인을 찾아 놓으면 다시 오겠다고 말이네. 그게 삼 년 남았다네. 그러니까…….”
태극검제는 한빈에게는 털어놓지 않았던 뒷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내용은 간단했다.
후인을 찾으면 전대 태극검제가 찾아와서 그에게 깨달음을 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야기를 듣던 현문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말씀 드리게 뭐하지만…….”
“말해 보게, 사제.”
“아까 말씀하시기에, 전대 태극검제가 한쪽 팔을 잃었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현문은 말끝을 흐렸다.
세상을 뜬 것이 아니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그것은 사문 전체에 대한 무례였다.
태극검제는 의외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정색하지 않아도 되네, 사제.”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아까 말한 것은 반쯤은 거짓이었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전대 무림삼존도 해결할 수 없는 위협적인 세력이 있는 것은 맞지만, 전대 무림삼존은 팔을 잃지 않으셨다네.”
“정말입니까? 사형.”
“그렇다네.”
“왜 그런 거짓말을 하셨습니까?”
“내가 그렇게 충고해 두지 않으면 그 개구리가 가만히 있겠나?”
태극검제는 한빈이 있는 처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현문은 입을 딱 벌렸다.
놀람, 의문 등 모든 감정을 한곳에 모아 놓은 듯한 표정이었다.
현문은 조용히 태극검제를 바라봤다.
“…….”
“궁금한 게 많은 표정이네, 사제.”
“저는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사제도 많이 변했네그려.”
“…….”
“십 년 전 같으면 분명히 내게 대들었을 텐데. 그래도 성에 안 차면 무당을 뒤집어 놨을 테고. 하하.”
태극검제의 말은 사실이었다.
무당파의 망나니라 불리던 현문이 변한 것은 한빈과의 만남 이후.
허허롭게 웃는 태극검제의 모습에, 현문은 고개를 돌렸다.
사형인 태극검제의 말에 틀린 점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한빈과의 만남 이후 달라진 현문.
태극검제도 그것을 희한하게 여기는 중이었다.
“놀리지 마십시오, 사형.”
“놀리는 게 아니라 칭찬일세. 가능한 한 자네는 사천당가에 남아서 저 친구를 보호해 주게.”
“보호라니요?”
“절대 다쳐서는 안 되네. 무림의 미래가 저 친구한테 달려 있네.”
“후인이라면서 왜 팽 공자를 못 믿으십니까? 사형.”
“감을 잡을 수가 없다는 말일세.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나. 하지만, 하북팽가의 저 친구는 깊이가 측정이 안 되더군.”
“…….”
“나머지는 차차 알 것이니, 나는 이만 가 보겠네.”
태극검제는 희미한 웃음을 보였다.
하지만 현문은 안심이 안 되는지 다시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후배들을 만나 몇 가지 부탁을 해야겠네.”
말을 마친 태극검제는 자리에서 사라졌다.
현문은 지금 상황이 기가 막힐 뿐이었다.
사형인 태극검제가 한빈에게 준 것이 무엇일까?
옆에서 지켜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현문은 수수께끼를 한 아름 안은 표정으로 한빈의 처소로 발길을 돌렸다.
* * *
한빈의 처소 앞 연무장까지 온 현문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이 상념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현문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팽 공자, 왜 그러는가?”
“태극검제께서 재미있는 선물을 주고 가셔서 연구 중입니다.”
“선물이라니?”
현문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묻자 한빈이 바닥을 가리켰다.
“저것을 보시죠.”
“대체 무엇을 보라는…….”
현문이 말끝을 흐렸다.
연무장의 바닥에는 누군가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현묘한 발자국은 분명히 태극칠성보의 흔적이었다.
현문은 그제야 자신의 사형인 태극검제가 남긴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현문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었다.
“그렇다면 오 년 동안 사천당가에…….”
태극검제가 남긴 흔적은 상승 무공의 흔적.
무인이라면 저 흔적을 두고 사천당가를 떠날 리 없었다.
그렇다면, 한빈은 이곳에 남아서 저 흔적을 연구할 것이 분명했다.
사천당가에 한빈의 발을 묶어 놓은 상태에서 태극검제는 가끔씩 들러 한빈을 설득하려 했음이 분명했다.
현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 아니네.”
현문이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어찌 보면 이것은 한빈을 후인으로 삼기 위해서 만든 태극검제의 안배였다.
하지만 본인이 듣는다면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무공을 미끼로 사천에 발을 묶어 둔다는 것은 덫 위에 미끼를 던져 놓는 것과 다름없었다.
다행히 한빈은 바로 고개를 돌리고 팔짱을 꼈다.
사실 한빈은 현문의 말뜻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한빈도 이 선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 깨달음은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이런 족적을 자신에게 선물로 줬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었다.
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태극칠성보의 흔적을 바라봤다.
* * *
며칠 후 사천당가.
사천당가는 활기를 찾아 갔다.
특급 목수 이소운과 적혈맹호대의 활약으로 무너졌던 전각들은 점점 자리를 잡아 갔다.
사천당가의 가주 당무천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며칠 동안 한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현아, 팽 공자는 어디 있느냐?”
“별채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습니다.”
“허허, 대체 무슨 일이라더냐?”
“연무장에 서서 하루 종일 바닥만 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흠.”
“방해가 될까 봐 그곳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가 봐야겠다.”
당무천이 무복을 펄럭이며 앞으로 나아가자, 당광현은 급히 그 뒤를 쫓았다.
한빈이 머무는 별채에 도착한 당무천은 연무장을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연무장의 한가운데에는 한빈이 석상이 된 것처럼 서 있었다.
당무천은 조심스레 한빈에게 다가갔다.
“팽 공자.”
“오셨습니까? 어르신.”
“대체 무슨 일인가? 식음을 전폐하고 고민에 빠져 있다 들었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긴, 딱 봐도 얼굴이 많이 상한 것 같네.”
“아는 분께 선물 꾸러미를 받았습니다.”
“선물 꾸러미라…….”
“그런데, 선물 꾸러미를 풀지를 못하겠습니다. 저게 바로 그 선물 꾸러미입니다.”
한빈은 슬쩍 바닥에 있는 흔적을 가리켰다.
순간 당무천의 눈이 커졌다.
한참 동안 흔적을 바라보던 당무천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내가 실수했군. 본의 아니게 남의 무공을 엿보다니…….”
“괜찮습니다.”
한빈은 손을 흔들었다.
당무천이라고 할지라도 흔적을 통해 무공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루 이틀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이리 고민도 하지 않았다.
이 흔적을 누가 보든 관계없었다.
일곱 개의 발자국은 난제와도 같았다. 누군가 이 발자국을 보고 깨달음은 풀어 주는 이가 있다면 한빈은 대환영이었다.
“허허, 무슨 말인지 이해했네.”
“언제든 오셔서 보셔도 됩니다. 혹시 단서가 있다면 제게 전해 주시죠.”
“알았네.”
당무천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당무천은 지금의 흔적이 무당의 무공임을 단번에 알아봤다.
사실 그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 있었다.
한빈이 이 족적을 통한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사천당가를 떠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은 하북팽가의 사람이 아닌, 사천당가의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기간 동안 손녀와 연결을 시켜도 좋고 아예 데릴사위로 삼아도 좋았다.
그렇게만 된다면 사천당가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릴 것이었다.
당무천이 웅대한 계획을 머릿속에 띄우고 있을 때였다.
한빈이 기지개를 켰다.
“아, 피곤하네요.”
“허허, 쉬엄쉬엄 살펴보게나.”
당무천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한빈이 답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르신 말씀대로 쉬엄쉬엄 살펴보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그러면 잘 익은 백아주가 있는데 한잔 어떤가?”
“그래도 될는지요?”
“허허, 당연하지. 무슨 말을 그리 섭섭하게 하나?”
“그럼 어르신을 따르겠습니다.”
한빈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사천당가의 가주전.
널따란 가주전에 작은 탁자 하나를 놓고 마주 보고 있는 한빈과 당무천.
시답지 않은 이야기가 오가다가 한빈이 눈을 빛냈다.
“어르신.”
“왜 그러는가?”
“부탁 하나만 하겠습니다.”
“어떤 부탁인가?”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제 상태 말입니다.”
“음, 그 상태라면…….”
당무천은 미간을 좁혔다.
한빈이 말한 그의 몸 상태라면 주화입마에 준하는 중상이었다.
다시는 무공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
며칠 전에 목수와 석공을 구하면서 본신 진기를 썼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것은 마지막 힘을 짜낸 것이 분명했다.
한빈의 지금 몸 상태를 떠올린 당무천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무가지회의 영웅인 진룡소협의 상태가 그 지경이라고 소문이라도 나면 과연 어떻게 될까?
당무천과 십대세가의 대표들은 그 소문을 꽉 틀어막고 있었다.
그의 표정을 본 한빈이 말했다.
“제 몸 상태를 널리 퍼뜨려 주십시오.”
“허, 그게 무슨 말인가?”
“이제는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한빈이 욕심 한 점 없는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그 모습에 당무천의 눈이 커졌다.
그것도 잠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의 의도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무가지회의 영웅으로 남는다면 수많은 도전자가 그를 찾을 것이었다.
아마도 그는 연무장에 남겨진 족적을 통해 무공을 찾으려 하는 것이 분명했다.
말하자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폐관수련을 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당무천은 이렇게 이해하고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물론 한빈의 생각은 달랐다.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도 몸을 숨기는 것이었다.
복어처럼 몸을 부풀려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어둠 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미꾸라지 한 마리가 되는 것이 맞았다.
* * *
보름 후.
한빈이 머무는 별채에서는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당무천이 의관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황급하게 별채를 찾은 것.
그 이유는 간단했다.
한빈이 사천당가를 떠나겠다고 통보했기 때문이었다.
당무천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별채의 연무장에 남아 있는 무공을 놔두고 한빈이 길을 떠날 줄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당무천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한빈에게 물었다.
“혹시 저 흔적에서 깨달음을 얻었는가?”
“아직입니다.”
“그럼 포기했단 말인가? 팽 공자.”
“그것도 아닌데요.”
“그럼 왜 이대로 떠난다는 말인가?”
그때 한빈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