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7. 보이지 않는 위협 (4)
갑작스러운 상황에 한빈이 초식을 펼칠 준비를 했다.
한빈이 선택한 것은 당연히…….
구걸십팔보.
사사-삭.
표홀한 움직임과 함께 한빈의 신형이 사라졌다.
십대세가의 고수들도 따라잡을 수 없는 움직임.
한빈의 선택은 당연했다.
태극검제가 갑자기 기세를 피워 내서 놀라기는 했어도 살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대체, 그의 의도는 무엇일까?
혹시 시험?
그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느껴지는 진기의 소용돌이.
진기가 태극의 형태를 나타내며 휘몰아친다.
휘휘휭.
마치 태극검제의 손바닥 안에 회오리를 가두어 놓은 듯 진기가 요동친다.
분명히 태극장의 가장 상위 초식이라는 태선장법이 분명했다.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헛숨을 토해 냈다.
“헉, 이런 제길.”
그때 태극검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자네는 이 보법의 전체를 보더군.”
그 말을 끝으로 점점 밀려드는 태극검제의 진기.
그것은 망망대해와도 같았다.
문제는 태극검제가 자신을 어떻게 따라잡았는지도 모르는 상황.
거기에 더해 무당파 최고의 방법으로 자신을 공격해 오고 있었다.
살기가 있든 없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 수법에 대항하기 위한 초식은 딱 하나.
바로 암제의 목숨 줄을 끊어 버린 역지사지였다.
하지만 한빈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본능.
거대한 공력을 받아칠 수 있다는 역지사지가 아니라면?
한빈은 재빨리 용린검법 중 가장 빨리 현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초식을 떠올렸다.
‘금선탈각.’
순간 한빈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한빈의 상의만 남긴 채.
한빈의 선택은 줄행랑이었다.
그가 있던 공간을 거대한 기운이 헤집고 지나갔다.
파파팍.
허공에 격돌한 태극검제의 공격.
태극검제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그는 태선장법을 거두고 재빨리 허리에 찬 볼품 없는 검을 뽑았다.
스릉.
순간 반대편으로 달아난 한빈도 월아를 뽑았다.
다시 한 발 앞으로 내딛는 태극검제.
이번에는 한빈도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피할 수만은 없는 법.
이게 시험이라면 한빈이 가지고 있는 실력의 칠 할은 보여 줘야 상황이 끝날 것이었다.
사사-삭.
한빈이 미끄러지듯 앞으로 튀어 나갔다.
용린검법 중 ‘일촉즉발’의 수법.
태극검제의 검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온다.
순간 한빈이 월아를 측면으로 그었다.
휙.
순간 태극검제의 입가에서 피어나는 허허로운 미소.
챙!
태극검제의 검과 월아가 허공에서 맞닿았다.
태극검제는 분명 대나무를 그리듯 검을 아래로 그었는데, 한빈은 측면을 막았다.
그런데 두 검이 맞닿았다는 것은…….
태극검제의 한 수에 태극의 묘리가 담겨 있다는 것.
그 묘수를 한빈은 간파해 냈고 말이다.
태극검제의 입가에 미소가 이어진다.
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태극검제의 눈을 바라봤다.
혹시나 이지를 상실한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그의 눈은 허허롭기 그지없었다.
아직은 월아와 태극검제의 검이 맞닿은 상태.
순간 묘한 소리가 둘 사이에 울렸다.
쩌정.
한빈은 슬쩍 월아의 검신을 바라봤다.
그것은 월아가 내는 검명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살짝 금이 가, 임시 조치만 취해 두었던 검신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한빈은 슬쩍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봤다.
자신의 몸속에 잠들어 있는 용린검을 깨울까 해서였다.
하지만 한빈은 고개를 저었다.
용린검까지 보여 주면 칠 할이 아니라 구 할을 보여 주는 것.
아군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속까지 드러낼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때 다시 월아가 검명을 울렸다.
쩌억.
비명이 극에 달하자 한빈이 재빨리 뒤쪽으로 물러났다.
순간 태극검제의 기세가 바람 빠지듯 사라졌다.
다시 숨을 몰아쉬는 태극검제.
“휴우!”
숨을 몰아쉰 태극검제가 한빈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미안하네. 부득이하게 자네를 시험해 봤네.”
그때였다.
월아의 검신이 힘을 다했는지 마지막 비명을 토해 냈다.
쩡.
그 소리와 함께 월아가 반 토막 났다.
사실 월아는 언제 이리 반 토막이 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북으로 돌아가면 정철민 명장에게 맡겨 수리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된 것이다.
한빈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시험치고는 너무 과하셨네요.”
“흠.”
태극검제는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했다.
그때였다.
태극검제의 뒤쪽에서 현문이 나타났다.
소리 없이 태극검제의 옆으로 다가온 현문이 속삭이듯 말했다.
“사형, 시험은 다 끝나셨습니까?”
“끝났다네. 사제의 말대로 현세에 보기 드문 인제네.”
둘의 대화에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일단, 자초지종부터 들려주시는 게 어떠하신지요.”
“자초지종이라…….”
살짝 말끝을 흐리며 하늘을 바라보는 태극검제.
분명 피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는 뭔가를 떠올리듯 달을 보며 상념에 빠졌다.
한빈은 태극검제를 재촉하지 않았다.
차 한 잔 마실 때가 되어서야 태극검제는 한빈을 바라봤다.
서서히 열리는 태극검제의 입술.
“자네는 무림삼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
갑작스러운 질문에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태극검제는 한빈이 대답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전대 무림삼존이네. 십 년 전에 전대 무림삼존 중 하나였던 전대 태극검존이 내게 찾아오셨네.”
순간 한빈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은거했다고 전해지기도 하고 실종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한 전대 태극검제였다.
그런데 그가 현재의 태극검제를 찾아왔다니.
한빈은 슬쩍 현문을 바라봤다.
현문도 그 사실은 몰랐는지 입을 벌리고 있다.
한빈은 표정을 수습하고는 재빨리 물었다.
“혹시 그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전대 태극검제께서는 내게 딱 일곱 걸음을 보여 주셨다네.”
“그게 혹시…….”
“맞네. 그게 자네에게 보여 줬던 일곱 걸음이지.”
“그렇다면 아까 세 걸음밖에 못 봤다고 하신 건…….”
“그 당시에는 세 걸음밖에 못 봤지. 그 걸음의 뜻을 완벽히 이해한 것은 그로부터 칠 년 후였어. 나는 그 보법을 태극칠성보라고 붙였네.”
“그분은 그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나타나신 겁니까?”
“그건 아니라네. 적합한 후인을 찾으라고 했네.”
“적합한 후인이라니요?”
“찾게 되면 그 후인에게 무림을 맡기라고 하셨네.”
“무림을 맡기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흠.”
헛기침한 태극검제는 수염을 쓸어내렸다.
그 모습에 한빈이 손을 내저었다.
“말씀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아닐세. 어차피 자네에게는 다 말해야 할 것 같네.”
“제가 들을 필요가 꼭 있을까요? 후인을 찾아서 그분의 전언을 전달하는 것이 맞죠.”
“그 후인을 찾았네.”
“혹시…….”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왠지 귀찮은 일과 엮이게 될 확률이 점점 올라가는 상황.
한빈의 계산이 끝나기도 전에, 태극검제가 말을 이었다.
“그게 자네일세.”
“저라고요?”
“후인의 첫 번째 조건이 바로 태극칠성보를 완벽하게 보는 자였네.”
“그럼 두 번째 조건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두 번째 조건은 태선장법을 완벽히 피하는 자였네.”
“그럼 세 번째 조건은 태극혜검을 막는 자였겠네요?”
“어찌 그것을 알았나?”
“헉, 그냥 찍은 겁니다.”
“이해했다니 다행이군.”
“제가 무슨 이해를 합니까?”
“전대 태극검제의 후인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게 아니었나?”
태극검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한빈은 이를 악물었다.
전대 태극검제가 무엇을 전하려 했는지 궁금하기는 했다.
하지만 묘하게 짐을 넘겨받는 기분.
한빈의 본능은 틀린 적이 없었다.
암제까지 처치하고 이제는 위씨세가만 경계하면 되는 상황.
이 모든 조건을 듣게 되면 어쩐지 적을 보따리째로 받게 될 것만 같았다.
한빈이 재빨리 말했다.
“저는 일단 빠지겠습니다.”
“전 중원의 안위와 관계된 일인데도 무시할 텐가?”
“그건 저와 관계없습니다. 무림의 평화는 어르신들이 지키셔야죠. 저는 가문, 아니 제 주변인들의 평화도 지키기에 버겁습니다.”
“좋네. 통과네.”
“지, 지금 무슨 말씀입니까?”
“후인은 욕심이 없는 자여야 한다는 조건도 있었네.”
“그런데 이해가 안 가는 점이 있습니다.”
“이해가 안 가는 점이라니? 말해 보게.”
“대체 왜 후인을 찾습니까? 직접 해결하시면 되는 일 아닙니까?”
“전대 태극검제가 날 찾아오셨을 때 그분은 이미 오른쪽 팔을 잃었다네.”
“네?”
“그분은 어떤 세력을 쫓고 있었지.”
“전대 태극검존께서 누군가에게 당해 팔을 잃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그 당시의 전대 태극검존은 지금의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경지를……. 아니 경지를 논할 수 없는 무위를 지니셨지.”
“지금의 어르신보다도요?”
한빈은 질문을 던져 놓고 태극검제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전에 들은 이야기로는 흑룡단의 단주인 암제는 무림 삼존이 같이 덤벼야 제압할 수 있는 무위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말이었다.
현재 태극검존의 무위는 암제보다 더 윗줄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암제의 경지는 예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태극검존의 경지는 도저히 예측이 안 되었다.
그런데 지금의 태극검제보다 더 윗줄이라고?
한빈은 힐끔 고개를 돌려 용린검법을 바라봤다.
현재 깨달음으로 넘어설 수 없는 벽이 바로 태극검제였다.
그런 태극검제가 넘보지 못할 벽이 전대 태극검제라는 말이었다.
그런 태극검제의 팔을 날린 세력이라…….
한빈의 표정을 본 태극검제가 못을 박듯 말했다.
“맞다네.”
“그럼 더더욱 후인은 따로 찾으셔야겠습니다.”
“흠.”
“자네는 강해지고 싶지 않나?”
“강해지고 싶지만, 활활 타오르는 구천지옥에 몸을 내던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럼 자네의 의견을 존중하겠네.”
“진짜입니까? 어르신.”
“그렇다네.”
“혹시 한 가지만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게.”
“그 후인이 되면 혜택 같은 게 있습니까?”
“무당파의 한자리를 주겠네.”
“…….”
“싫은가?”
“싫습니다.”
한빈은 고개를 저었다.
무당파의 한자리를 주겠다라?
누가 들었으면 덥석 물었을 법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 내면을 잘 들여다보면 얘기가 달라졌다.
무당파는 소림과 더불어 구대문파의 양대 산맥.
하지만 무당파 내의 자리를 탐내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사실 장문인 자리를 준다고 해도 거절할 것이었다.
무당을 어디에 내다 팔 수 있다면 장문인 자리를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짓을 했다가는 무림공적이 되기에 딱이었다.
태극검제는 한빈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다시 미소를 짓는다.
“역시 욕심이 없군. 선재로다, 선재야.”
“…….”
한빈은 할 말이 없어 조용히 태극검제를 바라봤다.
태극검제는 허허롭게 웃더니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자리를 빠져나갔다.
한빈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외쳤다.
“일단 계산은 하고 가시죠!”
“계산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제 애병이 수명을 다했습니다. 어찌하실 겁니까?”
한빈이 자신의 월아를 가리켰다.
순간 태극검제의 눈이 커졌다.
생각지도 못했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고는 현문을 바라봤다.
“사제.”
“네, 사형.”
“뒤는 자네에게 맡기겠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태극검제의 신형이 사라졌다.
사락.
당황한 현문이 재빨리 태극검제를 쫓았다.
* * *
현문은 다급히 나와 태극검제를 불렀다.
“사형, 이렇게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가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내 뒷일을 부탁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검을 물어내는 게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뭐가 문제인가?”
“후인을 찾아야 중원을 지킬 수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럼 팽 공자에게 약속을 받아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약속을 받아 낸다는 말인가? 나는 줄 것을 다 줬네. 그러니 나는 전대 태극검제의 부탁을 모두 지킨 셈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