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403화 (403/621)

403. 열 수 앞을 내다보는 한빈 (6)

당광현은 문밖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십대세가의 대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팽대위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저들의 말이 맞았다.

무공도 모르는 성난 백성들과 맞닥뜨린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저들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자들을 상대하다 보면 할 수 없이 살초를 펼쳐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상대가 무공을 모른다면 그것이 살육에 불과하다는 점.

힘없는 백성을 힘으로 누른다면 그것이 어찌 정파라 할 수 있겠는가?

독을 쓰고.

암기를 던져도 사천당가의 뿌리는 정파였다.

팽대위가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십대세가의 대표 중 누군가가 말했다.

“대체 팽 공자가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그것은 팽대위를 향해 던진 말이었다.

분명한 질책.

모두는 팽대위를 보고 웅성대기 시작했다.

물론 한빈과 관계있는 가문의 대표들은 쓴 입맛을 다셨다.

가장 표정이 일그러진 것은 역시 팽대위.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강호의 속담이 딱 들어맞았다.

조금 전의 회의에서도 한빈을 칭찬하기에 바빴던 그들이었다.

그런데 막상 일이 터지자 이렇듯 태도를 바꾼 것이었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폭풍우 같은 기세가 일어났다.

그 기세에 모두가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당무천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모이자 당무천이 천천히 걸어갔다.

터벅터벅.

그는 십대세가의 대표들을 그냥 지나쳤다.

그러고는 경비 무사의 앞에 섰다.

한 걸음 한 걸음에 기세가 느껴지자 경비 무사들은 움찔했다.

멀뚱히 당무천을 바라보는 두 명의 경비 무사.

그들 중 하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가, 가주님을 뵙습니다.”

“예는 됐네. 어서 문을 열게.”

“하지만…….”

경비 무사는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살폈다.

모두가 심각한 분위기를 느끼고 조심하고 있는데, 가주만이 문을 열라고 하니 이상했던 것이다.

그때 당무천이 안광을 번쩍였다.

순간 경비 무사의 눈이 커졌다.

당무천은 사천당가의 절대자를 넘어선 사천 땅의 지배자였다.

그런데 한낱 경비 무사인 자신이 그의 명을 어긴 것이다.

그때 당무천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무서워할 필요는 없네. 빨리 문을 열게.”

“네, 알겠습니다. 가주님.”

경비 무사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빗장을 올렸다.

그러고는 문고리를 잡았다.

다른 경비 무사도 문고리를 잡았다.

드드득.

육중한 문이 열리자, 문 앞에서 농기구를 들고 있는 백성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십대세가의 고수들은 눈매를 좁혔다.

경비 무사의 보고대로 그들의 상태는 심각했다.

입술은 말라 있으며 눈이 시뻘겠다.

그들이 무인이라고 한다면 주화입마에 들었다 오해할 수도 있는 상태였다.

거기에 농기구를 든 그들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당무천도 흠칫했다.

한빈을 믿기에 열라고 했지만, 그들의 표정을 보니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이다.

당무천은 기세를 철저히 감추고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들은 무인이 아닌 일반 백성이었다.

당무천의 기세를 견딜 자가 있을 리 없었다.

당무천은 그들을 힘으로 누를 생각이 없었다.

어찌 된 상황인지를 알고 싶을 뿐이었다.

눈이 시뻘게진 그들 앞에 선 당무천이 말했다.

“나는 사천당가의 가주 당무천이네. 누가 나와서 이 상황을 설명해 보겠나?”

당무천의 목소리에는 내공이 실려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뒤쪽까지 똑똑히 퍼져 나갔다.

그때 그들 중 하나가 나왔다.

그는 농기구 대신 등짐을 지고 있었다.

앞으로 나온 그는 당무천을 바라보며 자신을 소개했다.

“소인은 종운현에 사는 이소운이라고 합니다요.”

“그래, 알겠네. 소개는 됐고. 자초지종을 말해 보게.”

“저희는 모두 사천당가의 은혜를 입고 사는 백성들입니다요. 그러니까…….”

이소운은 자신의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았다.

때아닌 가뭄으로 일거리가 줄어들었다는 것으로 시작해서 그는 이런저런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그러다가 그는 만월루가 있는 저잣거리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가 제 이야기입니다. 여기 모인 이들도 저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요.”

그는 다시 한번 당무천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이 끝나자 당무천의 뒤쪽에 있는 십대세가의 대표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허허, 팽 공자가 그런 일을 벌였다고?”

“믿을 수 없군.”

“아무런 약조도 없이 호의를 베풀다니, 그럴 수가…….”

그들이 웅성거리자 당무천은 손을 들었다.

그 모습에 모두는 입을 닫았다.

순간 당무천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까지 들은 내용으로 본다면 자네들은 은혜를 갚기 위해 이렇게 왔단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요.”

“그럼 왜 눈이 시뻘게져서 있다는 말인가?”

“어르신, 생각해 보십시오. 저희 같은 힘없는 자들에게 호의를 베풀 가문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습니까요? 그나마 사천당가의 도움으로 근근이 버텨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한계라고 생각했습니다요.”

“한계라…….”

“일거리는 떨어지고 식량도 떨어지고……. 이제는 빚을 갚아야 할 날짜도 돌아오고…….”

그는 하소연을 이어 나갔다.

그의 하소연에 나머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마치 들판의 벼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일정했다.

모두가 공감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가 숨이 가쁜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있을 때, 당무천이 물었다.

“그건 알겠으니, 왜 눈이 시뻘게진 것인지나 말해 보게.”

당무천은 다시 한번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의 눈이 시뻘게진 이유와 지금의 이야기는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소운이란 자는 당무천의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야 당연합죠. 저희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울었습니다. 감격해서 울고 무서워서 울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지금 사천당가의 내부는 독 기운이 잔뜩 퍼져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는 소문이 퍼져 있습니다. 그런 곳에서 일하려면 죽을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죠.”

“허허, 그런 소문이 퍼졌단 말인가?”

당무천은 다시 한번 물었다.

물론 당무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당무천의 물음에 이소운이 답했다.

“네, 그렇습니다요.”

동시에 뒤쪽에 있는 자들이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무천은 그 모습에 이소운이란 자가 나머지 사람들에게 제법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무천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도 여기에 왔는가?”

“길거리에서 굶어 죽어도 누구 하나 신경 써 주지 않았던 저희입니다요. 그런데 관음보살의 현신이 저희에게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요. 저희는 그분이 부탁한 대로 사천당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했습니다요.”

말을 마친 이소운을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순간 당무천은 당황했다.

무인도 아닌 이들이 이런 예를 갖추는 것은 처음 보았다.

보통 그들이 과한 예를 취할 때는 납작 엎드리기 마련이었다.

그들이 과한 예를 취할 때는 목숨을 구걸할 때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던데 그들이 지금 행하는 예는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아닌, 목숨을 바치기 위함이었다.

그들에게서 무인의 기개마저 느껴지는 상황.

당무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수많은 감정이 담긴 한숨이었다.

당가가 사천 땅에 뿌리를 내린 지 수백 년.

이토록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적이 있던가.

그 한숨 뒤에 당무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들 일어나게.”

그 목소리는 가을날의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에 이소운은 고개를 바닥에 닿도록 숙였다.

“진룡소협께 감사합니다요. 사천당가에 은혜를 입었습니다요.”

그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등짐에 있던 물건 중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톱이었다.

그는 톱을 높게 들고 외쳤다.

“은혜를 갚자!”

그가 외치자 뒤쪽에서 똑같이 외쳤다.

“사천당가의 은혜를 갚자! 진룡소협의 은혜를 갚자!”

그 외침은 한동안 사천당가의 담장 밖에서 울려 퍼졌다.

그 모습에 당무천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 하늘 위에 하나의 얼굴이 그려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그의 뒤쪽에 있던 팽대위는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빈이 이렇게 일을 벌일 때면 항상 느끼는 감정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절벽을 타고 하강하는 새를 탄 느낌이라는 것이다.

절벽을 타고 아래로 떨어지는 새는 언젠가는 위로 날아오르기 마련.

하지만 아래로 떨어질 때의 기분은…….

팽대위는 생각을 이어 가지 못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꼭 잡았기 때문이었다.

팽대위는 상념을 떨치고 앞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당광현이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고맙네, 팽 대협. 우리 사천당가는 하북팽가의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네.”

“아, 아닙니다, 당 대협. 강호인끼리는 다 돕고 사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팽대위는 실없이 웃었다.

자신은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이런 인사를 받는 것이 어색했던 것.

당광현은 팽대위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후 일꾼들 앞에 섰다.

사정을 알았으니 지금부터는 그들을 관리해야 했다.

그것은 소가주인 그의 책임.

당광현은 일꾼들을 데리고 사천당가의 안으로 들어왔다.

당광현이 일꾼들을 안으로 들이는 모습을 십대세가의 대표들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정문을 지나치는 일꾼들을 보던 팽대위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크게 벌렸다.

일꾼 중에는 눈에 익은 자가 몇몇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분명히 적혈맹호대의 대원들이 끼어 있었다.

팽대위는 머릿속으로 그 상황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고는 눈을 크게 떴다.

대충 어떻게 된 상황인지를 알 것만 같았다.

아무리 은혜를 입었다고 한들 이렇게 빨리 사천당가로 몰려올 수는 없었다.

이것은 한빈이 짜낸 계략이 분명했다.

팽대위가 적혈맹호대 대원을 바라보자, 그중 조호가 살짝 고개를 흔든다.

모른 척해 달라는 신호였다.

조호도 사실은 이런 방법이 먹힐 줄을 상상도 못 했었다.

한빈과 면담을 끝낸 이들은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의견을 나누었다.

모든 것이 주군인 한빈의 예상대로였다.

조호와 적혈맹호대는 그들의 무리에 묻혔다.

그들은 침을 튀겨 가며 의견을 교환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정도의 은혜를 입고 그냥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꺼림칙했다.

그것이 작다면 그냥 넘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지원받은 그들이었다.

은혜라는 끈끈한 끈을 벗어날 수 없었고.

부담감이라는 목줄이 매였다.

그때 조호와 장삼 그리고 몇몇 적혈맹호대 대원들은 바람을 잡았었다.

이런 은혜를 받고도 모른 척하면 인간이 아니라는 자도 있었고.

도움이 필요한 것은 당장이지, 나중이 아니라는 자도 있었다.

몇몇 이들은 흐느끼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감정은 고스란히 한빈에게 은혜를 입은 이들에게 전파되었다.

집단 감정이라는 것은 실로 무서운 것이었다.

조호는 민란이라는 것이 왜 일어나는지 알았다.

적혈맹호대가 붙은 작은 불씨는 단번에 활활 타올랐다.

그 불씨가 바로 그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적신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