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2. 열 수 앞을 내다보는 한빈 (5)
한빈은 진지한 백미랑의 표정에 고개를 갸웃했다.
판돈을 찾아가는데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조금 부담스러웠다.
잠시 진지한 대화가 오갔다.
대화 대부분은 한빈의 부탁이었다.
“……제 부탁은 거기까지입니다.”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백미랑은 한빈을 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의 부탁 중에 무리한 것은 한 가지도 없었다.
그때 한빈이 뭔가 기억난 듯 다시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뭔가요? 저희 힘으로 가능하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팽 공자님.”
“별건 아니고 무림세가 중 하나를 감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무림세가요?”
“네.”
“혹시, 사천당가와 제갈세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질문을 던진 백미랑을 눈을 가늘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백미랑이 말한 하오문의 기반이 된 가문은 그 두 가문이었다.
두 가문을 감시한다면 사라진 전대 문주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하오문도 두 가문을 감시하고 있었지만, 포기한 지 오래되었다.
두 가문과 하오문의 관계는 확실하게 끊겼다.
그것도 백 년 전에 말이다.
한빈이 손을 흔들었다.
“두 가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북팽가를 감시해 주십시오.”
“네?”
백미랑은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자신의 가문을 감시해 달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때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수상한 일이 일어난다면 바로 제게 연락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수상한 일이라면…….”
“하오문의 눈에 수상하게 보인다면 그게 수상한 일이겠지요.”
“네, 명심할게요. 흘러나오는 낙엽 하나까지 감시하겠다고 약속할게요.”
“감사합니다.”
한빈이 고개를 살짝 숙이자 백미랑이 황급하게 일어났다.
순간 그녀의 상의가 살짝 흘러내려 어깨가 드러났다.
백미랑은 황급하게 옷을 고쳐 입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실수했네요.”
말을 해 놓고 백미랑은 한빈의 눈치를 봤다.
그것도 잠시 백미랑은 입을 딱 벌렸다.
한빈은 부처의 현신이 맞았다.
지금 백미랑은 주인으로 생각되는 한빈을 살짝 유혹한 것.
하지만 한빈은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백미랑은 한편으로는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한빈을 향한 존경심은 더욱 높아졌다.
그 후 앞으로 연락을 취할 방법을 상의한 뒤, 한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배웅하겠다는 그녀를 막은 것은 한빈이었다.
워낙 눈에 띄는 외모에.
눈에 띄는 복장을 한 그녀가 같이 나오게 되면 세인들의 주목을 받게 될 것은 뻔했다.
한빈은 장하삼의 호위를 받으며 구 층에서 내려왔다.
구 층으로 올라갈 때는 예연을 따라 올라갔던 한빈이었다.
하지만 내려올 때는 마치 자신이 이곳의 주인인 양 당당하게 앞장서서 내려왔다.
일 층으로 내려온 한빈은 만월루의 밖을 둘러봤다.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는지, 저잣거리는 휑하기만 했다.
밖으로 나가려던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설화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간을 좁힌 한빈이 물었다.
“설화는 어디 있지? 청화야.”
“내기에서 딴 돈 찾으러 간다고 했어요. 그 돈으로 맛있는 거 사 준다고 설화 언니가 약속했어요.”
“허, 대견하구나.”
“그렇죠? 저도 같이 걸었으면 돈을 벌었을 텐데…….”
청화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때 설화가 소리 없이 다가왔다.
“저 왔어요, 공자님.”
“얼마나 땄는지 볼까?”
한빈이 설화의 손에 들려 있는 전낭을 보자 설화는 배시시 웃었다.
“안 보여 줄래요. 이건 비밀이에요.”
설화는 빙긋 웃고는 조그마한 전낭을 흔들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 전낭에는 월(月)이라는 글자가 정갈하게 찍혀 있었다.
아무래도 만월루의 물품인 듯싶었다.
전낭은 제법 묵직해 보였다.
그 모습에 청화는 눈을 반짝였다.
“저도 같이 가요, 언니.”
“그래, 일단 당과부터 사러 가야지.”
“저도…….”
“당연하지.”
그 둘의 대화에 당세령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곧 당세령은 고개를 갸웃했다.
밖으로 나왔는데도 양하삼이라는 호위가 계속 따라붙었기 때문이었다.
당세령이 눈을 가늘게 뜨고 보자, 양하삼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따라왔다.
순간 당세령의 눈에 양하삼이 들고 있는 자루가 보였다.
그곳에도 월(月)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그 모습에 당세령이 물었다.
“혹시 저건 뭔가요? 팽 공자님.”
“만월루에서 준 선물입니다.”
“선물이요?”
당세령이 고개를 갸웃할 때, 마차 한 대가 한빈 일행의 앞에 섰다.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마차에 올랐다.
양하삼은 마차에 두 자루의 주머니를 넣고는 공손히 한빈에게 포권했다.
당세령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때였다.
설화와 청화가 달려와 마차에 사뿐히 올랐다.
스륵.
이제는 구걸십팔보가 몸에 익은 듯 평상시의 걸음까지 달라진 설화였다.
마차에 오른 설화는 재빨리 청화를 잡아끌었다.
청화까지 마차에 타자, 설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저희 두고 가시려고 했던 거예요? 공자님.”
“다행이다. 휴.”
청화도 한숨을 내쉬며 떡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떡을 오물거리던 청화가 슬그머니 한빈의 옆에 있는 자루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설화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언니 것보다 아주 큰데요.”
“괜찮아. 그래도 우리는 천하에서 두 번째 가는 부자잖아, 헤헤.”
설화가 빙긋 웃었다.
당세령은 그들의 대화에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마차의 밖을 바라봤다.
그녀는 과연 일꾼들이 사천당가로 진짜 올까 궁금해하고 있었다.
사실 한빈이 받아 놓은 서약서가 있기에 조금은 안심하고 있지만, 일하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어다가 노역을 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 * *
네 시진 후, 사천당가의 정문.
사천당가의 경비 무사는 눈을 크게 떴다.
멀리서 황토색 먼지구름이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그 먼지구름은 천천히 사천당가 쪽에 가까워졌다.
경비 무사는 먼지구름을 보며 동료에게 물었다.
“저게 대체 뭔가?”
“아무리 봐도 적인 것 같네. 자네는 어서 상황을 알리게.”
“잠시만 기다리게.”
무사는 재빨리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쪽으로 들어간 무사는 안쪽에 있는 줄을 크게 세 번 잡아당겼다.
땡. 땡. 땡.
줄을 답아 당긴 숫자만큼 멀리서 종이 울린다.
지급 잡아당긴 줄은 적이 왔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줄을 잡아당기면 가주전 앞에 연결된 종을 치게 되어 있었다.
물론 그곳에서 줄을 당기면 대문에 있는 종이 울린다.
종을 울리는 것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다.
정문에서 경비 무사가 보내는 신호는 간단했다.
일반적인 손님이 온다면 종을 울리지 않는다.
평소에는 경비 무사 중 하나가 직접 접객당으로 찾아가 보고를 올린다.
종이 울린다는 것은 보통의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번은 불청객.
두 번은 감당할 수 있는 적군.
세 번은 정체불명의 적군에 대비하라는 신호였다.
즉 세 번째는 비상사태임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이렇게 신호를 보내게 되면 즉시 답장이 온다.
경비 무사는 다시 한번 밖의 상황을 살폈다.
지금 천천히 몰려오는 황토색 먼지구름은 누가 봐도 대규모의 병력이었다.
그때였다.
대문의 옆에 있는 종이 울린다.
땡. 땡. 땡.
세 번의 종이 울리자 경비 무사는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적의 출현에 어찌 대비해야 할지 신호가 온 것이다.
세 번의 종이 울렸다는 것은 문을 걸어 잠그라는 뜻이었다.
경비 무사가 한쪽 문고리를 잡자, 그의 동료가 잽싸게 다른 쪽의 문고리를 잡는다.
두 명의 경비 무사는 재빨리 문을 닫았다.
두 두둑.
육중한 대문이 먼지를 흩날리며 움직인다.
쿵.
문이 닫히자 경비 무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 어째 바람 잘 날이 없군.”
“그러게 말일세.”
그들이 잠시 숨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는 수많은 이의 발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투두둑.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
적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경비 무사는 마른침을 삼키며 문에 난 정찰용 구멍을 통해 밖을 바라봤다.
순간 경비 무사는 비명을 질렀다.
“헉.”
“왜 그러나?”
동료 경비 무사가 재빨리 묻자, 구멍에서 눈을 뗀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황당하네. 저건 사천의 백성들이야.”
“그 먼지구름이 사천의 백성들이었다고?”
“자네가 직접 보게.”
경비 무사가 구멍을 가리키자, 다른 경비 무사가 재빨리 밖을 보았다.
구멍을 통해 밖을 보던 경비 무사의 눈이 커졌다.
도저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
“대체 왜 저렇게 화가 나 있다는 말인가?”
“그러게 말일세.”
그때였다.
한 줄기 바람이 그들의 뒤통수에서 느껴졌다.
휘릭.
그 바람에 두 명의 경비 무사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소가주 당광현이 나와 있었다.
당광현의 뒤에는 십대세가의 고수들이 도착해 있었다.
경비 무사의 등에서 소름이 돋았다.
밖의 상황도 이해 못 하겠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규모의 인원이 코앞까지 있다는 것이 두려웠다.
천외천.
그것이 경비 무사가 느낀 단어였다.
경비 무사가 입을 벌리고 있자 당광현이 말했다.
“무슨 일인지 소상히 말해 보아라.”
“가, 가주님! 알겠습니다. 밖에 사천의 백성들이 몰려와 있습니다.”
경비 무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하자, 당광현이 다급하게 물었다.
“사천의 백성들이라……. 그렇다면 정체불명의 적이 그들이란 말이냐?”
“네, 맞습니다.”
“그럼 문을 열어라.”
“아니 됩니다. 저들은 주화입마에라도 걸린 듯 눈이 시뻘게져서는 다들 손에 무기를 들고 와 있습니다.”
경비 무사는 손짓까지 하며 상황을 설명했다.
“무기라고?”
당광현이 물었다.
백성들이 무기를 들고 있다는 말이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이다.
경비 무사 둘은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다른 경비 무사가 입을 열었다.
“정확히는 눈이 시뻘게져서 곡괭이나 쟁기를 들고 있습니다. 숨까지 거칠게 몰아쉬는 것을 보니, 분명히 무슨 일이 일어난 듯싶습니다.”
다른 경비 무사의 보고는 구체적이었다.
그때 뒤쪽에 있던 남궁장천이 훌쩍 담장으로 뛰어올랐다.
그는 담장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고는 다시 돌아와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 경비 무사의 말이 맞습니다.”
“대체 무슨 일로…….”
팽대위가 당황한 듯 말끝을 흐렸다. 그가 당황한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사천의 백성들이 몰려온다면, 그 이유는 딱 한 명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팽대위가 마른침을 삼키자, 당광현이 물었다.
“팽 대협, 뭔가 짚이는 것이라도 있소?”
“모르겠습니다.”
“팽 공자가 저들에게 무슨 수를 썼기에 저리 화나 있단 말이오?”
“저도 그건 모르겠습니다.”
팽대위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개를 흔들던 팽대위가 심호흡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한빈이가 저런 실수를 할 리 없습니다. 문을 열고 만나서 얘기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금 문을 연다라…….”
당광현은 말끝을 흐렸다.
잠시 생각이 잠긴 듯 관자놀이를 짚고 있던 당광현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건 안 될 말이요. 딱 보기에도 흥분한 듯 보이오. 팽 대협도 아시겠지만, 이대로 만나면 저들이 위험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