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 열 수 앞을 내다보는 한빈 (4)
사실 한빈도 난데없는 상황에 살짝 당황하고 있었다.
백미랑이 다가오자 왼쪽 다리에 숨겨 놓은 만월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미랑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가 가져온 상자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이것도 함정인지?
모든 상황을 살피는 중이었다.
그때 한빈의 눈에 탁자 위에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상자가 들어왔다.
그것을 본 한빈은 천천히 탁자를 향해 걸어갔다.
순간 탁자 위 상자는 눈에 띌 정도로 움직였다.
백미랑이 탁자 위의 상자를 오른손으로 눌렀다.
한빈이 탁자 앞으로 가자, 백미랑은 상자를 오른손으로 누른 채 당황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누가 보면 마치 우리가 도박을 하는 것으로 볼 것 같습니다.”
“호호, 도박이라니요.”
“그게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한빈은 백미랑이 오른손으로 누르고 있는 상자를 바라봤다.
백미랑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하오문의…….”
백미랑은 말끝을 흐렸다.
한빈은 외부인이었다.
하오문의 비밀을 알려 줄 수는 없었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혹시 하오문의 귀중한 물건인가요?”
“…….”
“그걸 제게 보여 주시는 이유가?”
한빈이 묻자 백미랑은 상자에서 손을 뗐다. 순간 상자가 한빈을 향해 움직인다.
스르륵.
상자는 마치 뱀처럼 움직였다.
이 장면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백미랑도.
한빈도.
상자가 한빈의 앞까지 왔을 때였다.
획.
한빈이 상자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그 상자를 백미랑에게 다시 전했다.
“여기 있습니다.”
“…….”
백미랑은 말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백미랑이 무릎을 꿇었다.
“주인을 뵙습니다.”
“주인이라고요?”
한빈이 눈을 크게 떴다.
이것이 하오문의 성물이라는 것은 대충 눈치챘다.
전생에 들었던 이야기로는 이쯤 해서 하오문의 성물을 도난당했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주인이라니!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대비하는 한빈이었지만, 지금만큼은 당황스러웠다.
당황하는 한빈의 모습에도 백미랑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한빈이 말했다.
“이게 대체 뭡니까?”
“제가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백미랑이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일단 일어나서 얘기하는 게 어떻습니까?”
“명을 받들겠습니다.”
백미랑은 천천히 일어났다.
“일단 앉으시지요.”
한빈이 자리를 권했다. 완벽하게 주객이 전도된 상황.
힐끔 주변을 바라보니 한빈을 이곳으로 안내한 예연이라는 아이는 아직도 바닥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한빈은 팔짱을 끼고 백미랑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고는 주변을 경계했다.
지금 이 순간도 함정일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었다.
강호란 곳은 그런 곳이니까.
기연인 줄 알고 넙죽 받아먹었다가 탈이 나는 것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었다.
한빈이 팔짱을 끼고 바라보자 백미랑이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말씀드릴 이야기는 하오문의 역사예요. 그러니까…….”
백미랑은 조곤조곤 하오문의 역사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그녀의 설명에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생각지도 못한 비밀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미랑의 말에 의하면 하오문은 무림세가의 방계들이 세운 집단이라고 한다.
자신이 받은 설움을 민초들은 받게 하지 말자는 뜻에서 힘이 약한 사람끼리 모인 것이 하오문.
그들 중 가장 구심점이 된 인물이 사천당가와 제갈세가의 방계였다고 했다.
사천당가의 방계는 가문에서 보물을 홈쳐 나왔고.
제갈세가의 방계는 천기가 담긴 서책을 홈쳐 나왔다고 한다.
이 두 개의 기물을 토대로 하오문이 번성했다고 했다.
제갈세가의 방계와 사천당가의 방계는 서로 번갈아 문주의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제까지 하오문의 문주는 모두 제갈세가의 방계 후손과 사천당가의 방계 후손이 맡아 왔다고 한다.
그것이 깨진 것은 십 년 전에 마지막 문주와 그 후손들이 갑자기 사라지면서라고 한다.
그들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성물은 온전히 전해졌다.
그것이 바로 이 상자와 천기가 담겨 있는 서책이라고 한다.
여기까지 이야기가 진행되자 한빈이 물었다.
“그러니까, 이 상자가 바로 사천당가의 물건이란 말인가요?”
“네, 만월이라고 불리는 물건입니다.”
“만월이라…….”
한빈은 지금은 잠잠해진 다리 쪽을 바라봤다.
자신이 다리에 숨겨 놓은 단검도 만월.
이곳의 이름도 만월루.
그리고 상자의 이름이 만월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상자 안에 든 물건과 한빈이 가지고 있는 만월은 밀접한 관계가 있을 터.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상자를 열어 봐도 될까요?”
“그것은 주인님의 마음입니다. 다만.”
백미랑은 갑자기 말을 끊었다.
“말해 보시죠.”
“다만, 저는 볼 자격이 없으니 혼자 계실 때 확인하시지요.”
백미랑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지만, 하오문의 성물이 주인을 선택했다.
하오문은 새 주인의 뜻이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과연 하오문에 광명이 찾아올까?
그것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다만, 성물의 주인이 하북팽가의 사 공자를 택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고개를 든 백미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벽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백미랑은 벽에서 족자 하나를 떼어 왔다.
그 족자는 이 방에 걸려 있는 족자 중 하나.
그리 눈에 띄는 족자는 아니었다.
누군가의 산수화가 멋들어지게 그려져 있을 뿐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백미랑은 족자를 한빈에게 내밀었다.
“살펴보시지요.”
“이게 뭡니까?”
“아까 말한 제갈세가가 가져온 천기를 옮겨 놓은 서책입니다.”
“서책이라…….”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봐도 서책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족자를 뒤집었다.
그곳에는 빽빽하게 글씨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문장이 들어맞지가 않았다.
이것은 암어였다.
백미랑은 재빨리 족자의 군데군데를 살짝 접었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확인하시지요.”
“네, 고맙습니다.”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족자를 접자 중간중간 이상했던 문장이 이어졌다.
줄과 줄 사이에 다른 문장을 넣어 뜻이 통하지 않게 만든 암어였다.
한빈은 조용히 문장을 읽어 나갔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입을 벌렸다.
그 모습에 백미랑이 물었다.
“주인님도 역시 놀라시는군요.”
“어찌 내 이야기가 이렇게 소상히 적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주인님의 이야기라니요?”
“불의에 대해서는 대나무처럼 곧으며, 난처럼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졌고 국화처럼 고매한 성품을 지녔으며…….”
한빈은 족자 위의 글귀를 읽기 시작했다.
그것도 숨도 안 쉬고 말이다.
한빈은 계속해서 글귀를 읽어 나갔다.
“매화의 향기가 만 리를 뻗어 나가는 것처럼 명성을 떨치리라는 것도 그렇고. 거기에 더해 죽은 자도 살리는 신묘한 의술까지……. 모두가 제 얘기가 아닙니까?”
“…….”
백미랑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갑자기 성물이 주인을 잘못 찾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은 왜일까?
백미랑의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은 말을 이었다.
“역시 제갈세가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백 년도 더 된 예언서에서 나 같은 사람이 태어날 것이 나온다니. 역시 제갈세가는 천기를 읽고 있었습니다.”
“하하.”
백미랑은 넋이 나간 듯 웃었다.
갑자기 세월의 무상함까지 느끼는 그녀였다.
이 성물은 주인을 찾기 위해 백 년을 기다렸다는데, 그 주인의 모습이 아무리 생각해도 상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의 모습은 방금 전에 민초들에게 인정을 베풀던 일과도 거리가 멀었다.
하오문이 천시를 받는다지만, 하오문의 문주는 대대로 성인군자였다.
고매한 인품으로 민초들을 살피는 것이 문주의 책무.
그런데 과연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그 일과 맞을까?
백미랑이 살짝 걱정하고 있을 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저보고 주인이라고 하시는데…….”
“말씀하시지요.”
“하오문을 제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겁니까?”
“…….”
백미랑은 살짝 입을 벌렸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사람이 강호에 몇이나 있을까?
지금 표정으로 보면 하오문을 팔아먹겠다는 의지까지 엿보인다.
고민하던 백미랑이 말을 이었다.
“마, 맞습니다.”
“그럼 먼지 지시를 하나 내리겠습니다.”
“네, 말씀하시지요.”
“주인님이라는 호칭을 쓰지 말고 그냥 팽 공자라고 편하게 불러 주시지요. 나이도 어린 제가 그런 호칭을 듣게 되면 싸가지없다고 욕먹습니다.”
“헉.”
생각지도 못한 말에 백미랑은 입을 딱 벌렸다.
그녀가 놀랄 틈도 없이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문주는 백 소저께서 맡으시죠.”
“네?”
“부탁이 아니라 지시입니다.”
“며, 명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를 도와주십시오.”
“명에 따르겠습니다.”
백미랑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정신은 세찬 풍랑에 흔들리는 돛단배처럼 어지럽기만 했다.
한 치의 고민도 없이 하오문의 문주 자리를 자신에게 양보하다니?
거기에 요구 사항이라고는 자신을 도와달라니?
이제까지의 걱정은 단숨에 날아가 버렸지만,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시입니다. 제가 이 상자의 주인이라는 건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문주가 되고 안 되고는 제 선택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 내 지시에 따라 주시죠.”
“네, 주……. 아니 팽 공자님.”
백미랑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제가 여기에서 얻을 것은 모두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하오문과 아군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성취한 것 같군요.”
“그럼 두 번째는 무엇인가요?”
“그건 비밀입니다.”
한빈이 씩 웃었다. 두 번째 목적은 바로 만월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상자를 얻었으니 만월의 비밀을 푸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
그때 백미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두 번째가 판돈을 찾아가는 게 아니었는지요?”
“그것은 목적이 아닙니다. 당연히 찾아야 할 판돈이 어찌 목적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럼 판돈은…….”
“그건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숨을 쉬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이는 강호에 없겠지요.”
말을 마친 한빈은 엄지와 검지를 말아 동전 모양을 만들었다.
그 모습에 백미랑이 입을 벌렸다,
그것도 잠시, 백미랑은 미소 지었다.
백미랑이 보기에 한빈은 사군자의 덕목을 지닌 사람이었다.
거기에 더해 한빈은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처럼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즉,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말이었다.
돈을 밝히는 척하지만, 저 돈은 분명 민초를 위해 쓸 것이었다.
백미랑은 엎드려 있던 예연에게 눈짓했다.
그 눈짓을 받은 예연이 어디론가 뛰어갔다.
그녀가 다시 나타난 것은 양하삼과 함께였다.
양하삼은 거대한 자루 두 뭉치를 양손에 들고 걸어왔다.
그는 백미랑의 앞에 자루 두 개를 내려놓았다.
자루를 본 백미랑이 고개를 돌렸다.
“한번 확인해 보시지요. 주, 아니 팽 공자님.”
“확인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짐을 내리는 것만 도와주시죠.”
한빈이 씩 웃었다.
백미랑은 다시 한번 확신했다.
돈에 목적이 있었다면 자루에 든 액수를 확인했을 터였다.
하지만 한빈은 확인하지 않았다.
국화의 고매한 기품이 한빈에게 묻어 나왔다.
처음에는 의심으로 가득했던 백미랑은 이제 한빈을 완벽하게 믿고 있었다.
비록 문주 자리를 거절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 한빈은 영원한 주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