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400화 (400/621)

400. 열 수 앞을 내다보는 한빈 (3)

한빈은 그들이 없는 것처럼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그 옆에 있는 설화와 청화는 갑자기 허리를 꼿꼿이 편다. 그러고는 마치 복어가 몸을 부풀리듯 가슴을 편다.

왜 그러는지는 양하삼도 알 수 없었다.

거기에 기죽지 않으려는 듯 눈에 힘을 주는 설화와 청화의 모습은 이상하기까지 했다.

반면, 당세령은 검집에 손을 올린 채 경계하고 있다.

그들의 반응에 양하삼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한빈 일행에 대한 의문이 더욱 커지는 순간이었다.

의문이 커진 것은 당세령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만월루의 기녀들이 보여 준 모습은 사천성의 성주나 와야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이 장면은 만월루가 귀인을 대하는 최고의 예우였다.

당세령은 평범하지 않은 행동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고 배워 왔다.

강호는 눈 뜨고도 코를 베이는 곳이라고도 배웠다.

그 배움이 오늘따라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은 왜일까?

당세령은 다시 한번 검집을 꽉 쥐고 의심의 눈초리로 주변을 살폈다.

하오문이 사천에서 대우를 받고는 있지만, 그들은 정사지간의 문파.

이제까지는 아군이지만, 언제 적으로 돌변할지 몰랐다.

더욱이 지금과 같은 혼란기에는 말이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사뿐한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한빈의 앞에서 살짝 고개를 숙인다.

“소녀 예연, 대협을 뵙습니다.”

“저는 팽한빈이라고 합니다. 대협이라는 칭호는 제게 과분하고 그냥 팽 공자라 불러 주십시오.”

“어찌 소녀가 그럴 수 있겠습니까, 팽 대협.”

그녀의 말에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예연은 다른 기녀들과는 달렸다.

외모는 그들보다 조금 뒤처지는 것은 사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다른 기녀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보통 저런 분위기는 모사꾼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었다.

옆을 보니 양하삼도 예연이 나온 것이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하고 있다.

자신의 역할을 철저히 숨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거기에 하북팽가와 사천당가의 직계를 보고도 기죽지 않는 모습이라니!

한빈은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나저나 우리를 왜 부른 것입니까?”

“저희가 부른 적은 없습니다.”

“그럼 왜 저 호위 무사를 제게 보낸 것입니까?”

“저희에게 볼일이 있으시니 저희가 마중 나가는 것은 당연하지요.”

말을 마친 예연은 은근슬쩍 한빈의 일행을 바라본다.

한빈은 그녀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하하, 알고 있었습니까?”

“뭘 말이신지요?”

예연이 고개를 갸웃하자, 한빈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 배려, 감사드립니다.”

한빈의 말에 예연이 슬쩍 눈을 흘겼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은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눈치가 빠를 줄은 몰랐다.

예연이 한빈을 배려한 것은 맞았다.

그녀는 일부러 내기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한빈이 자신의 배려를 모를 줄 알았다.

그런데 상대는 예연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더욱 놀란 것은 이 내기의 승자가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는 사실을 그의 주변 사람들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설마 하며 비밀을 지켜 준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주변 일행도 모르는 눈치.

보통 사람 같으면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녔을 일을 이렇게 비밀로 한다니!

이 사람에게 비밀이 얼마나 많은 것일까?

예연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한빈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문주를 만나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합니까?”

“일단 이쪽으로 오시죠.”

예연이 슬쩍 앞서 나가자 한빈이 그 뒤를 따랐다.

설화를 비롯한 일행이 한빈의 뒤를 쫓자 예연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슬쩍 뒤를 돌아본다.

한빈을 비롯한 모두는 조용히 예연을 쳐다봤다.

시선을 받은 예연이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머지 분들은 이곳에서 잠깐 기다려 주시겠어요?”

그녀의 말에 일행들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한빈이 재빨리 당세령을 바라봤다.

“일단 여기서 기다리시지요.”

“네, 알겠어요. 팽 공자님.”

당세령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다른 기녀들이 다가와 당세령과 설화 그리고 청화를 안내했다.

* * *

만월루의 구 층.

한빈과 백미랑은 열 걸음 정도 떨어져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미랑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 차 있었다.

반면 한빈은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한빈은 한 가지 감정을 숨기고 있었다.

그것은 반가움이었다.

백미랑은 전생에 전쟁터에서 도움을 주고받았던 동지였다.

한빈이 그녀를 구해 준 적도 있고 그녀의 정보로 한빈이 위기에서 탈출한 적도 있었다.

덕분에 의좋은 남매처럼 전장에서 서로의 등을 맡겼다.

하지만 그녀와 마주하기 전까지는 확신하지 못했었다.

하오문에서 비슷한 이름을 쓰는 자들은 셀 수 없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보던 한빈은 피식 웃었다.

숨겼던 한 줄기 감정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 모습에 백미랑이 물었다.

“왜 웃으시죠?”

“아무것도 아닙니다. 원래 미인을 보면 웃는 버릇이 있어서요.”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말하자, 백미랑이 눈매를 좁혔다.

한빈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단번에 간파한 것이다.

이렇게 열 걸음이나 떨어진 곳에서 멈춰 있다는 것은 자신을 경계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을 앞에 두고 다가오지 않는 사내는 일생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백미랑은 코웃음 쳤다.

“흥, 거짓말이군요.”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빈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묻자 백미랑이 둘 사이의 탁자를 가리켰다.

가리킨 것은 탁자지만,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둘 사이의 거리.

“미인을 보고 경계하는 사내도 있나요?”

“원래 비싼 도자기는 멀리서 감상하는 법이지요. 자칫하면 깨지니까요.”

한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것은 거짓말이었다.

전생의 기억 한편에 백미랑과의 첫 만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그리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었다.

전생에도 자신의 일 장 안으로 들어오면 칼부터 들이대는 백미랑이었다.

다시 유쾌하지 않은 기억을 만들 필요는 없는 법.

한빈의 대답에 백미랑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린다.

“역시 재미있는 분이군요.”

“재미없는 것보다야 낫지 않습니까? 그보다 뜻밖의 환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그 아이들을 말함이 아니지요. 처음 저를 맞이한 자의 경공은 저도 놀랐습니다.”

“…….”

백미랑은 말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한참을 보던 한빈이 말했다.

“어떻게 하오문의 사람이라는 것을 아셨나요?”

“그 정도 경공에 그 정도의 변장술을 가진 인물이 속한 집단이 하오문밖에 더 있겠습니까?”

“저희를 높이 평가하시는군요.”

“사천의 하오문이라면 충분히 그런 평가를 들을 자격이 있죠.”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웃자, 백미랑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오문에 대해서 잘 아시는 것 같군요.”

“강호인이 하오문을 모르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오문은 지금 문주가 없지요. 그래서 사천지부의 하오문주가 그 대행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음.”

백미랑은 침음을 삼켰다.

한빈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오문 전체를 총괄하는 문주는 지금 없었다.

한두 해 전 이야기도 아니고 벌써 십 년이 지난 일이었다.

문제는 외부인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오문 자체가 워낙 음지에 숨어 있는 집단이라서 문주가 사라진 것을 아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정확히는 사라진 하오문의 문주가 누군지도 아는 자가 드물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백미랑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지나가다 주워들은 이야기이니 크게 신경 쓰지 마시지요.”

“지나가다 들은 얘기치고는 너무 상세한데요.”

“하오문도 저에 대해서 지나가다 들은 정보가 많을 텐데요.”

“흠.”

백미랑이 다시 침음을 삼켰다.

왠지 상대에게 발가벗겨진 느낌이 들었다.

백미랑은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 말을 이었다.

“그럼 저희가 함정을 팠다는 것도 진작에 아셨을 텐데, 아시면서 왜 화를 내지 않으세요?”

“덕분에 사천에서 명성을 얻지 않았습니까? 다 죽어 가는 노인도 살리는 성인으로요.”

“아…….”

백미랑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하지만 마음속은 전혀 달랐다.

깊이와 의도가 전혀 파악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백미랑은 마지막 시험을 해 보기로 했다.

백미랑은 품에서 여자 손 두 뼘 길이의 가느다란 상자를 하나 꺼냈다.

그러고는 그 상자를 들고 천천히 걸어갔다.

백미랑이 들고 있는 상자에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백 년 전 하오문주가 남긴 것이었다.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이 상자는 주인을 찾는다고 했다.

언젠가 그 주인이 나타나면 하오문 전체가 용틀임할 날이 오리라는 것이 그 예언의 마지막 구절이었다.

이 상자의 이름은 만월.

왜 만월이라 붙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상자를 열어 본 하오문의 문주는 이제껏 없었으니까.

이 상자는 하오문의 성물과도 같았다.

그런데 백미랑이 이 상자를 꺼낸 이유는 무엇일까.

예언 속 이 상자의 주인은 불의에 대해서는 대나무처럼 곧으며.

난처럼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졌고.

국화처럼 고매한 성품을 지녔으며.

매화의 향기가 만 리를 뻗어 나가는 것처럼 명성을 떨치리라는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죽은 자도 살리는 신묘한 의술까지 겸비한 자라는 것이 예언의 한 부분이었다.

소문을 들어 보면 분명 하북팽가의 사 공자는 난처럼 유연한 사고방식에 의술까지 갖추었다.

하지만 매화의 향기처럼 은은하게 명성이 퍼져 나가지도 않았고.

국화처럼 고매한 성품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불의에 대해 대나무처럼 곧은 성품을 보인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곧은 성품을 가진 자가 죽음에서 벗어난 후 한 일이 고작 내기에 판돈을 건 것이겠는가?

그래서 시험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시험을 아예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다.

노인이 벌떡 일어나서 뛰어가는 광경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한빈을 칭송하지만, 누워 있는 사람의 혈도를 제압해 놓고 단전을 박살 내려는 것이 성인군자가 할 일이던가?

하지만 만월루 아래에서 펼친 한빈의 고상한 행동은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사천당가를 설득해서 백성들의 빚을 탕감해 주다니!

무림세가의 누구도 이런 선행을 벌인 적은 없었다.

하오문이 어떤 집단이던가?

비록 사천에서만은 양지에 나왔다고 하지만, 가장 낮은 대우를 받은 이들로 이루어진 집단이었다.

한빈의 고매한 행동은 백미랑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마지막까지 경계하고.

마지막까지 시험했던 백미랑은 일단 하오문의 성물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어찌 보면 이것은 백미랑의 의무였다.

천천히 탁자로 다가가던 백미랑은 고개를 갸웃했다.

상자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드드득.

드드득.

백미랑은 겨우 표정을 수습했다.

상자가 이렇게 반응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

상자가 주인을 알아보리라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반응한다니!

하지만 백미랑은 표정을 숨기고 천천히 걸어가 탁자 위에 상자를 놓았다.

탁.

아직 한빈은 몇 걸음 떨어져 있는 상태.

백미랑은 일부러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 계속 그러고 계십니까? 이리 오셔야 대화를 나눌 것이 아니에요?”

“성격이 급하시군요.”

한빈은 방 안을 쓱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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