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 열 수 앞을 내다보는 한빈 (2)
당세령은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에 한빈이 작게 웃었다.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그 말을 찾았을 때는 뼈만 남았습니다.”
“헉, 호랑이가…….”
“그게 아니고 굶주렸던 근처 마을 사람들이 잡아먹었습니다. 그때 왕이 어떻게 했을 것 같나요?”
“단칼에 마을 사람들을…….”
“아닙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술을 내렸습니다. 고기에 술이 없으면 적적하지 않냐면서요.”
“뭔가 훈훈한 결말이긴 한데, 믿을 수는 없군요.”
“재미있는 것은 이 년 뒤에 왕이 적들에게 포위되었을 때 일입니다. 겹겹이 쌓인 포위망을 뚫고 미친 듯이 달려오는 병사들이 있습니다. 알고 보니 그들은 바로 왕이 술을 내린 마을 사람들이었습니다.”
“아, 그럼 지금 우리가 저들에게 술을 내린 거란 말씀인가요?”
“뭐, 비슷하지요.”
“보기보다 순진하시네요. 도움을 받은 마을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사천당가로 올까요?”
“그거야 보면 알죠?”
“네? 보면 안다니 그게 무슨 말이죠? 지금 손해 본 금액이 얼마인데…….”
당세령은 울상이 되었다.
실제로 눈가에는 몇 방울 눈물까지 고여 있었다.
그때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말했다.
“제 돈은 아니지 않습니까?”
“악!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당세령은 한빈을 쏘아봤다.
하지만 한빈은 작게 미소를 지을 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당세령은 한빈의 무책임함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제까지는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함을 보이던 사람이 어찌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때였다.
설화가 당세령을 톡톡 쳤다.
당세령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설화를 바라봤다.
설화는 조용히 어딘가를 가리켰다.
설화가 가리키는 곳에는, 채무를 변제받은 마을 사람들의 손도장이 진하게 남아 있는 종이가 있었다.
당세령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걸 왜 가리키니, 설화야?”
“자세히 보세요.”
“뭘 자세히 보라는…….”
당세령은 말을 잇지 못했다.
설화가 그들이 남긴 종이 중 하나를 펼쳤기 때문이다.
순간 당세령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헉,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당세령의 눈은 한없이 떨렸다.
사람 좋은 얼굴로 채무를 없애 준 것이 조금 전이였다.
그러고는 그 증거로 손도장 하나만을 남기라고 했었다.
그런데 손도장을 찍은 종이들은 애초에 반으로 접혀 있었다.
반으로 접어 원래 있던 글자를 못 보게 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온전히 펼치자 하나의 계약서에 손도장을 찍은 것이 되어 버렸다.
문제는 내용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노예 계약서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소정의 임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은 다른 노예 계약서와 달랐다.
하지만 그들에게 일을 고를 자유는 없었다.
죽으라면 죽는시늉, 아니 죽어야 했다.
당세령은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한빈의 표정을 살폈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아직 주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었다.
한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표정으로 그들과 눈빛을 교환하고 있었다.
당세령도 그들의 눈빛을 유심히 살폈다.
그들의 눈빛을 본 당세령은 뜨악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그들은 한빈과 당세령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뜨겁다 못해 주위를 다 태워 버릴 것 같았다.
그들의 시선에는 상상을 초월한 존경심을 담겨 있었다.
그들은 낮은 목소리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역시 천수장의 장주님은 성인군자야.”
“관음보살의 현신이 분명하지.”
“오늘따라 가슴이 먹먹하네.”
“나는 도움을 받은 것이 없지만, 앞으로 저분을 따를 것일세.”
그들은 하나같이 한빈을 찬양했다.
거기에 더해 누군가는 진룡소협이라 외친다.
놀람도 잠시, 당세령은 눈을 가늘게 뜨고 현재 상황을 냉정하게 계산했다.
진룡소협이란 별호가 이곳으로 오면서 두 번이나 울렸다.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선의는 사천당가가 베풀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세인들의 존경은 한빈과 나누어서 받고 있었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선심의 뒤에 있는 계략이었다.
본래의 차용증보다 한 단계 더 악랄해진 문서로 대체하다니!
당세령이 멍하니 한빈을 보고 있을 때였다.
설화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공자님이 너무 선심을 쓰신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이렇게 약해지시면 안 되는데…….”
“선심을 쓰다니, 그게 무슨 말이니?”
당세령이 묻자 설화는 빙긋 웃으며 다시 종이를 접어 원래 위치에 갖다 놓으며 말을 이었다.
“원래 이렇게 베풀기만 하는 분은 아니라서요. 전에 쓴 계약서를 보면 지금보다 빡빡했거든요.”
“헉.”
당세령이 입을 벌렸다.
이게 선심을 쓴 것이라니 말이 되지 않았다.
당세령이 다시 한번 놀라 한빈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한빈이 아직도 남아 있는 자들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사천당가에서의 안전은 나 진룡소협, 아니 천수장의 장주가 보장합니다! 혹시 일거리가 필요하면 언제든 오십시오.”
순간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짝짝.
“진룡소협이 보증한다니, 한번 들러 봐야겠군.”
“그래, 우리의 은인 아니던가.”
“진룡소협뿐 아니라 사천당가도 어찌 보면 우리의 은인 아닌가?”
“집에 가서 안사람과 상의해 봐야겠네.”
“그래도 사천당가는 아직 독 기운 때문에 위험하지 않은가?”
그들은 의견이 분분했다.
그때 누군가가 한빈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진룡소협은 믿을 수 있지 않나?”
“그게 무슨 말인가? 진룡소협을 믿긴 하지만, 그렇게 위험한 곳에서 어떻게 일을 하나?”
“자네는 진룡소협의 의술을 모르나?”
“그건 과장된 소문이라고 하던데…….”
“아니네. 여기에 오면서 내 눈으로 분명히 봤네.”
“뭘 봤다는 말인가?”
“진룡소협이 쓰러진 노인을 벌떡 일으켜 세우는 모습을 말일세.”
“그게 무슨 말인가?”
“숨넘어가던 노인이 진룡소협의 기운을 받더니 적토마처럼 뛰어가더구먼.”
“허허, 그런 일이…….”
그때 누군가가 나서 제법 큰 목소리로 외쳤다.
“나도 그건 봤네!”
그 말에 모두는 한빈에게 뜨거운 눈빛을 보냈다.
그들의 모습을 보던 당세령은 터져 나오려던 비명을 겨우 참았다.
지금 한빈을 칭송한 대원 중에는 분명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이 있었다.
분명 적혈 맹호대의 대원 중 하나였다.
그들 중 하나는 조호였다.
거기에 장삼이라는 나이 많은 대원도 끼어 있었다.
당세령은 이제야 한빈의 의도를 알아챘다.
지금의 분위기는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진심이 말들어 낸 상황이긴 했다.
하지만 그것을 고조시킨 것은 적혈맹호대의 부추김이 더 컸던 것.
지금 분위기만 보면 그들 중 몇몇은 사천당가를 돕기 위해 올 것이 분명했다.
만약에 그들이 자진해서 안 온다면?
무시무시한 계약서가 그들 앞에 놓일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당세령은 마른침을 삼켰다.
잘못하면 칭송은 한빈이 다 받고 욕은 사천당가가 먹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일꾼을 모으는 임무는 어느 정도 진행된 느낌이었다.
당세령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먼 산을 바라봤다.
그곳은 하북팽가가 있는 방향이었다.
과연 한빈은 어떤 교육을 받고 자라 온 것일까?
그녀는 오늘따라 하북팽가가 무섭게 느껴졌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한빈은 그들에게 포권하며 활짝 웃었다.
주변의 분위기와 어우러지자 한빈의 주변에 현기가 맴도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분위기가 포근하다 못해 뜨거워지고 있을 때였다.
한빈을 둘러싼 인파를 뚫고 누군가가 걸어왔다.
저벅저벅.
걸음걸이로 봐서 그는 무인이었다.
제법 큰 키에 근골만 봐도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는 다름 아닌 양하삼이었다.
양하삼은 백미랑의 지시를 받고 한빈에게 온 것.
하지만 한빈이 놀라지 않자, 양하삼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자신은 분명히 이곳에 오며 기척을 숨기지 않았다.
거기에 무인의 기세를 흘렸다.
자신의 기세는 정파의 것과는 다르기에 분명히 경계해야 했다.
하지만 한빈은 기다렸다는 듯이 양하삼을 바라보고 있었다.
“많이 기다렸습니다.”
양하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과 일면식도 없는 하북팽가의 사 공자였다.
그런데 많이 기다렸다니?
양하삼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저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신 건 아니신지요?”
“만월루에서 오신 거 아닙니까?”
“헉, 그걸 어떻게…….”
양하삼은 말끝을 흐리며 조심스레 한빈의 표정을 살폈다.
자신을 알아보는 것도 신기하지만,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의도를 모르기 때문이다.
대화의 주도권을 쥐려는 것일까?
그때 한빈이 위쪽을 가리켰다.
“위에서 계속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을 모를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
양하삼은 한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순간 눈매를 좁혔다.
한빈이 바라보는 곳은 다름 아닌 만월루의 구 층이었다.
만원루의 구 층에는 지금도 백미랑이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형체만 보일 뿐이었다.
여기에서 만월루의 구 층까지는 꽤 멀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시선을 느끼다니?
과장된 소문을 모두 반영한다고 해도 한빈의 무위는 초절정이었다.
하지만 하오문은 한빈을 초절정이라 평가하지 않았다.
과장된 소문을 제거한다면, 한빈의 무위는 절정 정도로 하오문은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절정 정도의 무사가 이 정도의 거리에서 눈길을 느낀다?
아무래도 하북팽가의 사 공자에 관한 하오문의 정보를 수정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안내하시지요.”
양하삼은 다시 뜨끔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이것은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네, 아, 안내하겠습니다.”
양하삼은 앞서가며 힐끔 만월루의 구 층을 쳐다봤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곳에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백미랑의 심중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내기의 승자를 대하는 것치고는 과장되었다.
그렇다면 백미랑의 의도는 무엇일까?
왜 하북팽가 사 공자를 시험한 것일까?
그리고 왜 이토록 유심히 관찰하는 것일까?
호위인 양하삼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한빈의 정체에 대해서도 의문이었다.
하오문이 파악하고 있던 하북팽가 사 공자와는 전혀 달랐으니 말이다.
그의 걸음걸이가 조금 빨라졌다.
저벅저벅.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백미랑을 만나면 해결될 의문이기 때문이다.
* * *
한빈의 일행이 만월루에 들어서자 기녀들이 도열해 있었다.
만월루는 사천제일의 기루.
세인들은 사천의 미녀와 예인들이 모두 모여 있는 곳이라 말하고 있었다.
최고의 미인들이 공손히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인 모습은 장관이었다.
누가 봐도 최고의 예로 한빈 일행을 대하고 있었다.
도열해 있는 기녀들의 외모는 다른 기루의 기녀들과는 약간 달랐다.
그들은 기녀라고는 볼 수 없는, 약간은 도도해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 기녀들이 깍듯하게 허리를 숙이면 사람들은 마치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앞서가던 양하삼은 자신 있는 표정으로 한빈 일행의 표정을 살폈다.
순간 양하산은 살짝 입을 벌렸다.
한빈 일행이 양하삼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