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 열 수 앞을 내다보는 한빈 (1)
그 소리에 설화가 보따리를 잡았다.
“준비할까요? 공자님.”
“그래, 이제 판을 펴야 할 것 같구나.”
“어디에 펼까요?”
설화가 묻자 한빈은 조용히 주변을 둘러봤다.
신중하게 눈을 빛내던 한빈이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은 가끔 공연이 펼쳐지는 무대처럼 보였다.
한참을 바라보던 한빈이 당세령에게 물었다.
“저곳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곳입니까?”
“네, 사천 성주가 만든 무대예요. 누구나 쓸 수 있는 곳이죠.”
당세령의 말에 한빈은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한빈이 향하는 곳은 돌계단이 가지런히 층을 만들고 있었고.
그 아래에 커다란 청강석이 무대를 이루고 있었다.
공연뿐 아니라, 어찌 보면 시간을 보내기에는 가장 좋은 장소였다.
그런데 이곳에 사람이 드문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곳보다 지대가 낮아서 만월루를 지켜보기에는 불리한 지형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사천의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공연은 만월루에 어떤 자가 들어가느냐 하는 점이었다.
그러니 지대가 낮은 공연장에는 사람이 드물 수밖에 없었다.
한빈은 청강석으로 만든 무대 위에 철퍼덕 앉았다.
설화는 그 옆에 앉더니 보따리를 펼쳤다.
역시나 지필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설화는 망설임 없이 먹을 갈기 시작했다.
스윽-스윽.
난데없는 광경에 당세령이 놀라 물었다.
“공자님, 뭐 하세요?”
“비밀입니다.”
“헉.”
“농담이고 이쪽으로 와서 나를 도와주십시오.”
한빈은 당세령을 향해 손짓했다.
당세령은 재빨리 한빈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옆으로 오자, 한빈은 손을 내밀었다.
갑자기 손을 내미는 한빈의 모습에 당세령이 눈을 크게 떴다.
“왜, 왜 그러세요?”
그때 설화가 끼어들었다.
“언니, 그거 말이에요.”
설화는 당세령이 들고 있는 짐을 가리켰다.
당세령이 들고 있는 것은 사천당가에서 사람들에게 빌려준 돈을 정리해 놓은 명부와 차용증이었다.
이것을 어디에 쓸 것인가 하는 점이 당세령이 가장 궁금해하는 점이었다.
그런데 지금 차용증을 내놓으라고 하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보따리를 움켜잡았다.
그 모습에 한빈이 피식 웃었다.
“사천당가에 일꾼이 필요한 것 아니었나요?”
“그, 그건 맞지만, 이걸로 어떻게 일꾼을 구해요? 혹시 위협하려는 건 아니죠? 사람도 이렇게 많이 몰려 있는데 만약에 이 차용증으로 위협해서 일을 시키려는 거라면…….”
“가주님은 내게 이 일을 맡겼습니다. 내가 이 차용증으로 사람들을 구워 먹든 삶아 먹든 그건 걱정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한빈의 말에 당세령은 어쩔 수 없이 명부와 차용증을 건넸다.
한빈은 명부를 쭉 훑어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던 한빈은 재빨리 용린검법의 초식 중 하나를 떠올렸다.
‘허장성세.’
‘반박귀진.’
허장성세에 반박귀진을 씌운다면?
한빈은 그것을 지금 시험해 볼 터였다.
허장성세라는 것은 사람들을 기세로 옥죄는 효과가 있다.
거기에 더해 복어가 몸을 부풀리는 것처럼 한빈의 경지를 착각하게 만든다.
그런데 반박귀진의 경우는 정반대였다.
한빈의 무위를 완벽하게 숨겨 주는 도구였다.
한빈은 두 개의 초식을 바탕으로 외쳤다.
“종호현의 이창현!”
순간 옆에 있던 당세령이 눈을 크게 떴다.
한빈의 목소리에 내공이 담겨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목소리에 머릿속이 멍해질 정도였다.
당세령은 눈을 크게 뜨고 한빈을 바라봤다.
내공도 담겨 있지 않은 목소리에 자신이 이렇게 당황했다는 게 이해가 안 되었다.
하지만 묘하게 소리는 주변으로 울려 퍼졌다.
한빈의 말 한마디에 웅성거리던 저잣거리가 조용해졌다.
저잣거리에서 내기 판의 승자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조용히 서로를 바라봤다.
그 눈빛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는 의문을 담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린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고수가 사자후를 외친 것 같네그려.”
“사자후치고는 너무 조용하지 않나? 이상하게 마음이 안정되는데.”
그들이 느끼는 것은 허장성세가 주는 두려움이 아니었다.
한빈의 목소리는 묘하게 그들의 관심을 한곳에 모으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들 중 하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옆 사람을 바라봤다.
“이창현이면, 자네 아닌가?”
“설마 나를 불렀겠는가?”
“종호현에 사는 이창현이 자네 말고 또 있겠나.”
“설마…….”
이창현이라 불린 중년 사내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흘러나온 곳을 바라봤다.
그때 다시 그의 이름이 들려왔다.
마치 옆에서 부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의 묘한 목소리에, 중년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홀린 듯 천천히 목소리가 나오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이곳에 온 것은 한 가지 이유에서였다.
누군가가 큰 판돈을 땄다고 하기에 구걸이라도 해 볼까 해서였다.
그는 마을에서 목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일거리가 팍 줄어들었다.
이대로 간다면 목구멍에 거미줄이 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신 하나만의 고통이라면 참겠는데,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도 요즘 끼니를 거르고 있었다.
문제는 앞으로도 일거리가 없을 것 같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사천당가에 이자를 낼 날짜가 다가왔다는 점이었다.
당가는 사천 사람들에게는 희망이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경우는 몸서리쳐질 정도로 냉정했다.
그 역시 사천당가에서 목수를 모집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긴 했다.
하지만 그곳에 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사천당가의 담장 안에는 온갖 독물이 득실득실하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돈이 아무리 필요하다지만, 사천당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전까지만 해도 사천을 떠날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
그 많은 판돈을 딴 사람이라면 적선이라 생각하고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 희망도 접었다.
자신과 똑같이 생각하는 자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그는 이제 포기하고 그만 돌아갈까 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본능적으로 걷던 그는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붉은 무복의 사내가 사람 좋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붉은 무복의 사내는 한빈이었다.
한빈은 활짝 웃으며 손짓했다.
“종호현의 이창현입니까?”
“그, 그렇소만. 왜 저를 부르신 거요?”
“사천당가에서 돈을 빌린 적이 있죠?”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하지만 이창현은 눈을 크게 뜨며 그 자리에서 굳었다.
“그건 왜 묻소?”
그 모습에 한빈이 당세령을 바라봤다.
당세령은 차용증 하나를 찾아서 한빈에게 건넸다.
한빈은 차용증을 확인하고는 그것을 상대를 향해 들어 보였다.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차용증에, 이창현이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뒷걸음치던 이창현은 뭔가에 걸린 듯 멈췄다.
탁.
뒤를 돌아본 이창현은 입을 딱 벌렸다.
그곳에는 검은 피부의 여인이 버티고 있었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심 부대주, 왔어?”
“네, 주군.”
말을 마친 심미호는 재빨리 서찰 하나를 건넸다.
이창현과 대화하던 한빈은 그 서찰을 재빨리 살폈다.
그러고는 이창현을 바라봤다.
그를 바라보던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말했다.
“내가 여기 온 것은 빚을 독촉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네?”
이창현이 깜짝 놀라서 묻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돈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사정을 듣고자 함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신지…….”
“지금 일이 없어서 힘드시죠?”
“그러니까…….”
이창현은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대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한빈이 잡고 있던 차용증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고는 그 차용증을 그대로 찢었다.
부욱.
그 모습에 이창현은 눈을 크게 떴다.
“대, 대체 그게 무슨 짓입니까?”
“빚은 없으니 그만 가 보시죠. 요즘 일이 없어서 힘드실 것도 같고……. 아무리 계산이 철저하다는 사천당가지만, 이번만큼은 고통을 나누고 싶군요.”
한빈은 사람 좋은 얼굴로 손짓했다.
그 모습에 이창현은 입을 떡 벌렸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주변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 * *
그곳에 있던 모든 이보다 더 놀란 것은 만월루의 구 층에 있던 백미랑이었다.
백미랑은 난데없는 광경에 혼란스러웠다.
이곳에 사람들이 이리 많이 몰릴 것도 예상 못 했지만,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저곳에서 이상한 판을 벌일 줄을 예상도 못 했다.
빚을 조금 탕감해 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없애 준다니!
그것이 시작이었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는 사천의 사람들을 불러서 하나씩 상담하기 시작했다.
빚을 탕감해 주기도 하고.
빛을 아예 없애 주기도 했다.
어떤 이에게는 돈까지 쥐여 주었다.
대신 증거를 남기려는 듯 그들에게 손도장을 받고 있었다.
그냥 손도장 한 번 받는 것으로 빛을 없애 주자, 내기의 승자에 대한 관심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거기에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내뱉는 사자후는 대체 뭐란 말인가?
백미랑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문제는 다음에 일어났다.
누군가가 하북팽가 사 공자의 정체를 알아본 것이다.
모든 관심은 하북팽가의 사 공자에게 쏠렸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백미랑은 시선을 돌려 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조그마한 함이 있었다.
잠시 조그마한 함을 바라보던 백미랑이 고개를 저었다.
백미랑은 끼니도 거르고 창밖을 바라봤다.
이제 일이 거의 끝났는지 사람들이 흩어지고 있었다.
저잣거리에 모였던 사람들의 머리에는 판돈의 승자 따위는 없었다.
백미랑은 자신의 호위를 불렀다.
양하삼은 백미랑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문주님, 부르셨습니까?”
“양 호위는 지금 내려가서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저쪽을 정리하는 대로 모셔 와.”
“알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시험을 준비하라고 아이들에게 얘기해 주고.”
“알겠습니다, 문주님.”
양하삼은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
* * *
일을 마친 한빈은 손을 탁탁 털었다.
소문을 듣고 급하게 달려온 사람들 덕분에 차용증은 몇 장 남아 있지 않았다.
한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푸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때 당세령과 눈이 마주쳤다.
당세령은 지금 석상이 되어 있었다.
한빈이 그들의 빚을 다 없애 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당세령은 한빈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한빈에게 물었다.
“왜, 그러셨나요? 팽 공자님.”
“제가 뭘요?”
“이건 사천당가의 재산입니다. 그런데 왜 그걸…….”
“일꾼을 구하기 위해서죠.”
“일꾼을 구하는 것과 이게 무슨 상관이죠?”
“옛날 옛적에 어느 왕이 있었습니다. 그 왕이 사냥을 나갔을 때의 일입니다.”
한빈은 그녀가 이해 못 할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갑자기 옛날이야기를 왜 하시는 건가요?”
“뭐, 일단 듣고 물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네, 그럼 계속 말씀해 주세요.”
“그런데 사냥 도중 그 왕의 말이 호랑이를 보고 놀라 도망쳤지 뭡니까.”
당세령이 흥미가 동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호랑이에게 왕이 다쳤나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문제는 말이었지요.”
“말이 문제라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