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 공자님 뭐 하세요? (3)
양하삼이 백미랑의 한 걸음 앞에 멈췄다.
본능적으로 딱 한 걸음 앞에서 멈춘 그가 다급하게 물었다.
“문주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백미랑은 손을 휘휘 저었다.
휘적이는 소맷자락 사이로 백미랑의 매서운 눈빛이 보이자, 호위 양하삼이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문주 백미랑은 허락 없이 자신이 일 장 안에 사람을 들이지 않는다.
오죽하면 삼미랑이라는 별호와 함께 그림의 꽃이라는 의미의 화중화(畵中花)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꽃은 꽃이되,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것이 백미랑이었다.
양하삼은 슬쩍 백미랑의 눈치를 봤다.
본능적으로 멈추긴 했지만, 자신이 일 장이란 절대적인 거리에서 한 걸음 지나쳤음을 그는 알았다.
양하삼은 뒤로 물러나 포권한 채 바싹 머리를 조아렸다.
호통이 떨어져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그는 정중하게 포권했다.
양하삼은 백미랑이 이런 습관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대의명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신했다.
하오문에서 대의명분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만, 사천지부의 백미랑만큼은 대의에 충실했다.
그러니 사파나 정파나 할 것 없이 함께 어울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양하삼이 뒤로 물러나자 백미랑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지시한 일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배치했습니다.”
양하삼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백미랑의 잔잔한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판돈을 건 자가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는 것도 정확한 것이 맞지?”
“네, 그것도 확인해 봤습니다. 판돈을 건 자는 분명히 사 공자가 맞습니다.”
양하삼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있지만, 양하삼은 백미랑이 지시한 일의 진의를 알 수 없었다.
백미랑은 묘하게 이번 일만큼은 대의명분에서 벗어나는 지시를 내렸다.
이것은 이제까지 백미랑이 벌여 온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다.
내기의 승자가 백정이건 승려이건 하오문에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백미랑은 그것은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는 것을 안 후부터 태도가 달라졌다.
백미랑은 하북팽가 사 공자가 이곳까지 오는 동안 몇 가지 시련을 줄 것을 지시했다.
묘한 것은, 그 시련이란 게 정파의 인물이 거부하기 힘든 것이었다는 점.
하지만 그 시련을 모두 받아들인다면 하북팽가의 사 공자는 이곳에 자정까지 도착하지 못할 터였다.
만약 시련을 거부한다면?
아마도 정파인 하북팽가의 명성에 보기 좋게 금이 갈 것이었다.
정파라면 이도 저도 못할 상황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때 다시 백미랑이 말했다.
“작전은 정확히 하달한 것 맞지? 양 호위?”
“네, 맞습니다. 하북팽가 사 공자의 약점에 대해서도 모두 전달했습니다. 그 아이들은 이쪽 방면에 전문가들이니, 잘 해낼 겁니다. 문주님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무슨 걱정을……. 지난번에 청성의 고수들도 홀딱 벗겨 먹었잖아. 호호.”
백미랑은 슬쩍 입맛을 다셨다.
양하삼은 그녀의 표정을 슬쩍 훔쳐봤다.
그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당황한 자신의 표정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백미랑은 다른 뜻을 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약간은 천박한 듯한 말투.
거기에 슬쩍 올라간 입꼬리.
모든 것이 함정에 빠진 상대를 상상하며 즐거워하는 것 같지만, 백미랑의 눈빛만은 촉촉했다.
마치 연인을 기다리는 여인의 눈동자라고나 할까?
과연 어떻게 된 것일까?
물어볼 수는 없는 일.
그저 주인인 백미랑의 행동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호위 양하삼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백미랑의 안색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창밖에서 참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짹짹.
그 소리에 백미랑이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창문 아래에는 참새 한 마리가 비에 젖은 채 백미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미랑이 손을 내밀자 참새가 쪼르르 그녀의 손등에 날아와 앉았다.
참새는 백미랑의 손에 조그마한 쌀 한 톨을 뱉어 낸다.
툭.
백미랑을 그 쌀을 확인하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쌀알에는 단 한 글자가 각인되어있었다.
[출(出).]
이것은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사천당가의 담장을 넘어섰다는 이야기였다.
백미랑은 품에서 조그마한 함을 꺼냈다.
새끼손가락 한 마디만 한 조그마한 함은 얼핏 보기에는 화장 도구가 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백미랑은 그 함을 열더니 조그마한 실을 꺼냈다.
그 실은 백미랑의 손끝에서 꿈틀거린다.
그것은 실이 아닌 가느다란 지렁이였다.
백미랑은 실지렁이를 참새의 입에 가져갔다.
참새가 그것을 재빨리 받아먹었다.
그 모습에 백미랑이 말했다.
“그만 돌아가거라, 조조야.”
짹짹.
참새가 백미랑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를 내더니 푸드덕댔다.
그러고는 재빨리 백미랑의 손등에서 날아올랐다.
그 장면을 보던 양하삼은 마른침을 삼켰다.
가장 궁금한 것이 바로 저 새의 정체였다.
양하삼이 보기에 저 새는 보통 참새가 아니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리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저 참새는 백미랑이 가라는 곳을 정확히 찾아갔다.
물론 참새가 가 본 곳 혹은 알고 있는 사람에 한해서 말이다.
저 먹이 역시 보통 실지렁이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저 먹이를 먹을 때면 참새가 묘하게 활기를 찾는 것 같았다.
사람으로 치면 마치 영약을 먹은 것과 비슷했다.
양하삼이 호기심을 피워 올리고 있을 때였다.
백미랑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양 호위도 그만 나가 보지.”
“알겠습니다, 문주님.”
양하삼은 예를 갖춘 뒤 재빨리 방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전각의 복도에 있는 창밖을 바라봤다.
곧 그는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입을 딱 벌렸다.
그도 그럴 것이, 당연히 사람들이 몰릴 것이라고는 생각했다.
판돈을 건 사람만 해도 이백은 족히 넘으니 말이다.
하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광경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이건 과장이 아니라 진짜 그렇게 보였다.
객잔과 다루가 모여 있는 저잣거리에는 사천의 모든 사람이 모여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 기녀 하나가 양하삼의 표정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양 호위님 아니세요?”
“허, 예연이구나. 판돈을 건 자라고 해 봤자 고작 삼백에 불과한데 저건 사천의 백성들이 다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더냐?”
“에이, 문주님 바로 옆에 계시면서 저걸 모르세요?”
“너는 알고 있다는 말 같구나.”
“그럼요. 우리 애들도 지금 난리가 아니에요.”
“난리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백 년 이래 최고의 판돈을 딴 자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소문이 쫙 퍼졌어요. 우리 애들도 그자한테 잘 보여서 한몫 단단히 잡으려고 모두 준비하고 있는 걸요.”
“하하, 그렇게 된 거였구나. 그런데 너는 왜 준비를 안 하느냐?”
“제가 기루 경력이 몇 해인데요?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않아요. 차라리 기녀보다는 저기 거리에 있는 거지처럼 동냥 그릇을 들고 있는 것이 확률이 높걸요. 헤헤.”
예연이라는 기녀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그 모습에 양하삼도 따라 웃었다.
가끔 기녀 중에는 속세를 떠난 듯 세상을 여유 있게 보는 자들도 있었다.
사실, 이것은 조금 과장이고 이곳 만월루에는 특이한 아이들이 많았다.
몸을 팔지 않고 예를 파는 기녀.
몸과 예, 둘 다 팔지 않는 기녀.
예연처럼 득도한 듯 보이는 기녀까지, 그 부류가 다양했다.
사실 예연도 다른 기루에 간다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미모였다.
그러나, 이곳 만월루에서만큼은 평범했다.
그때였다.
밖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한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점점 몰려드는 인파.
양하삼은 이것이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맞이할 시련 중 하나임을 깨달았다.
저곳을 가로질러 만월루로 들어온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 행위.
누가 돈을 타 갔다는 것을 아는 순간 하북팽가 사 공자의 주머니는 밑 빠진 항아리가 될 것이었다.
* * *
같은 시각.
앞서 휘적휘적 걷는 한빈을 본 설화가 다급하게 물었다.
“공자님, 만월루로 가시는 길은 알고 계시는 거예요?”
“설마 내가 모르고 앞장서겠냐? 당연히 알지.”
“앗, 언제 다 조사하신 거예요?”
“내가 항상 말했지? 준비는 철저히.”
“네, 준비는 철저히, 그리고 후퇴는 재빨리 하라고 항상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설화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갸웃하자, 한빈이 재빨리 물었다.
“왜 그러느냐?”
“저기 사람이 쓰러져 있는데요.”
설화가 관도 가운데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그의 옆에는 수레가 하나 멈춰 있었다.
딱 보기에도 쓰러진 자는 머리가 희끗한 것이 제법 나이가 들어 보였다.
거기에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봐서 의식을 잃은 것이 분명했다.
사람들은 그 수레를 보고 그저 지나칠 뿐 도움을 줄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매정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천당가에 대한 소문이 일파만파 퍼진 직후라 사천 사람들의 경계심이 극도로 높아진 상태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설화가 옆을 보더니 작게 속삭였다.
“우리라도 도와야 할 것 같아, 청화야.”
“그래요, 언니.”
설화와 청화가 그에게 달려가려 할 때였다.
그 모습에 당세령이 재빨리 나섰다.
“우리는 다른 길로 피해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설화야, 청화야.”
그녀는 턱짓으로 다른 길을 가리켰다.
청화와 설화가 고개를 갸웃한다.
돌발 상황에 한빈은 그녀가 가리키는 길을 힐끔 바라보다가 기감을 최대한으로 높였다.
순간 한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러더니 뭔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갑작스러운 모습에 당세령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팽 공자님, 왜 그러세요?”
“그냥 저쪽으로 가죠.”
한빈이 사람이 쓰러진 곳을 가리키자 당세령이 재빨리 답했다.
“저쪽은 아무래도 불길해서요. 관도 위에 수레가 멈춰 있는 것도 그렇고 주변에 사람들이 없는 것도 그렇고. 누가 봐도 함정 같잖아요.”
당세령은 멀리 있는 수레를 다시 한번 가리켰다.
사실 다른 때 같으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서 무슨 일인지 파악하고 도움의 손길을 줬을 것이었다.
그것이 정파인 사천당가가 사천을 관리하던 방법이었으니 말이다.
말하자면 당근과 채찍을 모두 사천당가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암제와의 혈투를 경험하고 나자 당세령은 당가가 지배하고 있다는 사천 땅조차 안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위 말하는 의심병이었다.
그때 한빈은 먼저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당세령과 나머지 사람도 할 수 없이 한빈을 쫓았다.
휘적휘적 걷던 한빈은 길 한가운데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앞에 멈췄다.
하지만 바로 그에게 다가가지는 않았다.
희끗희끗한 머리와, 피부에는 주름이 잡혀 있고, 손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육십 가까이 되어 보이는, 근처의 농부로 보였다.
한빈은 마차와 주변의 흔적을 살폈다.
한빈이 주위를 살피고 있을 때, 설화가 물었다.
“공자님, 어떻게 된 것 같아요?”
“수레바퀴가 빠졌군. 흔들리면서 이자는 떨어졌고 운 없이 그 바퀴에 다리가 깔린 것 같구나.”
그때였다.
정신을 잃은 것으로 보이는 사내가 신음을 내며 깨어났다.
“으음, 사, 살려 주시오.”
그 소리에 한빈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노인은 힘겨운 듯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그때였다.
지나가던 사람 중 몇 명이 한빈과 노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