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 공자님 뭐 하세요? (1)
깜짝 놀란 당세령의 표정을 본 당광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해서 같이 떠나거라.”
“아버님, 그래도…….”
“내가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이미 팽 공자에게 맡긴 일이 아니더냐?”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제 말 좀…….”
“더는 말하지 말고 팽 공자를 따라라. 지금 이 상황에서 일꾼을 구할 수 있는 것이 누가 있더냐? 총성과 아미에도 기별을 넣어 봤지만, 별 기대는 하지 않는다.”
“…….”
당세령은 당광현을 보며 입을 벌렸다.
한빈이 요구한 물건도 이해가 안 되었지만, 당광현의 태도도 이해가 안 되었다.
무엇을 요구하는지 묻지도 않고 그냥 따르라니.
이것은 사천당가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과는 상반되는 지시였다.
사천당가는 직계들에게 강호의 음험함에 대해서 입이 닳도록 가르친다.
그것은 사천당가가 누구보다 음험하기 때문이었다.
그러함에도 사천당가의 뒤통수를 치려는 집단이 있다면?
그 집단은 상상도 못 할 힘과 음험함을 지니고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사천당가는 가문을 이끌어 나갈 직계들에게 강호를 의심하라고 가르쳐 왔다.
그런데 쪽지의 내용도 확인하지 않는다니?
물론 당세령도 한빈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빈을 데려온 것이 바로 남장을 한 당세령이었다.
당시에는 당기명이란 이름을 썼지만, 복장을 바꿨다고 눈까지 바뀐 것은 아니었다.
당세령이 한빈을 보던 눈은 그대로였다.
그래도 한빈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확인은 했어야 정상이었다.
그때 당광현의 목소리가 당세령의 귓전을 때렸다.
“어서 준비하거라.”
“네, 알겠어요.”
당세령은 고개를 숙인 뒤 재빨리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점점이 사라질 때였다.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당광현이 급히 물었다.
“팽 공자, 왜 그러는가?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 보게.”
“사천당가의 담장 밖에서 소란이 일어나는 것 같아서요.”
“아마도 비무 대회에 돈을 건 자들 때문일 걸세. 다른 때라면 이곳으로 왔겠지만, 독이 퍼졌다는 소문 때문에 담장 안으로는 못 들어온 듯하네.”
“그렇군요.”
“누군가는 돈을 땄겠지만, 누군가는 돈을 잃었을 테니 소란이 이는 것도 당연할 테지.”
“누가 땄는지 궁금하네요.”
한빈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이며 담장 밖을 바라봤다.
* * *
사천당가의 담벼락 너머에 잠시 소란이 일었다.
그것은 바로 승패를 맞춘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왜 문제일까?
승패의 결과를 맞춘 자가 없었다면 내기에 돈을 건 사람들은 수수료 일 할을 뗀 나머지 원금을 돌려받게 된다.
그런데 승패의 결과를 맞춘 자가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하오문의 판돈 관리자에게 따지듯 물었다.
“여보시오, 어떻게 무승부를 예측한 자가 있단 말이오? 혹시 주최 측의 농간이 아니오?”
“허허, 아닙니다. 우리 사천의 하오문이 이제껏 내기를 속인 적이 있소이까?”
하오문의 관리자는 고개를 갸웃하며 상대를 쏘아봤다.
상대도 그냥 물러나지는 않았다.
“그럼 증거를 보이시오.”
“판돈을 건 고객의 정보를 보호하는 것은 하오문의 도리입니다.”
“그게 무슨…….”
“또한 개개인의 정보를 아무렇지 않게 공개하는 것은 강호의 도리가 아니올시다.”
“혹시 하오문이 승부를 조작한 것이 아니오?”
“대체 우리 하오문을 어떻게 보고…….”
판돈 관리자가 눈을 부라리며 그자를 향해 한 발 내디뎠다.
하오문이 강호에서 천시받는 집단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다른 지역의 이야기였다.
사천에서 하오문은 정사를 아우르는 어엿한 문파였다.
지금의 의심은 하오문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었다.
그러니 발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판돈 관리자는 하오문의 일류 고수.
그 일류 고수가 한 발 내디디자, 이의를 제기한 자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뒤로 물러선다.
그때 목소리 하나가 그들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만하여라.”
냉랭한 분위기 속을 파고든 목소리는 상상할 수 없이 부드러웠다.
그 부드러움은 주변 공간을 장악한 듯 분위기를 단숨에 녹여 버렸다.
모두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사천 하오문의 주인인 백미랑이 사뿐히 걸어오고 있었다.
모두는 천천히 걸어오는 백미랑을 바라봤다.
그녀는 내기를 건 자들과 판돈 관리자의 가운데 서서는 주변을 쓱 훑어봤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조금 전의 상황은 잊고 탄성을 질렀다.
“백미랑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다니!”
“허허.”
“그런데 지금 판돈은?”
“지금 판돈이 문제인가?”
“쉿, 조용히 하게.”
그들에게 판돈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백미랑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들이 마른침을 삼키고 있을 때, 백미랑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저희 하오문을 사랑하시는 여러분……. 저희도 이 승부를 맞춘 자가 나타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백미랑은 말을 끊었다.
그 모습에 모두는 입을 살짝 벌렸다.
백미랑의 부드러운 분위기가 살짝 냉랭해졌기 때문이다.
모두는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것은 아닐까 자신을 되돌아봤다.
그때 백미랑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내기 판에는 규칙이 하나 있다는 것을 잊고 계시는 건 아니죠?”
“…….”
그들은 백미랑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들이 눈을 몇 번 깜빡일 때, 백미랑이 다시 웃음을 피워 냈다.
“만약 오늘 자정까지 승패를 맞춘 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승자는 없는 것으로 하겠어요. 그게 이 내기 판의 규칙이지요. 승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원금은 여러분의 손에 들어갈 겁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것이 하오문이 정한 내기 판의 규칙이었다.
내기의 승자는 당일에 판돈을 찾아가야 했다.
만약에 판돈을 찾아가지 못한다면?
백미랑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역시 백미랑이야.”
“웬만한 판관보다 공정하군.”
“그럼 우리는 여기에서 기다리면 되는가?”
“꼼짝없이 자정까지 여기서 기다려야겠네그려.”
모두의 웅성거림에 백미랑이 손을 들었다.
손을 들자 그녀의 옷소매가 살짝 흘러내린다.
그녀의 팔은 얼마나 하얀지 마치 하늘에 뜬 뭉게구름 같았다.
사람들은 웅성거림을 멈추고 백미랑의 손을 바라봤다.
상황이 진정되자 백미랑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내기의 승자는 오늘 자정까지 만월루로 오라고 여기에 방을 붙이겠습니다.”
백미랑은 사천당가의 담장을 가리켰다.
모두는 호기심에 눈을 빛냈다.
그 모습에 살짝 미소를 비친 백미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만월루로 내기의 승자가 오는지 확인하시면 됩니다. 뭐, 안 온다면 하오문은 내기의 판돈을 공정하게 돌려드리도록 하죠.”
말을 마친 그녀는 부채를 펴더니 몸을 돌려 준비한 마차에 올랐다.
그녀가 마차에 오르자 바퀴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굴러가기 시작했다.
순간 모두는 마차를 멀뚱히 바라봤다.
그들 중 누군가가 말했다.
“우리도 어서 가 봅시다.”
“그래야겠지.”
“자정까지니 만월루가 잘 보이는 자리를 미리 잡아야겠네.”
“그러는 게 좋겠군.”
사람들은 너나없이 바삐 사천당가의 담장을 떠났다.
그들이 떠나자 백미랑의 수하는 그녀의 지시대로 담장의 곳곳에 방을 붙이기 시작했다.
* * *
잠시 후.
당세령은 한빈이 부탁한 물건을 들고 왔다.
당광현은 당세령의 손에 든 짐을 힐끔 바라봤다.
사실 당광현도 한빈이 부탁한 물건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대에게 모든 것을 맡긴 상태였다.
그것도 나이 어린 하북팽가의 사 공자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다.
지금은 상대에게 신뢰라는 두 글자를 새길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내어 줄 물건이라면 굳이 확인하지 않는 편이 상대에게 신뢰를 얻기 좋았다.
그때 당세령이 물었다.
“확인 안 하셔도 되겠어요? 아버님.”
당세령이 보따리를 가리켰다.
보따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어른의 머리 정도의 크기였다. 저 정도의 크기라면 책자밖에 없었다.
책자라?
당광현은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처음 결심한 대로 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저들이 떠나면 당세령이 들른 전각을 관리하는 하인에게 물어보면 되었다.
“우리 가문은 일단 일을 맡기면 상대를 의심하는 법이 없지 않으냐?”
“그, 그렇죠. 아버님.”
당세령이 살짝 말을 더듬었다.
상대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당황한 표정도 잠시, 당세령은 재빨리 미소를 피워 내며 한빈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한빈이 활짝 웃으며 당광현에게 포권했다.
“그럼 바로 떠나겠습니다.”
“잘 부탁하네.”
당광현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미소로 답한 한빈은 당세령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한빈이 점이 될 정도로 멀어지자, 이제까지 아무 말 없던 당무천이 당광현을 바라봤다.
“흠.”
당무천의 헛기침 소리에 당광현이 돌아봤다.
“왜 그러십니까? 아버님.”
“팽 공자가 가져간 것이 대체 무엇이더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부터 알아보려고 합니다.”
그때였다.
멀리서 누군가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뛰어왔다.
그 모습에 당광현이 눈매를 좁혔다.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소란을 피우느냐?”
“긴히 보고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주님.”
“보고라…….”
당광현은 살짝 말끝을 흐리며 수하를 바라봤다.
수하의 얼굴을 알아본 당광현이 눈매를 좁혔다.
“너는 서륜각의 책임자가 아니더냐?”
“네, 맞습니다.”
“그럼 혹시 세령이가 가져간 것이 서륜각의 물건이더냐?”
“네, 맞습니다. 아무래도 보고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혹시…….”
당광현은 말끝을 흐리며 서륜각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서륜각은 사천당가의 모든 비급과 중요 문서가 보관된 곳이었다.
얼마나 튼튼하게 지어졌는지 경천동지한 이번 폭발에도 아무 해가 없었던 전각 중 하나였다.
그곳의 책임자가 이렇게 당황할 정도면?
당세령이 가져간 것은 분명 사천당가의 비급일 것이다.
대체 왜?
의문을 떠올린 당광현이 다급하게 물었다.
“어떤 비급을 가져갔느냐?”
“송구하오나, 비급이 아닙니다.”
“비급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을 가져갔느냐?”
당광현은 눈매를 좁혔다.
그 모습에 서륜각의 책임자는 눈을 질끈 감고 말을 이었다.
“채무 명부와 차용증을 가져갔습니다.”
“차용증이라니?”
“말 그대로입니다.”
“……그래, 알았다. 너는 그만 가 보거라.”
당광현의 말에 서륜각의 책임자는 재빨리 자리를 떴다.
서륜각의 책임자가 사라지자, 당광현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당무천을 바라봤다.
“아버님, 팽 공자가 대체 무엇을 하려는지 걱정됩니다.”
“허허, 나도 걱정이 되는구나. 차용증이라니!”
“혹시 차용증으로 사람들을 위협해서 일꾼을 모으려는 것은 아닐까요?”
“흠.”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팽 공자의 성격상 수단과 방법을…….”
당광현은 말을 멈추었다.
당무천이 손바닥을 보이며 말을 막았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당광현이 입을 딱 벌렸다.
이것은 절대적인 신뢰였다.
자신이 보이는 것은 형식적인 신뢰였지만, 지금 당무천은 진심이었다.
당무천은 한빈이 사라진 곳을 보며 그저 옅은 미소만 보였다.
* * *
자리를 떠난 한빈은 사천당가의 정문을 빠져나가기 전에 누군가를 기다리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에 당세령이 물었다.
“공자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