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 진정한 승자 (5)
당무천은 미간을 좁혔다.
“허, 자네라면 그러고도 남지. 그러니 사파가 아닌가?”
말을 마친 당무천은 독고진을 쏘아봤다.
사실 둘 사이에는 작은 앙금이 남아 있었다.
강남의 이권을 두고 항상 대립하던 것이 사천당가와 강남 사도련이기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둘은 천적에 가까웠다.
거기에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독고진의 외모도 당무천을 자극했다.
발끈하는 당무천의 모습에, 독고진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암제로부터 자네들을 구해 준 것이 누구지?”
“도움을 받은 적은 없네.”
당무천이 당연하다는 듯 코웃음 치자, 독고진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지켜보는 것만으도 도움이 되었겠지. 안 그런가? 팽 공자가 내게 바란 것도 그것이고 말이야.”
독고진은 한빈을 바라봤다.
갑자기 한빈의 이야기가 나오자, 당무천은 대꾸 없이 고개를 돌렸다.
모두가 한빈에게 시선이 모인 상태.
한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이건 한빈의 진심이었다.
한빈이 그를 이곳으로 부른 것은 증인이 필요해서였다.
덕분에 무가지회에 참석한 무림세가는 사파가 그들의 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강남 사도련의 수장인 독고진도 자신의 진짜 적이 정파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빈이 독고진에게 구경만 하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제갈공민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대화를 지켜보던 제갈공민이 끼어들었다.
“그건 독 대협과 팽 공자의 말이 맞습니다.”
“말이 맞다라?”
당무천이 눈을 가늘게 뜨자, 제갈공민이 말을 이었다.
“여기 독고진 대협이 오지 않았다면 사파는 우리의 상황을 몰랐을 테지요. 그리고 우리도 사파를 계속 의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오신 것은 우리에게도 이득입니다.”
“이득이라니…….”
당무천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제갈공민을 바라봤다.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것은 혹시나 하는 혈교의 재림이 아닙니까?”
“흠.”
“그 상황이라면 정파와 사파의 구분은 무의미해집니다. 이런 상황을 저희가 사파에 알리려면 얼마만큼의 노력이 필요할지는 생각도 하기 싫습니다.”
“…….”
당무천은 제갈공민과 독고진을 번갈아 봤다.
그것도 잠시, 당무천은 고개를 서서히 끄덕이기 시작했다.
“내 사과하겠네. 많은 일을 겪다 보니 내 시야가 좁았네.”
당무천의 말에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당무천이 누군가에게 사과하는 것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
강남 사도련의 독고진조차 눈빛이 살짝 떨렸다.
독고진은 고개를 흔들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가 사과를 하다니, 이제 우리의 세대는 끝난 것 같군.”
“끝난 건 사실이지 않나? 이제 후대를 생각해야 할 때이지.”
당무천은 고개를 돌려 후기지수들이 모여 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때 독고진이 급하게 말을 이었다.
“일단 혈교에 관해서 계속 얘기를 해 보게.”
그의 말에 모두가 표정을 바꾸었다.
마치 전쟁을 앞둔 군장들이 모여 있는 것처럼 주변의 분위기는 다시 무거워졌다.
그들의 회합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당무천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십대세가의 수장을 맡게 되었으며, 독고진의 강남 사도련과 십대세가는 긴밀한 협조를 맺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이것은 밀약이었다.
겉으로는 표시를 안 내고 전과 같이 대립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기로 했다.
그때 당무천이 그의 아들인 당광현에게 눈짓했다.
자리에서 사라진 당광현이 나타난 것은 반 시진 뒤였다.
그는 하인들과 함께 나타났다.
하인들은 술상과 술병을 들고 당광현의 뒤를 따랐다.
당광현은 그들의 회합 자리에 술상을 놓았다.
그러고는 백아주가 든 호리병을 돌렸다.
호리병에 가득 든 백아주라면 금전 한 닢에 맞먹을 정도였다.
당무천은 독고진에게 백아주가 담긴 호리병을 건넸다.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의 앞에 놓인 호리병을 들었다.
독고진은 호리병을 들고 코앞에 갖다 댔다.
“역시 명주로군.”
“가산을 탕진해서 준비한 술이라네.”
“엄살이 심하군.”
“엄살이 아니라네. 지금 우리 가문의 꼴을 보게. 이 정도로 폭삭 무너졌는데. 백아주면 기둥뿌리 서너 개 정도는 뽑았다고 봐야 되지 않는가?”
“그럼 그 기둥 잘 마시겠네.”
독기진은 호리병에 든 백아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당무천은 독고진의 그런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사천당가에서 이방인이 술을 한입에 털어 넣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상대에게 등을 맡긴다는 신뢰의 표시였다.
사천당가 하면 떠오르는 것은 당연히 독이었다.
덕분에 다들 사천당가에서 내오는 음식을 경계하기 마련이었다.
하물며 상대는 강남 사파의 기둥이었으며 사천당가와 첨예하게 맞서던 자였다.
그런 자가 사천당가에 신뢰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당무천은 그다음 장면에서 살짝 입을 벌렸다.
술을 한입에 털어 넣은 독고진이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한빈이었다.
당무천은 그제야 알았다.
그가 신뢰하는 것은 사천당가가 아니라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는 것을 말이다.
‘대체 정체가 뭐란 말이냐?’
당무천은 터져 나오려는 말을 꾹 눌러 참았다.
한빈을 잠시 바라보던 독고진은 호리병을 뒤로 던졌다.
휙!
호리병이 포물선을 그리며 연무장 위에 떨어졌다.
쨍그랑.
산산조각이 난 호리병.
나머지 십대세가의 대표들도 백아주를 들이켠 뒤 독고진과 마찬가지로 호리병을 뒤쪽으로 던졌다.
휙! 휙!
탕.
쨍그랑.
마치 악기를 연주하는 듯한 소리가 잠시 연무장을 덮었다.
소리가 잠잠해지자 독고진이 말했다.
“진심은 안에 담고.”
“껍데기는 날려 버렸네.”
당무천이 답했다.
호리병 속의 술을 털어 넣는 것은 약속을 지키겠다는 맹세.
그 호리병을 던져 깨뜨린 것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겠다는 표시였다.
무림세가와 강남 사도련 사이의 밀약은 완성된 것이다.
그때였다.
독고진이 한빈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자네는 안 마시나?”
그의 질문에 모두가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저는 부상이 심해서 못 마실 것 같습니다. 주화입마 수준이라서요.”
“쾌유를 비네.”
독고진은 한빈을 그윽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고는 묘한 웃음을 남긴 뒤 돌아섰다.
돌아선 그는 신형을 날렸다.
사사삭.
그는 허공을 박차고 몇십 걸음씩 뛰며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조용히 그 광경을 바라보던 한빈은 당무천을 바라봤다.
시선을 느낀 당무천이 물었다.
“말할 것이 있느냐?”
“이 술 말입니다.”
“못 마시는 것은 이해하니 걱정하지 말거라.”
“기왕 준 술이니 이건 가져가겠습니다, 어르신.”
“아.”
당무천이 입을 벌렸다.
화합의 상징으로 준 술을 가져가겠다고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당광현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모두를 바라봤다.
“여러분들.”
갑자기 살짝 깔린 목소리로 자신들을 부르자, 십대세가의 대표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중 제갈공민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당 대협.”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들께서 우리 가문을 도와주셨으면 좋겠소.”
“가문이라…….”
“지금 이 상황이면 복구가 불가능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니까…….”
당광현은 모두에게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천당가에 가장 필요한 것은 허물어진 전각과 기물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여기가 사천당가라는 점이었다.
간밤에 일어난 사건은 알게 모르게 주변에 퍼진 상태.
만독 비고가 깨지는 바람에 사천당가에 발을 들여놓으면 언제 죽일지 모른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땅이 무너져 내린 것은 맞지만, 만독 비고가 터진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그 폭발 덕분에 만독 비고가 완전히 막힌 것이 분명했다.
사천당가가 세세하게 조사한 결과, 이곳에서 중독당할 염려는 없었다.
당광현은 그것을 모두에게 알리고 일꾼을 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사천당가의 ‘사’ 자만 들어도 모두 도망가기 바빴다는 것이 수하들의 이야기였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석공이나 목공이 많이 부족합니다. 잔일을 도와줄 일꾼도 부족합니다.”
말을 마친 당광현은 모두를 바라봤다.
제갈공민이 헛기침을 했다.
“흠, 이거 참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석공과 목공을 타 지역에서 구하려고 한다면 기한이 걸릴 테고, 또 그 소문이 사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 아닙니까? 비용이라면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꾼들은…….”
제갈공민은 슬쩍 옆을 바라봤다.
다른 십대세가의 대표들도 난감한 듯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이번 사천당가의 비극에 도움을 손길을 주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일손이었다.
여기에 온 자 중에 일꾼이 있다면 지원해 주겠지만, 모두가 무인과 잔일을 돕는 하인들밖에 없었다.
모두가 난감한 듯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한빈이 입을 열었다.
“제가 도와드리면 어떻겠습니까?”
“…….”
당광현이 아무 말 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하북팽가의 대표로 온 팽대위도 어쩔 줄 모른다는 표정을 짓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한빈이 돕겠다고 나서니, 당광현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한빈이 모두에게 말했다.
“공짜는 아닙니다. 인력을 구하려면 당연히 비용이 필요할 테고, 그 비용은 여기 있는 모두가 나눠서 부담해 주심이 맞을 것 같습니다.”
“비용은 걱정하지 말게. 일단 기술자부터 구해 주시게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만 믿으십시오.”
한빈이 가슴을 탕탕 치자, 팽대위가 재빨리 달려왔다.
“대체 네가 어떻게 사람을 구한다는 것이냐?”
“숙부님, 저를 못 믿으십니까?”
도리어 반문하는 한빈의 모습에 팽대위는 기가 막혔다.
이곳은 하북이 아닌 사천이었다.
하북도 아니고 이 머나먼 사천 땅에서 기술자를 구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사천의 지배자인 사천당가가 이렇게 난감해했겠는가?
팽대위가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도 팽대위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한빈이 씩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순간 두 줄기 하얀 바람이 불어왔다.
사사삭.
한빈의 양옆에 설화와 청화가 나란히 섰다.
그 모습을 본 당광현이 말했다.
“놀라운 신법이군.”
당광현의 감탄에 청화가 부끄러운 듯 말했다.
“이건 제 무공 실력이 아니에요. 언니가 끌고 왔어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을 밝히는 청화의 모습에 모든 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다시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 설화가 한빈을 바라봤다.
“공자님, 계약서 펼까요?”
“아니, 상관없다.”
“왜요?”
“이미 기본 서약서에 다 써 있으니까.”
한빈은 설화가 든 보따리를 가리켰다.
그 안에는 모든 가문이 손도장을 찍은 서약서가 들어 있었다.
그 모두는 입을 딱 벌렸다.
십대세가의 대표 중 몇몇은 그 서약서의 내용도 읽어 보지 못했다.
앞에 선 제갈공민이 찍었기에 따라서 찍은 것이었다.
천하의 제갈세가가 손해 볼 일을 할 리 없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다.
몇몇 가문 대표들의 이마에는 살짝 땀방울이 배어 나왔다.
그 모습에 한빈이 당광현에게 말했다.
“사천당가의 재정을 관리하는 친구를 하나 붙여 주십시오. 제가 사흘 내로 일꾼들을 데려오겠습니다. 다만 목숨을 걸어야 하는 만큼 일꾼들의 일당이 조금은 비쌀 수도 있습니다.”
“그건 문제가 안 되네. 어차피 공동 부담이 아니던가? 공동 부담이 아니라도 사천당가는 그만큼의 여력은 충분하다네.”
“그럼 안심입니다.”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당광현이 누군가에서 손짓했다.
곧 가녀린 체구의 여인이 경장을 나풀거리며 걸어왔다.
그녀는 다름 아닌 당세령이었다.
청화의 언니이자 당광현의 딸이며, 십 년이 넘도록 남장을 하고 다니다 이제야 본모습을 드러낸 여인이었다.
그녀는 당광현에게 다가오더니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버님, 무슨 일이신지요?”
“네가 당분간 팽 공자를 돕거라.”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님.”
당세령이 당광현을 향해 포권했다.
그때 한빈이 당세령에게 쪽지 하나를 건넸다.
“여기에 있는 물건들 좀 부탁드립니다, 당 소저.”
“네, 알겠어요.”
쪽지를 받아 든 당세령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