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 진정한 승자 (4)
오른팔에 흡수된 용린검.
하지만 그 형태가 문제였다.
아무런 해명 없이 이 팔을 다른 이가 보게 된다면 마공을 익혔다느니.
전염병에 걸렸다느니 하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다행인 것은 이 혈선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옅어진다는 것이었다.
신검합일이라?
한빈은 그 당시 상황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한빈은 암제와의 승부를 결정지은 후 재빨리 적혈맹호대가 짊어지고 왔던 관으로 몸을 숨겼다.
그 관은 하북의 명장 정철민의 작품.
지축을 울리는 거대한 폭발에도 온전히 몸을 보전할 수 있었다.
사실 한빈이 관에 들어갔던 것은 또 하나의 기연이 되었다.
관에 들어간 후 시작된 신검합일의 과정.
한빈은 신검합일의 과정 중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용린검은 극히 일부라는 것이다.
한빈이 일부를 받아들이고 나면 나머지 조각은 강호로 흩어질 터였다.
하지만 관 안에 한빈이 들어가 있었기에 모든 기운을 흡수할 수 있었다.
검을 흡수하고 화룡편, 즉 검집의 기운만 남은 상태.
그때 뜨거운 기운이 한빈이 누워 있던 관을 덮쳤다.
덕분에 관은 가마솥이 되어 버렸다.
밥을 지어 본 적이 있는 강호인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솥의 뚜껑이 얼마나 잘 밀착되어 있느냐에 따라 밥맛이 달라지는 것을 말이다.
한마디로 한빈은 솥 속의 밥이 된 것.
팔에 남아 있는 혈선이 바로 화룡편의 흔적이었다.
신검합일로 흡수된 용린검의 흔적은 어디에 있을까?
용린검은 완벽하게 흡수되어 한빈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용린검이 한빈에 피에 흐른다고 보면 간단했다.
덕분에 한빈의 몸에 잠든 용린검은 언제든지 검기처럼 형상화시킬 수 있었다.
그 용린검을 이용해서 그곳을 탈출하게 된 것이었다.
땅속에서 탈출한 한빈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무가지회에 참가한 가문들을 관찰했다.
그 결과, 그들이 비무대에서 취할 행동을 알 수 있었다.
한빈이 가장 유심히 본 가문은 역시 위씨세가였다.
전생에 마지막까지 악연을 이어 가던 가문이 위씨세가였기 때문이다.
위씨세가는 암제와의 대결에서 그의 편에 서지 않고 마지막까지 무림세가의 편에 섰었다.
배신을 하지는 않았지만, 한빈은 전생의 기억이 있었기에 의심 가득한 눈으로 그들을 관찰했다.
짓지도 않은 죄를 벌할 만큼 한빈은 악당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전생의 악연을 잊을 만큼 성인군자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한빈은 어떤 눈으로 위씨세가를 바라보고 있을까?
한빈이 바라보는 위씨세가는 잠재적인 무림 공적이었다. 한빈은 뒤통수가 근질근질한 채 평생을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들이 죄를 지을 때까지 기다리든지, 죄를 짓게 만들면 그뿐이었다.
한빈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는 것도 그 포석 중 하나였다.
아마도 몇 가지 미끼를 더 뿌리고 나면 위씨세가가 아니더라도 남은 잔당이 그물에 걸려들 것이 불 보듯 훤했다.
그때였다.
한빈의 왼쪽 다리가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흡수되지 않은 화룡편의 기운이 욱신대는 것이라고 생각한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다리에 통증이 올라오는 것이 이상해서였다.
‘아, 그렇지!’
한빈은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한빈은 재빨리 왼쪽 다리를 어루만졌다.
한빈은 땅속에서 탈출한 뒤 이상한 현상을 목격했다.
그것은 왼쪽 다리에 꽂아 넣은 두 개의 단검이 서로를 밀어 내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두 개의 단검이란?
하나는 좌혈랑검이었고 다른 하나는 만월이었다.
한빈은 그곳을 탈출하며 평범한 단검이 되어 떨어져 있는 만월을 주워 다리에 꽂아 넣었다.
뭐, 단검에 또렷하게 새겨져 있는 ‘만(卍)’이란 글자를 확인하지 못했으면 그것이 암제가 쓰던 만월인지는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획득한 만월은 묘하게 좌혈랑검과 반응했다.
신기한 것은 항상 밀어 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현상이 신기하기에 계속 좌혈랑검과 만월을 붙여 놓은 상태였다.
서로를 밀어 내다 보니 검 끝이 다리를 살짝 찌른 것이 분명했다.
겉으로 두 개의 단검을 정리하고 있자, 주변의 시선이 한빈에게 모였다.
당무천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후.”
제법 큰 한숨 소리에 한빈은 상념에 깨어나 그를 바라봤다.
“왜 그러십니까? 어르신?”
“혹시, 다리도 불편한가?”
“그 폭발 속에 멀쩡한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염려 마십시오.”
“그게 무슨 말인가?”
“강호를 위해서 이 한 몸 희생한 것이니 괜찮습니다. 아니, 오히려 기뻐해야 하는 상황이지요.”
“허허.”
당무천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것은 웃음이 아니라 안타까움의 탄성이었다.
그와 비슷한 탄성이 동시에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모두 안타까운 눈빛으로 한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갈공민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한빈이 목놓아 운다면 한결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한빈이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강호를 위해서라고 말하자, 마치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한빈이 희생해서 무림세가를 지킬 동안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당무천도 마찬가지였다.
한빈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은혜를 입었다.
거기에 마지막에는 몸을 희생해 적을 묻어 버렸다.
한빈이 살아 돌아오자 한때나마 그 마음의 빚이 살짝 가벼워졌었다.
하지만 지금 한빈의 발언으로 그 빚의 무게는 몇 배로 늘어났다.
그것도 잠시, 당무천은 조용히 한빈을 바라봤다.
은근한 눈빛에 한빈이 물었다.
“혹시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내가 팽 공자의 치료를 맡으면 어떨까 하네.”
“아닙니다. 지금 제 상태는 전에 어르신의 병환보다 심각합니다.”
“아.”
당무천은 다시 입을 벌렸다.
자신의 병을 치료해 준 것이 누군지 이제 기억난 것이다.
독을 흡수해서 병마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은 공독지체를 가진 청화였지만, 병을 진단하고 그 처방을 내린 것은 한빈이었다.
잠시 대화를 이어 가던 한빈은 모두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는 이만 가 볼까 합니다, 어르신들.”
한빈이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십대세가의 대표들은 한빈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것은 후기지수에게 보일 수 없는 예였다.
한빈은 그들의 예에 포권으로 답했다.
“이제는 진짜 가 봐도 되겠지요?”
“그러게나. 어서 들어가서 쉬게.”
당무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이 천천히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자리로 돌아가는 한빈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했다.
십대세가 대표들의 이어지는 이야기 중 흥미가 돋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만월에 관한 이야기였다.
한빈이 자신도 모르게 기척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걸어가고 있을 때, 당무천은 조용히 모두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말하는 것은 절대 비밀로 해 주길 부탁드리네.”
“말씀하시지요.”
제갈공민이 답하자 나머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동의한다는 말이었다.
당무천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 모습에 이번에는 남궁장천이 재촉하듯 물었다.
“어서 말해 보십시오. 할 말이 무엇입니까?”
“지금부터 하는 말은 만월에 대한 것이오.”
“만월이라면, 초승달처럼 생긴…….”
남궁장천이 말끝을 흐리며 당무천을 바라봤다.
당무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그것이 만월이네. 주인이 죽었으니 이제 모양도 변했을 것이네. 아마도 본래 모양인 둥근 달의 형태로 돌아갔겠지.”
“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저 아래에서 만월을 찾아야 하는 겁니까?”
“그건 아닐세. 저 아래에 묻힌 만월을 어떻게 찾는다는 말인가?”
“그럼 왜 만월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겁니까?”
“만월에는 중요한 비밀이 하나 숨어 있다네…….”
말을 마친 당무천은 조용히 모두를 바라봤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당무천의 표정이 점점 진지해졌기 때문이다.
뭔가 진지함을 넘어서 비장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때였다.
당무천이 어딘가를 바라봤다.
모두가 당무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빈이 조용히 서 있었다.
그 모습에 당무천이 물었다.
“언제부터 있었는가?”
“만월의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있었네요.”
“음.”
“무슨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저도 들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들을 자격이 있지. 내가 자네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딱 한 가지 이유일세.”
“그게 무엇인지 물어봐도 될는지요?”
“자네에게 부담을 지우기 싫어서네.”
“괜찮습니다. 어차피 망가진 몸, 강호를 위해서 이 한 몸 불사르지요.”
말을 마친 한빈은 조용히 주위를 둘러봤다.
한빈은 분위기가 무겁기에 가벼운 농담을 던진 것이었다.
하지만 반응은 한빈의 예상 밖이었다.
그들이 피워 낸 기세 덕분인지 주변 공기가 암울해지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그만큼 비장했다.
그때 당무천이 말을 이었다.
“그래. 어차피 자네도 알아야 할 이야기 같군. 어찌 보면 다 끝난 이야기일 수도 있고 말이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이야기는 자네들만 알고 있게나. 팽 공자도 마찬가지고.”
“네, 알겠습니다.”
한빈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다른 무림세가의 대표들도 눈을 반짝였다.
모두의 시선이 모이자 당무천이 입을 열었다.
“만월은 사천당가의 보물이었다네. 그런데 먼 옛날 도둑을 맞았지.”
“도둑이라……. 혹시 훔쳐 간 범인이 마교입니까?”
“비슷하네.”
“비슷하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마교가 아니라 혈교였다네.”
당무천의 말이 끝나자, 모두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중 황보만청이 당무천에게 물었다.
“혈교면, 전설 속의 사라진 집단 아닙니까?”
“그렇다네. 이제는 전설 속의 이야기일 뿐이지. 하지만, 백 년 전까지만 해도 그들을 이야기 속의 집단이라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네. 우리 정파도, 마교도 말이야. 그들 덕분에 정, 사, 마가 강호가 생겨난 이래로 하나가 되었다네.”
“네, 저도 어렴풋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여기서 혈교가 왜 나옵니까?”
“당시 혈교와의 전쟁 때 사천당가에서는 최고의 보물인 만월을 빼앗겼다네.”
“도둑맞은 것이 아니라 빼앗겼다고요?”
“정확히는 승부에서도 지고 가문의 최고 보물이었던 만월까지 빼앗긴 것이지. 하지만 승부에서 지고 보물까지 빼앗겼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가문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말일세.”
“그래서 도둑맞았다고 하셨군요.”
“그렇다네. 그런데 어제 그 만월이 세상에 나타난 것일세.”
“그렇다면…….”
“백 년 전 이 땅에서 사라진 혈교일 수도, 아닐 수도 있네. 그 진실은 저 땅속에 묻혀 있겠지.”
당무천은 바닥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제갈공민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음, 그렇다면 암제라는 자 뒤에 누군가 있다는 얘기 아닙니까?”
“지금부터 그것을 상의하려는 것일세.”
“무림세가의 복구도 문제지만, 앞으로 경계 태세를 높여야겠군요.”
“무림의 정보력을 한곳으로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네.”
당무천은 모두를 바라봤다.
그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혹시 모를 사태 때문이었다.
백 년 전에 강호에 혈겁을 일으켰던 혈교가 다시 나타난다라?
그것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때였다.
그들의 뒤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기척도 숨기지 않고 한빈의 뒤에 섰다.
그는 다름 아닌 강남 사도련의 독고진이었다.
당무천은 독고진을 바라보며 외쳤다.
“팽 공자에게 물러나게!”
그의 말에 독고진은 양손을 위로 올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이 아이를 해칠 사람으로 보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