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 십대세가의 수장 (5)
비무대 위를 가리키던 이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진짜 설산신녀네, 설산신녀야. 허허, 저런 고수를 무가지회에서 다시 보다니…….”
그의 말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설산신녀라는 단어가 언급되기 시작했다.
나루터에서 붙여졌던 설산신녀라는 별호는 늦게 도착한 무림세가 사람들 덕분에 어느 정도는 퍼져 있었다.
사람들은 설산신녀의 얼굴은 몰라도 그 별호는 모두 알고 있었다.
비무대 아래 웅성대는 소리에 제갈공민은 손뼉을 쳤다.
짝.
그 소리에 소란이 멈췄다.
하지만, 제갈공민도 적잖게 놀랐다.
다른 이들이 설화를 알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제갈공민은 다시 한번 반성했다.
정의맹의 군사로 있으면서 강호의 정보에 너무 소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설화를 바라보고 있던 위지옥도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졌다.
철모르는 어린 소녀로 알았는데 별호까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거기에 비무대 아래에서 술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다 보니 왠지 설화가 만만치 않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설화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쓸 검은…….”
설화는 우혈랑검을 꺼냈다.
단검을 앞으로 내민 설화는 당당하게 외쳤다.
“그 이름은 비밀이에요!”
우혈랑검이라고 밝히려 했지만, 왠지 모든 것을 밝히는 것은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한빈의 영향이었다.
한빈의 모든 행동을 보고 배우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몸에 배어든 습관이었다.
하지만 좌중들의 반응은 설화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설산신녀가 쓰는 검이 비밀이라고 하네.”
“비밀이라…….”
“뭔가 있어 보이지 않나?”
“비밀이라는 이름을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것 같기도 하고.”
“혹시 무림칠대기보 같은 명검이 아닐까?”
“에이, 그 정도는 아니겠지. 그래도 비밀이라는 이름이 왠지 묵직해 보이네그려.”
술렁이는 좌중의 모습에 설화는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상대에게 혼란을 주려고 뱉은 말이 묘하게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우혈랑검이 졸지에 비밀이라는 희한한 이름으로 강호인들에게 불린다니!
우혈랑검의 ‘우(右)’ 자가 무슨 뜻이던가?
한빈의 오른팔이라는 상징이었다.
설화는 자신이 조금 전 뱉은 말을 주워 담고 싶었다.
어쩔 줄 모르는 설화의 모습은 언뜻 보기에 대결을 겁내는 모습으로 보였다.
멀리서 지켜보던 위지옥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난데없이 등장한 별호 때문에 살짝 마음을 졸였는데, 저리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제갈공민이 외쳤다.
“비무를 시작하겠소!”
그는 비무대의 가장자리로 물러났다.
그 외침에 위지옥은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낙월검이라는 그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달빛이라도 벨 것 같은 예기가 그의 검신에 흘렀다.
우우웅.
그의 검신이 살짝 떨린다.
위지옥의 내공과 검이 공명하는 것이다.
설화도 우혈랑검을 들었다.
하지만 빼내지는 않았다.
도리어 품에서 천을 꺼내 우혈랑검의 검집을 닦았다.
검집을 닦아 낸 설화는 천을 다시 품에 집어넣었다.
누가 봐도 무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모습에 상대와의 간격을 좁히던 위지옥이 말했다.
“무례하군.”
“오늘은 검신에 피를 묻히기 싫어서요.”
“무례한 것이 아니고 광오한 것이었군. 조그만 것이 겁도 없이…….”
대화를 이어 나가던 위지옥은 재빨리 검을 찔러 들어갔다.
원래 비무에서 상대를 봐준 적이 없는 그였다.
가장 빠르게 끝내는 것이 약자에 대한 예의.
슝.
일직선으로 찔러 들어가는 그의 검이 파공성을 냈다.
그의 검에는 추호도 봐주지 않겠다는 결의가 담겨 있는 듯 보였다.
위지옥의 공격에 좌중들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조심.”
“저대로면 설산신녀가!”
모두가 비명을 지를 때였다.
설화는 그가 다가오는 만큼 뒤로 물러났다.
사사삭.
마치 소풍을 나온 것같이 여유로운 보법으로 물러서고 있었다.
사실 설화도 위지옥과 마찬가지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깔끔하게 끝내는 것이 약자에 대한 예의.
하지만 위지옥의 말 한마디에 설화의 생각이 바뀌었다.
그것은 ‘조그만 것이’라는 단어였다.
그 말에 설화의 표정이 바뀌었다.
설화는 지금 무표정한 얼굴로 간격을 계산하고 있었다.
간격을 계산하며 비무의 시작과 끝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설화가 비무대의 끝까지 몰리자 좌중들은 다시 탄성을 질렀다.
물론 위지옥의 입꼬리는 슬쩍 올라갔다.
도망치기만 하는 설화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별호를 듣고 경계했던 자신이 우스워졌다.
위지옥은 검을 길게 뻗었다.
“여의활검.”
그것은 그가 주로 쓰는 위씨세가 망향검의 일 초식이었다.
순간 갑자기 검이 여의봉처럼 늘어났다.
모두는 눈을 크게 떴다.
아래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의 눈에도 검이 두 뼘 정도는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위지옥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끝까지 몰린 상대가 피할 곳은 없었다.
여의활검의 원리는 간단했다.
처음 공격에서는 최대 간격으로 검을 뻗지 않는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검을 뻗으면 검이 늘어난 것과 같은 착각이 든다.
항상 같이 수련하는 위씨세가의 무사들에게는 통하지 않지만, 다른 가문의 무사들은 그 원리도 깨닫지 못한 채 당하는 수법이었다.
“이제 그만 가거…….”
위지옥은 말을 맺지 못했다.
상대가 앞쪽에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의 귓가에 낙엽 밟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사사삭.
위지옥은 검을 내민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저 찾아요?”
순간 위지옥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목소리는 분명 설화의 목소리였다.
거리는 반걸음.
상대의 검은 단검인 데다 어린 소녀답게 팔 길이도 짧지만, 이런 거리라면 자신의 목이 달아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물론 비무라는 특성상 진짜 목숨이 달아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위지옥은 재빨리 몸을 돌리며 검을 횡으로 그었다.
휭.
위지옥은 자신도 모르게 검에 기를 담았다.
순간 일렁이는 검기.
기가 담긴 검신이 공간을 가르자 파공성이 일어났다.
팡!
위지옥은 순간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반보 뒤였는데, 몸을 돌려 보니 설화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위지옥의 옆쪽에서 설화의 신형이 나타났다.
위지옥은 지체 없이 그곳을 향해 검을 찔러 들어갔다.
설화는 반격도 하지 않고, 반보 물러났다.
파박.
이번에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움직임은 아니었다.
위지옥은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의 간격에서 빠져나간 이전 상황이 혹시 착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래에서 지켜보던 이들은 설화의 움직임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설화는 위지옥의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에 마치 위지옥을 유인하는 것만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대결의 양상은 처음과 변함이 없었다.
설화는 위지옥의 간격 안에 있었다.
하지만 위지옥의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갔다.
휙!
위지옥이 태산을 쪼갤 듯한 기세로 아래로 검을 그었지만, 설화는 정확히 반보 옆으로 비켜 나갔다.
위지옥의 머릿속에는 딱 한 가지 생각밖에는 없었다.
‘조금만 더.’
딱 한 뼘이었다.
그 차이로 설화는 위지옥의 검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헉, 헉.”
위지옥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몰아쉬었다.
삼 일 밤낮을 싸웠다는 무림 고수들의 이야기도 있었지만, 후기지수 중 그런 경지에 있는 이는 없었다.
위지옥은 쉴 틈 없이 반 시진 넘게 검을 휘둘렀다.
거기에 검기까지 펼친 상태였다.
이렇게 지치지 않는다면 도리어 그것이 이상한 것이었다.
휘청.
위지옥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상대의 공격에 의해서 흔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기력이 다한 것이었다.
그때였다.
위지옥이 쓰러지는 방향에서 단검이 날아들어 왔다.
휙!
생각지도 못한 살기가 담겨 있는 일격이었다.
위지옥은 자신도 모르게 재빨리 몸을 돌렸다.
아슬아슬하게 설화의 우혈랑검이 그의 옷자락을 스쳤다.
그때부터 정반대의 상황이 되었다.
설화의 공격을 위지옥이 피하기에 급급했다.
그 비무 장면을 바라보는 위지약은 입술을 깨물었다.
위씨세가 최고의 무사가 비무대에서 놀림감이 되고 있는 장면은 인정할 수 없었다.
저건 일부러 비무를 끝내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위지옥은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것이 아니었다.
상대의 검이 위지옥의 옷자락을 노리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당하는 위지옥이 상대의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헉헉.”
위지옥이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는 못 움직이겠다는 듯 위지옥은 멈췄다.
그러고는 기수식을 취했다.
그의 낙월검은 사시나무 떨리듯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누가 보면 세찬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가지로 착각할 정도였다.
좌중들도 설화의 무위를 그제야 깨달았다.
“대단하군, 역시 설산신녀야.”
“그래, 상대를 봐주겠다는 거잖아. 그런데 왜 비무를 포기 안 하지?”
“그러게. 설산신녀가 그렇게 봐줬으면 이쯤 해서 포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
“저러면 맞아도 할 말 없지.”
그들이 봤을 때 비무의 내용은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비무대 위에 서 있는 위지약은 인정할 수 없었다.
딱 한 뼘의 차이였다.
상대가 운 좋게 한 뼘 차이로 자신의 검을 피해 나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설화가 만들어 준 착각이었다.
모두가 술렁이는 가운데, 비무를 보고 가장 놀란 이는 따로 있었다.
그는 하북팽가의 팽혁빈이었다.
팽혁빈은 갑자기 속담 하나가 생각났다.
그것은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었다.
동생인 한빈의 시녀가 저토록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을 줄을 몰랐었다.
어느 정도 수준의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었다.
“허, 그것도 모르고 이것저것 심부름을…….”
그는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시녀라 할지라도 저 정도의 고강한 무공을 지닌 무인이라면 대우를 해 주는 것이 예의였다.
그런데 동생인 한빈은 저런 무인을 일개 시녀로 쓰고 있었다.
“허.”
한숨이 다시 터져 나왔다.
땅속에 묻힌 한빈이 떠오르자 복합적인 감정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때였다.
많이 들어 본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렸다.
“제법 하죠?”
팽혁빈은 고개를 돌렸다.
순간 팽혁빈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그곳에는 다름 아닌 한빈이 빙긋 웃고 있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무복밖에 없었다.
평소 붉은 무복을 입고 다니던 한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적혈맹호대의 대원들처럼 회색 무복을 입고 있었다.
그것 말고 달라진 점은 아무것도 없었다.
입술을 달싹이던 팽혁빈이 입을 열었다.
“한빈…….”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빈의 검지가 팽혁빈의 입술을 막았다.
“일단 진정하시죠, 형님.”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어떻게 나온 것이야?”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고요. 부탁 하나만 드릴게요.”
한빈이 빙긋 웃었다.
그 웃음에 팽혁빈의 눈이 커졌다.
분명히 동생 한빈인데, 뭔가가 달라졌다.
지금 웃음에는 묘하게 현기가 담겨 있었다.
‘마치 득도한 고승의 웃음처럼 보이는 것을 왜일까?’
팽혁빈은 한빈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때였다.
주변에서 함성이 울렸다.
“와아!”
“설산신녀가 이겼다.”
“이거 묘하게 재미있는 비무였네.”
“그러게 말일세.”
좌중들이 웅성거릴 때 비무대에서는 창백한 얼굴을 한 위지옥이 부축을 받고 내려오고 있었다.
말이 부축이지, 양발이 공중에 떠 있는 것으로 봐서는 의식이 아예 없는 것으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