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 십대세가의 수장 (4)
당무천이 눈매를 좁혔다.
“그건…….”
설화가 나서서 답하려 하자 당무천이 말을 끊었다.
“비밀이겠지.”
“앗.”
설화가 정곡을 찔렸다는 듯 입을 벌렸다.
그 모습에 다시 웃음을 지은 당무천이 말을 이었다.
“어찌할지는 상관 안 할 테니 세령이와 함께 비무에 대해서 상의하거라.”
말을 마친 당무천은 몸을 돌리며 손짓했다.
자리를 피해 주자는 신호였다.
“네, 감사해요.”
설화가 천천히 자리를 떠나는 당무천을 향해 포권했다.
사라지는 당무천을 바라보는 설화는 눈을 가늘게 떴다.
기권할 비무에 나가는 것도 이해가 안 될 텐데, 사천당가의 구성원으로서 비무에 나가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다 알겠다는 듯 저리 웃으며 허락을 한 당무천이 이해가 안 되었다.
설화는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었다.
“높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언니.”
“아, 아무것도 아니야.”
설화는 손을 내저었다.
그때 당세령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모든 일을 우리에게 맡긴다고 했으니 솔직히 얘기해 보자.”
“그러니까…….”
설화는 주변을 살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드디어 다시 비무대에 제갈공민이 올랐다.
제갈공민은 어지럽게 이어진 선 중 하나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 선의 끝에는 각각 위씨세가와 사천당가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제갈공민이 나지막이 외쳤다.
“비무에 참가할 위씨세가의 무사와 사천당가의 무사는 나오시오!”
그의 말에 제갈공민의 양옆으로 두 무사가 뛰어올랐다.
탁, 탁.
제갈공민을 중심으로 두 명의 무사가 착지했다.
두 명의 무사는 마침 똑같이 여인이었다.
위씨세가의 여인이 먼저 한 걸음 나왔다.
“저는 위씨세가의 위지약입니다.”
그녀가 상대를 보며 포권하자, 사천당가의 무사도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사천당가의 당세령입니다.”
그녀의 소개에 좌중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사천당가에 당세령이라는 무인이 있었나?”
“누구지? 처음 들어 보는데?”
“대체 누구야? 직계 중에 당세령은 처음 들어 봤는데.”
좌중들이 술렁이기 시작하자 제갈공민은 손뼉을 한 번 쳤다.
짝!
그 소리에 좌중들의 술렁임이 멈췄다.
제갈공민은 좌중을 둘러본 후 말을 이었다.
“오늘 무가지회를 지켜보기 위해 귀빈들이 오셨으니, 모두 자중해 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제갈공민은 뒤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제갈공민의 말처럼 무림세가의 소속이 아닌 다양한 문파의 구성원들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무당파의 현문.
화산파의 서재오.
개방의 홍칠개 등 무림명숙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이 참관인 자격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제갈공민의 말뜻은 무림세가가 거대 문파에게 얕보일 일을 만들지 말란 말이었다.
그 무림명숙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강남 사도련의 주인인 독고진이었다.
사실 독고진도 무가지회의 참관인으로 자리에 앉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번 무가지회 자체가 사파의 타도를 외치며 만들어진 자리였다.
그런 자리에 강남 사파의 수장이 이렇게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은 모두에게 낯설었다.
하지만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암제와 금선이 벌인 세가 말살 계획은 독고진에게도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강북 사도련 중 얼마만큼의 인원이 저들에게 포섭당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곳에 머물며 최대한 정보를 캐내는 것이 자신이 할 일이라는 것을 독고진을 알고 있었다.
물론 독고진이 이렇게 자리한 것에 대해 모두는 환영했다.
적이 생기면 뭉치는 것이 강호인의 도리이니까.
암제와 금선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어떤 위협이 남아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용봉지회가 끝나고 나면 무림세가의 대표들과 사도련주인 독고련은 잠시 회합을 가질 예정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얽히는 가운데, 제갈공민이 다시 말을 이었다.
“위씨세가와 사천당가의 첫 번째 대결을 시작하겠소.”
말을 마친 제갈공민은 비무대의 가장자리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들의 비무를 기대하는 이는 없었다.
역시나 사천당가의 당세령은 한 발 앞으로 나와 하북팽가가 있는 쪽으로 포권했다.
“사천당가의 당세령은 이번 대결을 포기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당세령은 조용히 돌아섰다.
그때였다.
위지약이 하북팽가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포권했다.
그러고는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저는 포기 안 하겠어요. 그게 같은 십대세가 간의 예의라고 생각해요. 저는 최선을 다해 싸우겠어요. 그런데 상대가 없으니…….”
그녀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위지약이 바라보고 있는 곳에서는 제갈공민이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제갈공민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위지약이 넌지시 물었다.
“군사님, 위씨세가의 승리 아닌가요?”
재촉하는 그녀의 모습은 얄밉기까지 했다.
위씨세가를 따라 하북팽가에 등을 돌렸던 중소 문파들까지 웅성대기 시작했다.
“저건 아니지 않나?”
“잠깐, 하남정가에 서문세가 그리고 황보세가까지 검을 내려놨으니…….”
“지금 사천당가도 포기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이건 땅 짚고 헤엄치기가 아닌가?”
“땅 짚고 헤엄치기는 아니지. 생각해 보게. 산동악가에는 악비광이 있고 하북팽가에는 팽혁빈이 있지 않은가? 그 둘이면 위씨세가에 꿀릴 게 없지 않은가?”
“그게 아니지. 하북팽가에는 팽혁빈밖에 없고 산동악가에는 악비광밖에 없는 거라고 해야 정확할 걸세.”
“그게 무슨 말인가?”
“오전에 대회 규칙이 바뀌지 않았는가?”
“바뀌다니?”
“승자가 계속 남는 방식이 아니기에 대진 운이 중요하지.”
“흠, 그렇다면…….”
“악비광이나 팽혁빈이 승리하더라도 나머지 대결에서 패배한다면 승리는 위씨세가가 가져갈 것일세. 더 중요한 것은 다음 비무가 산동악가와 하북팽가의 대결이 아닌가?”
“그럼 위씨세가는 한 번만 이기면 되겠군.”
“그럼 용봉지회의 승리자는 위씨세가가 되는 게 아닌가? 이건 조금…….”
“약속은 약속이니 십대세가의 수장은 위씨세가에서 나오겠군.”
그의 말대로 용봉지회의 우승자가 십대세가의 수장을 정하기로 한바.
현재 상태로는 위씨세가의 가주가 차기 십대세가의 수장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좌중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비무대 위를 바라봤다.
비무대 위에서는 제갈공민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상황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위씨세가 중 누군가가 계략을 짠 것이 분명했다.
이번 용봉비회가 끝나면 가장 먼저 조사받아야 할 것이 위씨세가였다.
그런데 그들 중에 십대세가의 수장이 나온다면?
그때 다시 위지약의 목소리가 비무대 위에 울렸다.
“군사님, 공평한 판정을 부탁드립니다.”
“그럼…….”
막 판정을 내리려던 제갈공민이 반대쪽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가장 당황하고 있어야 할 당세령이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웃음을 참고 있는 표정이었다.
제갈공민과 시선이 마주친 당세령이 말을 이었다.
“저는 포기했지만, 사천당가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게 무슨 말인가?”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죠. 사천당가의 당세령이 포기한다고요. 사천당가에는 두 명의 참가자가 남아 있습니다.”
말을 마친 당세령은 비무대 아래를 가리켰다.
제갈공민은 조금 전 당세령의 말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니 분명 가문이 아닌 개인이 포기한다는 표시를 했었다.
앞서 가문들이 줄줄이 포기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당세령의 표현을 개인이 아닌 가문의 입장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제갈공민은 당세령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설화와 청화가 눈을 빛내며 앉아 있었다.
순간 제갈공민은 헛숨을 삼켰다.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법을 구사하는 아이였고.
다른 하나는 공독지체에 이른 아이였다.
위씨세가의 후기지수들이 범접하지 못할 아이들이었다.
제갈공민은 고개를 돌려 모두를 바라보며 말했다.
“양쪽 세가에서는 다음 참가자를 올려 보내 주시오.”
“헉.”
위지약이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재빨리 제갈공민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따지듯 말했다.
“포기한다고 했잖아요?”
“흠, 정확히 개인이 포기한다는 거지 가문의 입장이 아니었네. 그것은 여기 모두가 증인이고.”
제갈공민은 고개를 돌려 좌중을 바라봤다.
제갈공민이 좌중을 바라보자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위지약이 힐끔 비무대 아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하세요.”
말을 마친 위지약은 비무대에서 내려왔다.
위지약이 내려오자 위씨세가의 다음 참가자가 올라왔다.
올라온 위씨세가의 무사는 직계는 아니지만, 위씨세가의 후기지수 중 위지천 다음으로 강한 무사인 위지옥이었다.
위지약은 시선이 마주친 위지옥을 향해 입 모양으로 말했다.
“빨리 끝내.”
“네, 알겠습니다.”
위지옥이 말했다.
비무대로 올라간 위지옥은 적잖게 당황했다.
위지옥의 앞에는 조금 어려 보이는 소녀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위지옥은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흠.”
그 소리에 반대편에 서 있던 소녀는 시선을 돌렸다.
위지옥은 웃음을 겨우 참았다.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소녀를 상대로 어떻게 검을 휘두를 수 있겠는가?
위지옥은 위지약이 빨리 끝내라고 한 말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기권하고 내려갈 생각으로 아무나 참가 명단에 넣은 것 같았다.
세가의 일원이라면 아무나 넣어도 관계없으니 말이다.
그때였다.
제갈공민이 소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 눈빛은 상당히 초조해 보였다.
그 눈빛은 제갈공민의 진심이었다.
지금 올라온 소녀는 설화.
제갈공민은 설화와 청화의 활약은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지금 하나였다.
“부탁이 하나 있다.”
“뭔데요? 군사 아저씨.”
“죽이지는 말아라. 그렇게 되면 골치 아파진다.”
“그럼 반만 죽이는 건 괜찮죠?”
“나는 이번 비무에서 살심을 지워 줬으면 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군사 아저씨.”
설화가 해맑게 웃자 제갈공민은 한숨을 쉬며 자리로 돌아왔다.
그 모습에 위지옥은 속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마도 기권할 것을 권하다가 설득에 실패한 모습이었다.
위지옥은 재빨리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설화에게 포권했다.
“나는 위씨세가의 위지옥이라 하오! 내 검은 운중산의 무쇠로 만든 낙월검이오. 또한 별호는 낙월일검이라오. 떨어지는 달빛도 내 검에 반 토막이 난다오.”
기세등등한 위지옥은 자신의 별호까지 자랑스럽게 외쳤다.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한 설화가 말을 이었다.
“저는 사, 사천당가의 설화라고 해요.”
설화는 사천당가가 입에 안 붙는지 살짝 더듬었다.
그 모습에 비무대 아래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설화의 천진난만한 모습 때문에 본능적으로 터진 웃음이었다.
모두가 웃자 설화가 심호흡하면서 말을 이었다.
“별호는 설산신녀예요.”
“설산신녀?”
위지옥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도 잠시, 그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맺혔다.
설산신녀라는 별호가 마치 아이들의 놀이에서나 나올 법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비무장 아래가 웅성대기 시작했다.
“지금 설산신녀라고 했어?”
“그래, 자네 왜 그러나?”
“내가 무가지회에 조금 늦게 도착하지 않았나?”
“그렇지. 그런데 왜 그러나?”
“사천의 나루터에서 설산신녀라는 신진 고수를 본 적이 있어서 그렇다네. 그러고 보니…….”
그는 비무대 위를 가리키며 말끝을 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