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 십대세가의 수장 (3)
하북팽가 쪽을 바라보던 남궁무성이 말을 이었다.
“남궁세가를 대표해서 하북팽가에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그는 정중히 포권했다.
순간 단상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용봉지회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것이 정도를 지키는 일이었다.
그 분위기는 전염병처럼 번져 나갔다.
한빈의 구조에 등을 돌렸던 이들도 비무대 위의 경건한 모습에 침묵을 지켰다.
다만, 위씨세가의 일원 중 몇은 눈을 빛냈다.
그들은 위씨세가의 위지천과 위지약이었다.
위지약이 그녀의 오라비인 위지천에게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라버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자중해야 한다.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우리도 비무를 양보해야 할 듯싶구나. 앞으로의 일은 나중에 의논하자꾸나.”
위지천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작았다.
그는 위씨세가가 지금은 몸을 사려야 할 때임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위지약은 상체를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 이건 우리에게 기회예요.”
“기회?”
“생각해 보세요. 금와 상단의 상단주가 죽긴 했지만, 우리 가문과 관계가 있는 게 언제 밝혀질지 모르잖아요.”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금와 상단이 다른 어떤 가문보다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위씨세가였다.
금와 상단의 도움으로 이번 용봉지회에서도 득을 볼 것으로 생각하고 득의만만했던 것이 바로 엊그제까지의 일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상황이 바뀐 것이다.
위지천이 재빨리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쉿.”
“어차피 듣는 사람은 없어요. 전부 우리 가문 사람들이잖아요.”
위지약은 슬쩍 눈짓하며 그들을 둘러싼 가문의 무사들을 가리켰다.
위지천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위지약을 바라봤다.
동생의 태도가 생각보다 철두철미했기 때문이었다.
위씨세가의 무사들은 위지천과 위지약의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위지천이 물었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이냐?”
“그러니까…….”
위지약은 눈매를 좁히며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그들의 주변에 두 쌍의 눈동자가 빛을 내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한 채.
* * *
잠시 후.
서문세가와 하남정가의 대결도 똑같은 양상으로 끝났다.
서문세가와 하남정가의 대표가 비무대 아래를 향해 포권을 하며 내려갔다.
제갈공민은 나머지 비무는 잠시 휴식을 취하고 진행할 것을 선포했다.
이제 네 가문의 비무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좌중은 남은 비무를 기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남은 가문들도 하북팽가에 양보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김빠진 비무지만,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지켜야 할 마지막 강호의 도리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모두는 각 가문의 처소로 돌아가 잠시 휴식을 취했다.
지금 비무대 주변에는 무가지회의 주최자인 사천당가만이 남아 있는 상황.
그들은 누가 비무의 대표로 나갈 것인지에 대해 상의하고 있었다.
당광현이 당무천을 바라봤다.
“누가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버님.”
“기명이, 아니 세령이가 나가도록 하여라.”
“네?”
당광현이 눈을 크게 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장을 하고 다니던 당세령이었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은 당무천도 허락한 일.
하지만 당가를 대표로 비무대 위에 오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가문의 새로운 얼굴에 모두가 소곤댈 것이 분명하고 사천당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한동안 논란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당광현의 표정을 본 당무천은 말을 이었다.
“광현아.”
“네, 아버님.”
“언제부터 사천당가가 남의 눈치를 봤느냐?”
“…….”
당광현은 아무 말도 못 했다.
그 모습에 당무천이 손가락으로 깃발 하나를 가리켰다.
“저것을 보아라.”
당무천이 가리킨 것은 사천당가의 깃발이었다.
깃발에는 용과 싸워도 지지 않을 것 같은 뱀이 그려져 있었다.
당광현은 깃발을 보고 입을 벌렸다.
당무천의 말뜻을 알아챈 것이다.
강호인 대부분은 사천당가의 깃발만 봐도 자리를 피했다.
강호인에게 사천당가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사천당가에서 나오는 암기와 철 그리고 약은 강호인에게 필수품이기에 그 관계를 끊을 수는 없었다.
가까이하고 싶지만 두려운 대상,
그것의 사천당가였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사천당가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 들어 상황이 바뀌었다.
당무천이 원인 모를 병에 쓰러지고 이번과 같은 일을 겪다 보니,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속담이 강호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런 조심스러운 마음이 사천당가에 스며든 것.
당무천은 그런 나약한 마음에 일침을 가한 것이다.
당광현이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사천당가의 위엄을 보이겠습니다. 사천당가는 앞으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겠습니다.”
“그래, 잘 알아들었구나. 그런 마음으로 가문을 이끌 거라.”
“아버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무가지회가 끝나면 네가 사천당가의 가주다.”
“아버님!”
당광현은 다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둘의 대화를 듣던 나머지 사천당가 식솔들도 모두 눈을 크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가주 당무천은 본래 욕심이 많은 이였다.
그 욕심이 사천당가를 십대세가 중 으뜸으로 올려놨고 말이다.
모두가 놀라고 있을 때 당무천이 손을 저었다.
“나는 이제 늙었다. 지금부터는 손주들의 재롱이나 보면서 쉴 터이니 아무 말 말아라.”
“벽을 넘으신 것이 엊그제인데 뒤로 물러나시면 저희는 어떻게 합니까?”
당광현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백 년 만에 두 번째로 만독지체를 넘어서 공독지체를 이룬 무인이 바로 당무천이었다.
그런데 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하다니, 가문의 처지에서 보면 청천 날벼락이었다.
당황한 당광현의 모습에, 당무천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천당가의 가주가 될 사람에게 그런 자신 없는 표정을 어울리지 않는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다만, 저는…….”
“내가 완전히 물러나겠다는 것은 아니다. 가주 자리에서 물러나면 마음속의 독을 갈고닦을 것이야. 지금의 성취를 정리하려면 가주직을 맡으면서는 불가능하다. 네가 가주직을 잘 수행해 준다면 우리 가문은 백 년 만에 최대 전성기를 맞게 될 것이야.”
“…….”
당광현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손주들의 재롱을 본다는 것은 표면적인 이유였고 당무천은 독인으로서의 욕망을 나타내고 있다.
조용히 당무천을 바라보던 당광현이 한쪽 무릎을 꿇고 포권했다.
“가주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뒤쪽의 다른 식솔도 조용히 무릎을 꿇고 포권했다.
“존명.”
“존명.”
그들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주변의 분위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그들은 이번에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강호는 약육강식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정진해야 했다.
당무천이 공독지체의 마지막 깨달음을 얻게 되면 그때가 바로 중원의 가장 높은 곳에 사천당가의 깃발을 세우는 날이 될 것이었다.
당광현은 이를 꽉 깨물었다.
울분을 참은 것이 아니라 터져 나오는 희열을 남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모습에 당무천이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마.”
“말씀하십시오, 아버님.”
“내가 이번에 깨달은 게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내가 강하지 못하면 강한 자를 곁에 두라는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바로 대답하는 것을 보니 너도 이번에 느낀 점이 많았구나.”
“네, 그렇습니다. 팽가의 사 공자가 아니었으면 우리 가문은 강호에서 지워졌을지도……. 앗, 죄송합니다.”
“아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격난을 피해 갔지. 그게 중요한 거란다.”
말을 마친 당무천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가주전에서부터 사천당가의 담장까지 이어진 움푹 파인 선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진천뢰가 터지면서 땅이 가라앉은 자국이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저곳에 묻힌 하북팽가의 사 공자를 기억 속에서 지울 수는 없었다.
당무천은 시선을 돌려 당세령을 바라봤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살아 있다면 당세령과 이어 주려 내심 결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지나간 일이었다.
그때였다.
당무천의 뒤쪽에서 두 개의 신형이 나타났다.
사사삭.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광현을 비롯한 사천당가 무사들은 재빨리 암기를 꺼냈다.
두 개의 신형은 당무천의 뒤쪽으로 숨어들었다.
순간 당광현과 사천당가 무사들은 살기를 피워 냈다.
반원을 그리며 당무천의 뒤쪽으로 숨어든 신형을 향해 암기를 날리려는 순간.
당무천이 손을 슬며시 들었다.
“모두 경계를 풀어라.”
“아버님, 조심…….”
당광현은 말을 잇지 못했다.
두 소녀가 당무천의 뒤쪽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었기 때문이다.
물론 두 소녀는 설화와 청화였다.
당무천은 몸을 돌려 설화와 청화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둘을 동시에 안아 들었다.
한쪽 팔에 하나씩 둘을 번쩍 안아 든 당무천은 미소를 피워 냈다.
“손녀들 왔느냐?”
“네, 할아버지.”
청화가 배시시 웃으며 당무천을 바라봤다.
“…….”
설화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뭔가 적응이 안 되는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무천은 반 시진 전에 설화에게 제안을 했었다.
그 제안은 청화와 마찬가지로 설화도 자신의 손녀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새로 가족을 찾은 청화가 부럽긴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진정한 가족이 아니었다.
물론 진짜 부모가 누군지는 모른다.
그저 흑천의 주인을 친아비처럼 알고 자라 왔을 뿐이었다.
어정쩡하게 안긴 설화를 본 당무천이 말했다.
“친할아비라 생각하거라.”
친근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웃는 당무천.
그 모습에 설화가 눈을 끔벅였다.
당무천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둘을 땅에 내려놨다.
당무천이 설화를 대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친자매처럼 지내는 설화를 잡아야 청화의 마음도 잡아 놓을 수 있다는 것이 당무천의 생각이었다.
물론 그런 전략적인 생각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청화를 돌봐 준 설화에게 보답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물론 이런 광경을 본 당광현과 사천당가의 무사들은 까무러칠 듯이 놀랐다.
당광현과 그 옆에 있던 당세령은 입을 떡 벌린 채 다물 줄을 몰랐다.
그것은 당무천의 표정 때문이었다.
저리 자애로운 표정은 당광현도 당세령도 생전처음 봤다.
놀람도 잠시, 당광현은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변화의 시작일지도 몰랐다.
그때 청화가 나지막이 당무천을 불렀다.
“할아버지, 부탁이 있는데요.”
“부탁이라……. 말해 보아라.”
“언니와 저도 이번 비무에 나가도 되나요?”
“비무라…….”
“지금 진행되고 있는 용봉지회요.”
“흠.”
당무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당광현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청화야. 네가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우리 사천당가는 앞서 비무대에 오른 가문들처럼 기권할 것이란다. 덕분에 대표로 세령이만이 오를 예정이고 말이다.”
“그럼 잘됐네요. 저희도 나가게 해 주세요. 한 번이라도 비무대에 오르고 싶어서 그래요.”
청화가 투정 부리듯 말하자 당광현이 난처한 듯 당무천을 바라봤다.
시선을 받은 당무천은 재미있다는 듯 청화와 설화를 바라봤다.
둘을 번갈아 보는 당무천의 눈빛에는 자애로움은 사라지고 호기심만이 남아 있었다.
“너희의 눈빛을 보자니 계획이 있는 것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