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4. 십대세가의 수장 (2)
당무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
긴 한숨에 모두가 당무천을 바라봤다.
당무천은 고개를 작게 저었다.
누가 봐도 절망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제갈공민이 물었다.
“그렇게 심각합니까?”
“사 공자를 구출하는 것은 뒤로 미뤄야 할 것 같네.”
“그렇다면?”
“만독 비고와 연결되어 있다면…….”
“말씀하시지요.”
“만독 비고에 있던 독물이 저곳으로 떠내려왔을 수도 있는 일. 그 독물을 만지는 이가 있다면 한 줌 핏물로 변하는 자도 생길 것이네.”
당무천의 말에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그때였다.
광개가 앞으로 나섰다.
“저희 개방이라도 나서겠습니다.”
“저희 산동악가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악비광도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들의 모습에 당무천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저 아이가 특별하다고 해도 저곳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을 터야. 그러니 일단 상황을 보세.”
말을 마친 당무천은 낮게 한숨을 토했다.
그때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공영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그깟 독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네,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몇 번씩이나 구원을 받고도 이렇게 손을 놓고 있으면 그건 정파, 아니 사람이 아니죠.”
제갈공려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때부터였다.
여기저기서 비슷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도 돕겠습니다.”
“우리 가문도 돕겠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그들의 목소리에 당무천은 혼잣말을 뱉었다.
“좋은 친구들을 뒀구나…….”
당무천은 조용히 하늘을 바라봤다.
구조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결코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한다는 틀에 박힌 논리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당무천이 보기에 한빈은 결코 ‘소(小)’가 아니었다.
다만, 무너져 내린 바닥을 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독도 독이지만, 무너져 내린 바닥을 보니 저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자는 결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삼류 무사든 화경의 고수이든 똑같았다.
자연의 무게를 이길 수 있는 인간은 없을 테니까.
하늘을 바라보던 당무천은 시름을 털어 내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때 당무천의 눈에 이상한 모습이 들어왔다.
한빈의 시녀인 설화의 모습이었다.
설화는 종이를 펼쳐 놓고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당무천의 손녀인 청화는 그 옆에서 열심히 먹을 갈고 있었다.
당무천은 조심스레 그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먹을 갈던 청화가 물었다.
“언니! 언제까지 갈아야 해요?”
“조금만 더 갈아, 거의 끝났으니까. 참, 저기 끝에 있는 가문 이름이 뭔지 알아볼래?”
“저기요?”
“그래, 저기 있는 가문이 어딘지 정확하게 알려 줘.”
“네, 알았어요.”
“그럼 부탁할게.”
설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청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청화는 눈매를 좁히며 설화가 말한 곳으로 걸어갔다.
그때 그녀의 앞을 당무천이 막아섰다.
“어딜 그렇게 가느냐?”
“아, 설화 언니가 부탁한 게 있어서요…….”
살짝 말끝을 흐린 청화는 당무천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당무천이 물었다.
“왜 그러느냐?”
“저기 몰려 있는 가문 아세요?”
“저건 운남의 신씨세가가 아니더냐? 그것을 왜 묻느냐?”
“그건 비밀이에요, 할아버지.”
“비밀이라고?”
당무천이 눈을 크게 떴다.
딱 봐도 한빈의 영향을 받은 말투였다.
가족을 닮아야 하거늘…….
당무천은 고개를 돌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한빈의 흉내 낸 말투로 답하는 청화를 보니 갑자기 가슴이 저며 왔다.
그때 청화가 해맑은 표정으로 답했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청화는 고개를 살짝 숙인 뒤 쏜살처럼 설화에게 돌아갔다.
정보를 전해 받은 설화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다시 붓을 잡았다.
스스슥.
설화가 잡은 세필이 종이 위를 누볐다.
설화는 매의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묘한 설화의 모습에 당무천의 호기심은 더욱 치솟았다.
당무천은 일에 열중하고 있는 설화와 청화의 옆으로 다가갔다.
둘은 당무천이 왔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비밀이라는 청화의 말과는 다르게, 그들은 종이를 활짝 펼쳐 놓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종이는 두 장이었다.
한쪽에는 눈에 익은 가문들이 적혀 있었다.
대부분이 천하 십대세가였다.
거기에 더해 사람들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광개를 비롯한 한빈과 평소 알고 지내던 이들의 이름이 쫘르륵 나와 있었다.
당무천은 다른 쪽의 종이를 바라봤다.
그 종이에 적힌 가문 중 가장 유명한 가문은 위씨세가였다.
당무천은 눈을 크게 떴다.
그 종이에 적힌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대체…….”
당무천이 혼잣말을 뱉자 설화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그래, 그런데 지금 그것은 왜 적고 있느냐?”
“우리 공자님이 이거 적어 놓으라고 했어요. 힘들 때 아군과 적군이 명확히 구별된다고요.”
“그렇구나. 후.”
당무천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설화는 적과 아군을 나누고 있었다.
당무천도 오늘의 일을 머릿속에 똑똑히 기억해 두고 있었다.
위씨세가를 비롯한 나머지 무림세가를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과 아군을 구분해서 종이에 적고 있는 것은 이해가 안 되었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세상을 떠난 지금, 저런 명단은 그저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다.
한숨을 쉬던 당무천이 설화를 바라봤다.
“다 적고 나면 내게 주거라. 내가 은원을 확실히 마무리 지어 주마.”
“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할아버지.”
“너희들의 공자 대신 내가 손을 써 주겠다는 말이다.”
“왜 우리 공자님 대신 할아버지가 손을 써요? 혹시…….”
설화가 눈매를 좁히자 당무천이 답했다.
“그 아이가 못 하니 내가 대신해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요. 우리 공자님이 왜 못 하냐고요?”
설화가 눈을 반짝이자 옆에 있던 청화가 끼어들었다.
“할아버지, 혹시 우리 공자님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청화의 질문에, 당무천은 다급하게 헛기침했다.
“흠, 그런 건 절대 아니다.”
당무천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그제야 청화의 표정이 풀어졌다.
설화도 가늘게 떴던 눈을 원래대로 돌렸다.
당무천은 둘의 모습에 고개를 돌렸다.
설화와 청화는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당무천은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겨우 참았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상상 속에서 헤매는 것처럼 보이는 설화와 청화가 너무 안쓰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당무천은 조용히 자리로 돌아갔다.
그때 중소문파 무사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였다.
“다행이네.”
“그래, 다행이지. 급해서 서약서에 손도장을 찍긴 했지만, 그건 조금 과한 요구였지. 그 계약서도 저렇게 땅속에 묻혔으니…….”
“쉿, 누가 듣네.”
그들은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그들의 대화에 당무천은 혀를 찼다.
정파의 기강이 무너진 것을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정파가 무엇이던가?
정(正)이란 올바른 길이다.
이익 앞에서는 정파를 내세우고.
뒤에서는 사파만도 못한 모습을 보인다면 정파라는 이름이 왜 필요하겠는가?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던 당무천은 펄쩍 뛰어서 쓰러진 탑 위로 올라갔다.
그 위에서 아래를 내려보던 당무천은 내공을 담아 외쳤다.
“오늘 일은 마무리하겠네!”
그의 외침에 무림세가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어떤 이는 아쉬움의 탄성을.
어떤 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무천은 남궁장천을 바라보며 눈짓했다.
당무천이 내려가고 남궁장천이 탑 위로 올라왔다.
남궁장천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무가지회를 마무리 짓는 일이었다.
남궁장천은 자신의 모든 기세를 담아 외쳤다.
“내일 용봉지회를 마무리하겠소! 용봉지회의 본선에 참가할 세가들은 내일 정오까지 연무장으로 모여 주시기 바라오!”
그 말에 모두가 눈을 빛냈다.
그들이 맞이했던 재앙은 이미 과거의 일.
이제는 미래를 준비해야 할 때였다.
* * *
다음 날 오전.
사천당가의 비무대에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많은 인원이 모여들었다.
모여든 사람들은 아무 흔적도 없이 정리가 끝난 비무대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허, 역시 사천당가군.”
“그러게 말일세. 몇 시진밖에 안 났는데 이렇게 복구하다니 놀랍군.”
“그러게 말일세.”
그들은 사천당가의 일 처리에 혀를 차고 있었다.
간밤에 비무대 주변은 생각지도 못할 만큼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비무대에서 멀리 떨어졌던 전각 중 일부는 반파된 곳도 있었고 비무대 주변에는 돌덩이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행사를 진행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완벽하게 정리된 것이다.
이전에 있던 석판 대신에 어디선가 대문을 떼 온 듯한 거대한 나무판자가 비무대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결선 비무에 참가할 가문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황보세가.]
[남궁세가.]
[하남정가.]
[사천당가.]
[서문세가.]
[위씨세가.]
[하북팽가.]
[산동악가.]
전부 십대세가의 일원들이었다.
모두가 명단을 보고 있을 때, 제갈공민이 비무대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그는 주변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무가지회의 가장 중요한 행사인 용봉지회를 이제 마무리하고자 하오. 권각술만으로 진행했던 예선과는 달리, 이번 본선에서는 자신의 병장기를 사용할 수 있으니 해당 세가의 무사들은 미리 자신의 병기를 확인하기 바라오.”
말을 마친 제갈공민은 뒤를 돌아 명단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첫 번째 비무를 행할 황보세가와 남궁세가의 무사들은 비무대로 나와 주시오!”
제갈공민의 외침에 황보세가의 황보견우가 가볍게 비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그의 맞은편에는 남궁세가의 남궁무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남궁무성은 남궁세가의 넷째.
남궁세가의 넷째가 이렇게 비무대로 나온 것은 남궁세가의 비극이었다.
첫째는 오해를 받아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그 첫째를 셋째가 쫓고 있는 상황.
용봉지회의 비무를 이끌던 둘째는 간밤에 가문의 배신자라는 것이 밝혀져 현재 사천당가의 뇌옥에 감금된 상태였다.
그런 이유로 넷째인 남궁무성이 나왔으니.
이를 지켜보던 구경꾼들도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비무대 위에 선 황보견우와 남궁무성을 바라보던 제갈공민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남궁세가와 황보세가의 무사는 이 비무에서도 권각술을 쓸 텐가?”
제갈공민은 둘을 번갈아 보았다.
아무리 봐도 그들은 자신들의 병기를 들고 올라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황보견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이 비무를 포기하겠습니다.”
“저도 이 비무를 포기하겠습니다.”
남궁무성도 상대를 바라보며 포권했다.
그 모습에 제갈공민이 물었다.
“포기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 질문에 황보견우가 고개를 돌려 제갈공민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예를 취했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여기에 올라왔다면 과연 이길 수 있는 후기지수가 있었겠습니까?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 대신에 이 비무의 승리를 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 같습니다.”
황보견우는 말을 마치고 비무대 아래를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황보세가의 가주인 황보만청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것은 황보견우가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
물론 황보만청도 흔쾌히 허락했다.
강호의 도리를 세우기 위해서는 십대세가가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진심이었다.
그때 남궁무성도 제갈공민을 향해 말했다.
“저도 포기하겠습니다. 황보 소협의 뜻에 저도 동참하는 바입니다.”
남궁무성은 조용히 몸을 돌려 하북팽가의 구성원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