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 십대세가의 수장 (1)
천급 구결을 시전한 한빈은 눈을 크게 떴다.
‘뭐지?’
이유는 간단했다.
몸에서 한 점의 내공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지사지를 떠올린 순간 한빈의 단전은 망망대해에 쓸쓸히 떠다니는 나룻배처럼 공허해졌다.
원래 있던 본신의 내공까지 이렇게 사라지다니!
그때 암제가 날린 만월이 여의주를 문 용처럼 날뛰며 다가왔다.
해일처럼 거대했던 기세가 점점 줄어든다.
다가오면 올수록 잔잔해지는 만월.
마치 거대한 호수에 떨어진 조약돌 같다.
‘아.’
한빈은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화룡점정이라는 초식의 비밀을 알 것만 같았다.
그것은 맑은 물 위에 먹물을 떨어뜨리는 것과 같았다.
먹물을 머금은 물은 과연 맑은 물일까? 먹물일까?
화룡점정은 그렇게 상대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초식이 분명했다.
아무것도 아닌 점으로 생각하면 절대 안 되었다.
저 작은 점과 맞붙는 순간 그 위력은 생각지도 못하게 더욱 커질 테니까.
하지만 한빈은 조용히 용린검을 내밀었다.
거대한 용도 망망대해를 모두 삼킬 수는 없는 법.
화룡점정이 용린검의 끝에 닿더니 사라졌다.
스르륵.
거센 기세도.
잠잠한 기세도.
그 어떤 흔적도 주변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순간 만월이 갈 곳을 잃고 나뭇잎처럼 떨어진다.
휙.
한빈은 그 상태에서 잠시 멈춰 있었다.
어찌 보면 눈 깜짝할 사이였지만, 한빈의 몸에서는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빈은 천급 구결의 묘미를 온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망망대해가 되어 화룡점정을 흡수한 한빈의 신체는 본능적으로 초식을 분석하고 있었다.
어떤 혈도를 지나 기운을 증폭시켰는지.
어떤 기운을 이 초식에 담았는지.
그렇게 분석하다 보니, 구결마저도 머릿속에 각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한빈의 신체는 상대의 무공을 해석하고 있었다.
머리로 해석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의지와는 관계없이 본능적으로 화룡점정을 해석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암제의 화룡점정을 흡수했다고 하기보다는 그대로 맞았다고 하는 것이 맞았다.
신체가 무공을 해석하면서 느끼는 고통은 선대의 공격에 그대로 적중한 것과 같은 고통에 못지않았다.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쏴아악.
한겨울에 성난 서풍처럼 혈도를 누비는 용린의 기운.
문제는 평소보다 네 배는 빠르게 혈도를 타고 누볐다는 점이다.
마치 높은 곳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혈류가 급속도로 움직였다.
그 기운은 한마디로 칼날과도 같았다.
칼날이 온몸을 누비는 기분을 뭐라 말할 수 있을까?
한빈의 기분이 그랬다.
한빈이 고통에 익숙하지 않은 이라면 벌써 까무러쳤을지도 모르는 일.
그러나 한빈은 그것이 어떤 과정인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것은 화룡점정을 네 배로 증폭시키는 과정이었다.
쏴아악.
증폭된 기운이 한빈의 검 끝에 모인다.
하지만 그 기운은 한빈만이 느낄 수 있었다.
그 정도로 기운은 압축되었다.
화룡점정은 압축시키면 압축시킬수록 위력이 강해지는 검기의 결정체였다.
지금 한빈이 압축시킨 화룡점정은 암제 것의 사분지 일밖에 안 되는 크기.
그때였다.
한빈의 눈앞에 글귀가 나타났다.
[천급 구결을 최초로 사용하셨습니다.]
[용린검의 활성화가 시작됩니다.]
[용린검이 활성화되면 신검합일(身劍合一)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용린검이 활성화되는 도중에는 움직임에 제약을 받습니다.]
[천급 구결이 적에게 적중되면 용린검의 활성화가 완료됩니다.]
뭐지?
한빈은 검 끝을 바라보며 손아귀에 살짝 힘을 주었다.
‘헉.’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이것은 한빈도 예상 못 한 부작용이었다.
마치 만근의 무게 추를 달아 놓은 것처럼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한빈은 멀리 떨어져서 무릎을 꿇고 있는 암제를 바라봤다.
화룡점정은 모든 진기를 짜내어 펼친 초식임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천하의 암제가 저런 모습을 보일 리는 없었다.
한빈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지금의 부자연스러운 몸이라면 암제와의 승부는 보나마나였다.
용린검이 활성화되어 신검합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적에게 화룡점정이 닿은 후.
하지만 이대로라면 화룡점정을 암제의 몸에 적중시키는 것은 어려웠다.
암제가 만약 중간에 깨어난다면, 신검합일의 경지고 뭐고 이대로라면 목이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선택은 한빈이 해야 했다.
한빈은 이런 과정이 용린이 내리는 시험이라 생각했다.
용린검이 내리는 시련을 어떻게 통과할 수 있을까?
그때였다.
한빈의 머리 위로 타들어 가는 심지가 지나간다.
치지직.
앞에는 암제.
뒤에는 진천뢰.
거기에 몸은 용린검 때문에 제약을 받는 상태.
앞뒤가 막힌 상황이지만, 한빈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빛났다.
한빈은 움직임을 멈추고 몸을 살짝 떨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넋이 빠진 모습.
그러고는 올렸던 입꼬리를 내리고 입술을 살짝 떨었다.
그때 암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암제는 가늘게 눈을 뜨고 앞을 바라봤다.
암제가 보기에 한빈은 넋이 나가 있었다.
자신의 화룡점정을 막으려던 마지막 자세 그대로 굳어 있는 모습은 꼴불견이었다.
“흠.”
암제는 헛기침하며 입맛을 다셨다.
그의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한빈을 향해서 걸어갔다.
천천히 다가간 그는 한빈을 바라봤다.
넋이 나가 있는 눈빛.
살짝 떨리는 입술은 침이 마른 지 오래였다.
누가 보면 시체라고 해도 다름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암제는 용린검의 끝에 맺힌 거대한 기운을 알아채지 못했다.
암제는 한빈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너무 심했나 보군. 이렇게 형체만 남고 혼은 날아간 것을 보면 말이다.”
“…….”
한빈이 용린검을 내뻗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암제가 보기에는 석상이 되어 있는 모습.
암제의 미소는 더욱 진해졌다.
그는 곧 미소를 지우며 용린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용린검과의 거리는 불과 종이 한 장.
씰룩이던 암제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이제 내 것이다.”
그때였다.
한빈이 고개를 들었다.
“미끼였어.”
딱 한마디였다.
그 말과 동시에 용린검의 끝과 암제의 장신이 맞닿았다.
순간 한빈과 암제 사이에 거대한 기운이 일어났다.
그것은 태산과도 같은 형세였다.
위이잉!
그 기세가 암제의 장신으로 빨려 들어간다.
순간 한빈의 눈앞에 펼쳐진 글귀.
[천급 구결을 적중시켰습니다. 용린검의 활성화가 완료되었습니다.]
동시에 한빈은 재빨리 앞쪽으로 뛰었다.
한빈은 뒤쪽을 힐끔 바라봤다.
암제의 몸은 바람을 맞은 풍경(風磬)처럼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눈 코 입에서는 검은색 핏물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굉음이 통로의 저편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꾸아앙!
순간 통로의 입구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통로를 막고 있던 거대한 돌덩이가 조각되어 날아온다.
파바박!
순간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
휘이잉.
그와 동시에 통로의 곳곳에서 굉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쾅! 쾅! 쾅!
마치 악기를 연주하듯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폭발음.
그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었다.
하지만 한빈은 그곳을 벗어날 생각이 없는 듯 암제를 바라봤다.
그의 마지막은 두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암제는 이미 파편이 여기저기에 박혀 있었다.
모든 힘이 담긴 화룡점정의 힘의 네 배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거기에 뒤쪽에서 날아온 돌덩이에 맞은 암제의 모습은 사람의 몰골이라 할 수 없었다.
한빈은 눈매를 좁히며 재빨리 암제를 향해 달려갔다.
암제에게 달려간 한빈은 용린검으로 암제의 목을 날리려 했다.
‘뭐지?’
그러나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손에 들고 있던 용린검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빈은 왼손에 있던 월아를 횡으로 그었다.
휙!
털썩.
암제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그 모습을 본 한빈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그곳에 떨어진 만월을 주웠다.
만월은 암제의 죽음에 반응했는지 동그란 접시 모양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전리품을 놓칠 수는 없지…….”
말을 맺지 못했다.
폭음이 한빈이 있는 곳으로 점점 다가왔기 때문이다.
쾅! 쾅! 쾅!
소리와 함께 들이닥친 화기에 한빈은 재빨리 몸을 돌렸다.
* * *
같은 시각.
한빈이 들어간 입구를 중심으로, 땅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쿠쿠쿵!
하지만 대부분의 무림세가 고수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간밤에 일어난 일들은 그들로 하여금 이 정도의 폭음에는 담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몇몇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정의맹의 군사인 제갈공민이었다.
“대체 팽 공자는…….”
“모두 힘을 모아야겠구나.”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공영이 동생의 말을 재빨리 받았다.
그는 조용히 주변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 십대세가의 대표들이 모였다.
그때였다.
다시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쿠쿵.
쾅! 쾅.
그 흔들림은 잠깐 동안 계속되었다.
소리가 멈추자 제갈공민은 주변을 둘러봤다.
제갈공민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그 옆에 있던 십대세가의 대표들도 눈을 크게 떴다.
금선이 만든 폭발이 전각을 무너뜨렸다고 한다면 지금의 폭발은 바닥을 바꿔 놨다.
바닥은 어른 한 명의 신장만큼 움푹 파여 있었다.
그런데 그 길이가 문제였다.
가주전에서부터 시작된 흔적은 저 멀리 담장 너머까지 길게 뻗어 있었다.
주변을 바라보던 제갈공민이 재빨리 외쳤다.
“다들 저 통로 속에 묻혀 있을 팽 공자를 구합시다!”
그 말에 무림세가의 사람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물러나다 보니 진영은 반으로 갈렸다.
한쪽은 십대세가를 중심으로 한 한빈의 지인들이었고 나머지는 중소 문파들의 무리였다.
묘한 것은 강남 십대세가 중 하나인 위씨세가는 중소 문파의 무리에 섞여 있다는 것이었다.
제갈공민은 뒤쪽으로 물러난 무리를 쏘아봤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그때 위씨세가의 무리 중에서 여인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위씨세가의 위지약이었다.
다른 이들이 말릴 틈도 없이 앞으로 나선 것이다.
그 여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제갈공민을 바라봤다.
새파랗게 젊은 아이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제갈공민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위지약은 눈길을 피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지금은 한 명을 구하는 것보다 우리 무림세가의 안전을 도모하는 게 중요한 것 아닌가요? 여길 파다가 불발탄이라도 터지면 우린 어떻게 하죠? 그러지 않아도 오늘 밤 입은 피해가 큰데요.”
순간 중소 문파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 말이 맞소.”
“위씨세가의 말이 맞소.”
그 모습에 제갈공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를 구하기 위해 저곳으로 들어간 의인을 돕지 않는다면 우리가 정파라고 할 수 있겠소?”
“살아남아야 정파도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요?”
“…….”
제갈공민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대부분의 중소 문파 가주는 제갈공민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지금은 죽음의 굴이 된 저 통로로 암제를 유인했을 때만 해도, 은혜를 입었다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외치던 그들이었다.
그런데 모든 위험이 사라지자 저렇게 태도를 바꾼 것이었다.
입술을 달싹이던 제갈공민은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저들의 자율에 맡겨야 했다.
강압적으로 일을 시켜 봐야 효율은 오르지 않을 것이었다.
제갈공민이 외쳤다.
“나를 도와 팽 공자를 구할 사람은 이쪽으로……!”
그때였다.
누군가가 제갈공민의 앞으로 나왔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흑색 무복의 여인.
그녀는 심미호였다.
심미호의 등장에 제갈공민이 말했다.
“무슨 일이오?”
“주군이 말씀하시길, 어떤 일이 있어도 끼어들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게 대체…….”
“저 아래는 만독 비고와 연결되어 있다고 하셨어요.”
“그렇다면…….”
제갈공민은 고개를 돌려 사천당가의 가주인 당무천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