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 계가(計家) (9)
어둠 속에서 유리한 것은 분명히 자신이었다.
어둠 속에서의 시각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감각인 후각도.
모든 것이 자신이 위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감각이 모두 필요가 없었다.
한빈은 눈으로 직접 암제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암제의 등에서 일렁이는 구결 덕분이었다.
천급 구결은 어두운 숲속의 반딧불이처럼 통로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한빈은 오늘 반드시 암제를 처리할 생각이었다.
거기에 더해 한빈이 취해야 할 것이 있었다.
암제에게서 일렁이고 있는 천급 구결이었다.
한빈은 기척을 죽이고 암제를 향해 다가갔다.
암제가 무림세가의 주요 인물에 대해 암살을 할 것을 선포했지만, 오늘만큼은 한빈이 살수가 되어야 했다.
한빈은 재빨리 구결을 떠올렸다.
‘구걸십팔보.’
시간이 다 된 구걸십팔보를 보충하고.
‘전광석화.’
‘일촉즉발.’
한빈의 몸이 화살처럼 일직선이 되었다.
순간 용린검의 끝이 눈 깜짝할 사이에 암제의 등과 가까워졌다.
휙.
마치 화살이 날아가듯 대기를 가르며 한빈이 날았다.
팍!
순간 암제가 돌아섰다.
챙!
만월로 한빈의 용린검을 막아 낸 암제.
한빈은 재빨리 뒤쪽으로 한 걸음 물러난 뒤 초식을 바꾸었다.
‘성동격서.’
휙!
한빈의 용린검이 암제의 허리를 노리고 들어갔다.
챙!
암제가 아무렇지 않게 만월로 튕겨 내자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성동격서를 막았다는 것은 암제의 무위가 한빈보다 위라는 증거였다.
하지만 상대의 무위가 높아도 성동격서를 계속 펼치게 되면 다섯 번에 한 번은 적중시킬 수 있다.
문제는 성동격서 한 번에 오 년의 공력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성동격서로 상대를 꺾는다고 할지라도 목숨이 끊어지면 천급 구결은 물 건너갈 수밖에 없었다.
한빈은 재빨리 뒤로 세 걸음 물러나 초식을 바꾸었다.
‘쾌검난마.’
마(魔)를 상대로는 두 배 더 강한 검술을 펼칠 수 있는 용린검법의 초식, 문제는 암제에게서는 마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왜 이 초식을 택했을까?
그것은 한빈의 본능이었다.
챙!
챙!
암제는 계속 한빈의 공격을 막아 냈다.
하지만 한빈은 실망하지 않았다.
이것은 한빈이 원하는 방식의 싸움이었다. 암제는 이미 어느 정도 내공을 소모한 상태.
퇴로가 막힌 상태에서 이렇게 공방을 주고받다 보면 나가떨어지는 것은 암제가 될 터였다.
한빈은 편안히 구결을 획득하고 암제를 골로 보내면 되었다.
공격을 이어 나가던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쾌검난마를 쓰자 공격이 더 수월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암제가 설마 마교와?
챙.
챙.
한빈은 본능적으로 끊임없이 공격을 이어 나갔다.
* * *
위쪽에서 합격진을 이루고 있던 십대세가의 고수들은 망연자실 바닥을 바라봤다.
그들 중 제갈공영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휴…….”
그 한숨이 끝나가기도 전에 그는 몸을 기울였다.
그러고는 바닥에 귀를 갖다 댔다.
하지만 들리는 것은 없었다.
아래쪽 통로의 깊이가 꽤 깊다는 증거였다.
귀를 갖다 댔던 제갈공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하늘을 바라봤다.
“왜 세상은 영웅을…….”
그는 말을 맺지 못했다.
자신의 말에 혹여나 씨가 될 것을 두려워해서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제갈세가는 한빈에게는 너무 빚이 많았다.
이번까지 치면 벌써 세 번의 은혜를 입었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는 분명 동귀어진할 생각으로 저곳에 암제를 끌어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제갈세가의 가주인 자신이 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니!
제갈공영은 문득 자신이 먼지만도 못하게 느껴졌다.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보던 제갈공영은 자신의 검을 높이 치켜올렸다.
휙.
그 모습에 다른 무림세가의 고수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제갈공영은 검을 높이 든 상태에서 외쳤다.
“우리 제갈세가는 하북팽가에 은혜를 입었소이다! 그 은혜를 평생 갚을 것을 천지신명께 이 검을 걸고 맹세하겠소이다!”
그 말에 다른 무림세가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그냥 커진 것이 아니다.
그들의 눈에는 살짝 물기가 감돌았다.
생각해 보면 금선과의 결전에서 모두는 죽을 운명이었다.
그때 혜성처럼 나타난 것이 바로 하북팽가의 사 공자였다.
그런데, 지금 또 빚을 지게 되었다.
그때 산동악가의 악소천도 창대를 높이 들었다.
“우리 악가도 하북팽가에게 은혜를 입었소이다. 그 은혜는 꼭 갚도록 하겠소. 나도 천지신명께 맹세하는 바입니다.”
그때 그의 아들 악비광이 악소천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님, 너무 쉽게 약속하시는 건 아닌가요?”
“은혜를 입은 것은 사실이고……. 사 공자는 저 아래에서 운명을 달리 할 것도 분명하지 않느냐? 누군가가 내게 그런 은혜를 베풀었는데 어찌 정파의 일원으로서 동참하지 않을 수 있느냐?”
“사 공자는 멀쩡할 겁니다. 그건 제가 맹세합니다.”
“멀쩡했으면 좋겠구나.”
“그 인간은 그렇게 쉽게 당하지 않을 겁니다.”
말을 마친 악비광은 슬쩍 고개를 돌려 광개를 바라봤다.
광개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우 말이 맞소. 팽 공자는 분명히 살아 있을 것이오. 차라리 강호가 사라진다고 하는 것을 믿지, 그 인간이 죽는다는 건 믿지 못하겠소.”
말을 마친 광개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휘릭.
그 바람과 함께 신형 하나가 나타났다.
광개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홍칠개가 눈썹을 파르르 떨며 광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광개는 재빨리 다가가 홍칠개에게 포권했다.
“어르신, 오셨습니까?”
“대체 어찌 된 일이냐? 내 제자는 어디에 있느냐?”
“그게…….”
광개는 말끝을 흐렸다.
솔직하게 말했다가는 사달이 날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홍칠개의 얼굴을 일그러져갔다.
“빨리 말하지 않으면 너는 평생 나와 같이 다녀야 할 것이야.”
그 말에 광개의 눈이 커졌다.
광개에게는 최고로 두려운 말이었다.
만약에 홍칠개의 옆을 따라다니게 된다면?
신입 개방도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밤낮으로 홍칠개의 시중을 들어야 하며, 험한 일은 모두 광개의 차지가 될 것이 분명했다.
광개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어르신, 그러니까…….”
광개의 설명에 홍칠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홍칠개는 무림세가 고수들을 바라봤다.
“무림 동도 여러분, 내가 할 말이 있소.”
홍칠개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모두의 시선이 모이지 홍칠개가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
“강호에서 칼밥 좀 먹었다는 분들이 이게 무슨 경우인가? 새파랗게 젊은 아이가 목숨을 걸고 저기에 뛰어들 동안 보고만 있었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군. 이게 강호의 도리인가?”
“…….”
홍칠개의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누구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홍칠개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고도 정파를 자처할 셈인가? 정파가 사파와 다른 점이……. 아니 나은 점이 하나라도 있으면 말해 보게.”
홍칠개는 어딘가를 힐끔 바라봤다.
그곳에는 한빈의 초대로 온 사파의 독고진이 있었다.
독고진은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흠.”
홍칠개의 시선을 받은 독고진은 눈을 어디에 둘지 몰랐다.
사실 그가 한 번도 나서지 않은 것은 한빈의 부탁 때문이었다.
그저 증인으로만 있어 달라는 것이 한빈의 부탁이었다.
그런데 홍칠개의 말을 듣다 보니 그도 찔리는 구석이 있었다.
강호에서 칼밥 좀 먹었다는 자 중에는 자신도 속해 있었다.
거기에 그냥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한 사람 중에도 끼어 있었다.
그때였다.
너도나도 병장기를 높이 들었다.
이제까지 맹세를 하지 않았던 자들이 모두 맹세를 시작했다.
“……천지신명께 약속드립니다.”
“우리…….”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천지신명을 향한 서약.
독고진은 자신도 모르게 검을 높이 들었다.
그러고는 맹세를 시작했다.
그 모습에 홍칠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홍칠개는 제자가 걱정된 것은 맞았지만, 이토록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가 일장 연설을 늘어놓은 것은 왜일까?
모두 제자인 한빈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한빈은 땅길 수 있을 때 확 땅겨야 한다는 교훈을 일깨워 주고는 했다.
그것은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으라는 강호의 속담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홍칠개는 한빈이 한 번에 기회를 땅길 수 있게 도움을 준 것이었다.
목숨을 걸고 대표로 나섰으면 이 정도의 대가는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광개가 홍칠개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르신, 저도 찍었습니다.”
“찍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손도장을 찍었습니다.”
“손도장?”
“여기 보십시오.”
광개는 문서 하나를 내밀었다.
그 문서를 본 홍칠개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은 노예 계약서와 다름없는 불공정 계약의 표본이었다.
“대체 이것이 무엇이냐?”
“팽 공자가 통로를 지나가는 값으로 모두에게 이 각서를 받았습니다.”
“흠, 그런데 너는 나중에 도착하지 않았느냐?”
“여기서 결전을 구경하는 조건으로 찍었습니다.”
광개는 힐끔 어딘가를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심미호가 활짝 웃고 있었다.
홍칠개는 한숨을 쉬었다.
“휴.”
“왜 그러십니까? 어르신.”
“아니다.”
홍칠개는 손을 내저었다.
홍칠개는 자신이 제자를 너무 만만히 봤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자신의 제자인 한빈은 홍칠개가 챙겨 주지 않아도 알뜰살뜰 미리 자신의 몫을 챙기고 있었다.
홍칠개는 조용히 무림세가 고수들을 바라봤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홍칠개가 일침을 놓기 전부터 마음의 짐을 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 짐 중 일부를 덜어 낼 기회를 준 것이 바로 홍칠개의 일장 연설이고 말이다.
그것도 잠시, 모두는 하늘을 바라봤다.
그들은 하나같이 병장기를 경건하게 잡고는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천지신명께 한빈이 무사하기를 비는 모습이었다.
* * *
암제는 상대에게 묘하게 말려드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후각과 청각만으로 상대의 공격을 받아 내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는 마치 자신을 보고 공격하는 것만 같았다.
고개를 갸웃한 암제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했다.
동시에 뒤쪽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갑자기 뒤로 물러난 암제 덕분에 잠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멈췄다.
뒤로 물러난 암제의 모습에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였다.
암제의 왼손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화르륵.
그것은 삼매진화의 수법.
극양의 기운으로 불꽃을 일으킨 것이다.
그 불꽃 덕분에 주위가 환해졌다.
암제는 드디어 한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불과 다섯 걸음 정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한빈을 바라보던 암제가 고개를 갸웃했다.
상대가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할 수도 없는 공간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다면 유리한 것은 분명히 자신이었다.
그런데 상대가 웃고 있다고?
그 웃음은 더욱 진해졌다.
암제는 이 승부를 빨리 결정짓기로 했다.
그가 만월을 앞으로 뻗었을 때였다.
삼매진화의 수법으로 지속하고 있던 왼손 위의 불꽃이 갑자기 거세졌다.
“이게 대체…….”
암제는 말을 잇지 못했다.
투두둑.
마치 기름을 만난 불꽃처럼 왼손에서 불이 붙었다.
화르륵.
이건 삼매진화의 수법으로는 일으킬 수 없는 불꽃이었다.
문제는 불꽃이 점점 번진다는 것이다.
암제는 이게 무슨 조화인지 알 수 없었다.
순간 한빈이 암제가 일으키는 불꽃을 비집고 달려들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