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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380화 (380/621)

380. 계가(計家) (8)

암제는 아래로 내려오자마자 뭔가가 자신을 덮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피하지 않았다.

얇은 호신강기를 몸에 둘렀을 뿐이었다.

“이런 가소로운…….”

암제는 말을 잇지 못했다.

호신강기를 풀자 자신을 덮쳤던 액체가 옷에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이런 비겁한 놈!”

소리를 질렀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물체에서 독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고, 설령 그것이 독이라 할지라도 암제에게 문제는 되지 않았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후 웬만한 독은 범접하지 못하는 만독불침에 가까운 신체를 가지게 되었다.

암제는 어둠 속을 바라보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저벅저벅.

암제의 발걸음은 은밀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티를 내는 거 아닌가? 그러면 내가 공격하기에 너무 쉽잖아.”

그 목소리는 뒤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했고 앞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암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위쪽을 살폈다.

어둠 속이라서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이 통로에는 비밀이 있는 것만 같았다.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린 암제는 씩 미소를 지었다.

암제는 천장에 작은 관이 묻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상대가 원하는 바를 대충 깨달았다.

상대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하게 되면 자신의 위치만 노출시키는 법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먹잇감에 불과하다고 해도 맹수는 사냥에 신중을 기하는 법.

사실 조금 전 발소리도 상대를 유인하기 위해서 일부러 낸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의 수에 말려들지 않고 도리어 덫을 놓았다.

암제는 지금 상황이 기가 막혔다.

이건 강호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자의 모습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상대는 분명히 무림 초출이 분명했다.

동창 제독으로 변장하며 상대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본 암제였다.

강호의 정보는 개방으로 모이지만, 중원의 정보는 동창으로 모인다는 소문이 있지 않은가.

동창은 강호뿐 아니라 일반 백성과 황궁의 정보까지 모두 모이는 곳이었다.

암제는 덕분에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벌인 행적에 대해 모두 알 수 있었다.

하북 최고의 겁쟁이가 갑자기 천산혈랑을 잡고 가문에서 두각을 나타낸다라?

암제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하북 최고의 겁쟁이가 이렇게 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분명 그 검이 있으리라 확신한 것이다.

잠시 뒤면 그 검은 자신의 것이 될 것이었다.

이렇게 좁은 통로로 자신을 유인한 것은 분명 상대의 자충수였다.

자신이 왜 암제라 자칭했는지 알고 있다면 누구도 이런 악수를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암제는 일 년의 반을 캄캄한 통로에서 생활했었다.

누구보다도 어둠에 익숙한 것이 자신이었다.

암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만월을 움켜잡았다.

저벅저벅.

암제는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통로를 걸었다.

뚝. 뚝.

가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계속 어둠 속을 걷던 암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미세한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때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대범하군.”

그 말에 암제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분명 천장을 타고 온 소리였다.

암제는 위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호랑이가 소리를 죽이는 걸 봤느냐? 아이야.”

순간 암제의 목소리가 통로 전체에 울렸다.

암제의 예상이 맞았다.

내공에 실어 천장으로 목소리를 쏘아 내자 통로 전체에 그의 음성이 울렸다.

“호랑이도 먹잇감을 사냥할 때는 소리를 죽이지.”

“내가 너를 사냥하는 것으로 보이느냐?”

“지금 착각하는 것 같은데, 호랑이는 나고 너는 토끼야.”

말을 마친 한빈은 다시 기척을 지웠다.

암제는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찾아낸 것이었다.

암제는 기척이 아니라 미세한 소리를 감지해 낸 것이다.

암제는 만월을 그쪽으로 날렸다.

휙!

만월이 파공성을 내며 통로를 가로질렀다.

용린검 역시 어둠을 갈랐다.

챙!

만월은 날아올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암제의 손에 돌아갔다.

어둠 속이지만 서로의 위치가 확인된 상태.

암제는 입맛을 다셨다.

“쩝.”

그 소리에 건너편에 있던 한빈이 답했다.

“용케 찾았네. 그런데 거기까지.”

말을 마친 한빈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크게 울렸다.

* * *

한편 담장을 넘어선 설화는 입구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조용히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곳에는 탑이 있었다.

설화는 우혈랑검을 들고 탑을 우두커니 바라봤다.

그때였다.

설화의 뒤에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터벅터벅.

발걸음의 주인공은 제갈공민과 남궁장천이었다.

뒤를 이어 당무천도 도착했다.

자신이 기거하던 처소의 뒤뜰을 본 당무천은 눈을 크게 떴다.

“대체 여기에…….”

“우리가 저곳을 통해 탈출했습니다. 이렇게 놀라시는 걸 보니 미리 밖으로 피신해 있었겠군요.”

“허, 그러네. 내 처소 뒤로 통로가 연결되어 있었다니 상상도 못 했네그려.”

당무천이 신기한 듯 자신의 뒤뜰에 뚫린 구멍을 바라봤다.

당무천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청화를 바라봤다.

한빈이 자리에 없기에 자신의 손녀인 청화를 바라본 것이었다.

자신의 뒤뜰에 생긴 통로를 보자,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천기를 읽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천기를 읽지 않고서야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곳부터 사천당가의 담장 너머까지 통로를 만들려면 말도 안 되는 돈과 노력이 들었을 터였다.

그것은 오늘의 혈겁이 반드시 일어나리라 예상했기에 행한 일일 것이다.

당무천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당기명이라는 이름의, 남장을 한 채 살아온 또 다른 손녀가 있었다.

이제는 당기명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당세령이라는 본명으로 돌아왔다.

거기에 남장이 아닌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무천은 조용히 당세령에게 다가가며 통로의 입구를 바라봤다.

그는 한빈이 무사히 저곳에서 나오면 어떻게든 자신의 손녀인 당세령과 엮어 주리라 결심했다.

그것이 사천당가가 대대손손 강호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길이라 확신했다.

당무천이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을 때, 설화의 주변에는 어느새인가 십대세가의 고수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 제갈공민이 설화에게 다가가 물었다.

“여긴 우리가 탈출했던 그 통로가 아니더냐?”

“네, 맞아요. 공자님은 저 안쪽에 있어요.”

“안쪽에 있다라…….”

제갈공민은 눈을 크게 떴다.

한빈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제갈공민은 옆을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남궁장천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남궁장천은 암제를 잡는 데 누구보다도 더 적극적이었다.

남궁장천은 적에게 가문의 반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반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을 수도 있었다.

무가지회에 따라온 가문의 반이 배신자였다.

남아 있는 자 중에 더 많은 배신자가 있을 수도 있었다.

제갈공민이 은밀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남궁장천은 그에게 귀를 갖다 댔다.

제갈공민의 이야기를 들은 남궁장천은 조용히 나머지 고수들에게 그의 말을 전달했다.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은 그들은 기척을 죽이며 통로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사사-삭.

그들은 통로를 중심으로 합격진을 짜고 만일에 대비했다.

합격진이 갖춰지자 그들은 조용히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스릉.

휘릭.

하지만 살기만은 드러내지 않았다.

철저히 기척과 살기는 감추면서, 동시에 암제가 저곳에서 나오면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던 설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 아저씨들 지금 뭐 하는 거지?”

“합격진을 짜고 있잖아요.”

“저기는 위험한데…….”

“왜 위험해요?”

청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였다.

설화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발밑에서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남들은 못 듣더라도 설화만은 들을 수 있었다.

딱 하고 통로 전체에 울려 퍼지는 손가락 튕기는 소리를 말이다.

남들이 들을 때는 똑같은 것 같은 단조로운 소리지만, 설화는 한빈이 손가락 튕기는 소리를 철저히 구분할 수 있었다.

지금의 소리는 분명히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이제 잘라야겠네.”

“뭘 잘라요?”

청화가 고개를 갸웃할 때 설화는 우혈랑검에 진기를 불어 넣었다.

스스슥.

순식간에 우혈랑검에 검기가 일렁였다.

설화는 나지막이 말했다.

“파혼검 제구식.”

그 말과 함께 설화는 우혈랑검을 바닥에 찔러 넣었다.

순간 바닥이 흔들거리며 청화가 휘청였다.

설화는 재빨리 청화를 잡고 그곳에서 열 걸음 뒤로 몸을 날렸다.

휘릭.

설화는 착지하는 동시에 외쳤다.

“다들 조심하세요!”

제갈공민은 다급하게 설화를 바라봤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하지만 말을 맺지 못했다.

바닥이 꺼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휘청.

제갈공민뿐이 아니었다.

모든 세가의 고수들이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입구에서 떠나지는 않았다.

당장이라도 암제가 통로를 빠져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제갈공민의 눈에 기괴한 풍경이 들어왔다.

달이 반으로 갈라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번은 착각이었다.

달이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입구 쪽을 덮치고 있었다.

제갈공민이 외쳤다.

“다들 피하시오!”

그들도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그들을 향해 날아오는 것은 거대한 십 층 석탑이었다.

그 석탑이 기울어지며 일도양단의 기세로 입구 쪽을 덮치고 있었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후두둑.

바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제갈공민을 비롯한 십대세가의 고수들은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쿠르릉.

마지막 굉음과 함께 사방으로 먼지와 파편이 비산했다.

파파팍.

먼지가 걷히자 제갈공민은 재빨리 설화에게 달려갔다.

“대체 무슨 일이냐?”

질문은 제갈공민만 했지만, 다른 이들도 궁금하다는 듯 모두 설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은 설화가 멋쩍게 웃었다.

“헤헤, 다들 왜 그렇게 보세요?”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으니 그렇단다.”

“공자님이 그러셨어요. 두더지를 잡으려면 입구를 막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요.”

“입구를 막는다라……. 그건 병법과 일치하는구나. 그런데 안에 들어가 있는 팽 공자는 어떻게 한단 말이냐?”

제갈공민은 눈을 가늘게 뜨며 설화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이 막히면 나올 곳은 없었다.

그들이 빠져나온 반대쪽 통로는 진작에 막았다.

적들이 그곳으로 나와서 역습할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빈이 암제를 가두고 그곳을 빠져나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곳의 지나오며 그는 혹시 다른 출구가 있는지를 면밀히 살폈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다른 샛길은 없었다.

출구는 오로지 이곳과 사천당가 담장 너머 막힌 구멍뿐이었다.

생각을 이어 나가던 제갈공민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그렇다면 무림세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해서…….”

그의 말에 무림세가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말인가?”

그는 황보만청이었다.

그의 말에 팽대위가 다급하게 무너진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한빈아!”

* * *

뒤쪽에 울리는 굉음 덕분에 한빈은 암제의 간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암제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빈이 자신이 사냥꾼이라고 한 것은 진심이었다.

이 어둠 속에서 진정 유리한 자는 과연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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