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 계가(計家) (6)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보따리를 길게 묶었다.
그러고는 등짐을 메듯 자신의 몸에 걸쳤다.
한빈은 자신의 몸을 다시 살피며 빠진 것이 없나 점검했다.
그 모습은 마치 긴 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모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마치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암제는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한빈이 구걸십팔보를 펼쳤다.
사사-삭.
순간 낙엽 밟는 소리와 함께 잔형을 남겼다.
모두는 한빈의 속도에 눈을 길게 떴다.
얼마나 빠른지 한빈의 이동하는 모습이 실을 늘려 놓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잔형이 만들어 낸 실은 점점 없어졌다.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있을 때, 한빈이 다시 나타난 것은 암제가 올라가 있는 전각이었다.
금의위의 수장 강유찬은 그 모습에 눈을 가늘게 떴다.
방금 한빈이 전한 것은 바로 암제의 정체였다.
그는 암제가 왜 황제의 목을 벨 것을 언급했는지를 한빈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차라리 반역이라면 막겠지만, 암살이라면?
그것은 사정이 달랐다.
항상 겹겹이 고수의 호위를 받고 있는 황제라고는 하나, 천하제일인에 가까운 고수가 노린다면?
강유찬은 한빈의 뒤를 따라가 도와줘야 하나 잠시 고민했었다.
하지만 이내 포기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나선다면 그것은 돕는 것이 아니라 일을 그르치게 될 확률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만약 한빈이 암제를 생포한다면 강유찬은 황제에게 그의 공로를 전할 것이었다.
오늘 무림과 나라를 구한 일을 말이다.
강유찬의 진지한 표정과는 달리, 십대세가의 고수들을 제외한 무림세가 사람들은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한빈의 경공술 때문이었다.
“지금 저게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는 거지?”
“허허, 하북팽가에 저런 경공술이 있었나?”
“아무리 봐도 하북팽가의 사람이 아닌 것 같군.”
그때 누군가가 그들을 말렸다.
“자네들, 지금 대체 그런 잡담을 하고 있을 여유가 있던가?”
그 말에 모두는 입을 다물었다.
아군의 목이 나뒹구는 상황.
절대적인 무위를 지닌 적이 탈출해서 모두의 목을 노릴지도 모르는 상황.
모든 상황이 무림세가의 입장에서는 최악이었다.
경공술을 보고 놀랄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들을 놀라게 한 것은 한빈이 구걸십팔보가 그만큼 신묘했기 때문이다.
그때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정도의 경공술이라면 무림 최고가 아니던가?”
“그러고 보니…….”
모두는 한빈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한 가지였다.
그때 모두의 바람을 누군가가 말했다.
“이기지는 못해도 놓치지는 않겠군. 정의맹에서 사냥개를 키운 것이 분명해.”
“그래, 저자를 추격만 하면 우리가 잡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야.”
“그런데 추격하다가 목이라도 달아난다면…….”
그의 말에 모두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암제의 서슬 퍼런 만월에 한빈의 목이 달아날 것이 훤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암제와 마주한 한빈은 귀를 후볐다.
지붕 위에 올라와 자신에게 한마디도 안 하고 귀를 후비는 한빈의 모습에, 암제는 미간을 좁혔다.
“무엄하다. 나를 앞에 놓고 그게 무슨 불경한 행동이란 말인가?”
“꼭 왕이라도 된 듯한 말투네.”
“…….”
“맞아, 왕이었지. 내가 귀를 후비는 건 영감 때문은 아니야. 누가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아서.”
한빈은 검지로 멀리 떨어진 비무대 위를 가리켰다.
그 모습에 암제가 코웃음을 쳤다.
“후웃, 네가 시간을 끌려고 하는구나. 하지만 네 뜻대로는 되지 않을 터다.”
“과연 그럴까?”
“나는 첫 번째 공물로 네놈의 목을 원한다.”
내공이 담긴 목소리였다.
동시에 비무대 위에서 지붕 위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빈은 활짝 웃으며 검지를 흔들었다.
“영감은 궁금하지 않아?”
“…….”
암제는 무엇을 물어보는지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한빈을 노려봤다.
그 모습에 한빈이 입꼬리를 올렸다.
“궁금하면 기막 좀 쳐 줄래?”
“흠.”
“기막 안 치면 나도 말 안 할래. 궁금한 건 영감인데 내가 쓸데없이 힘 낭비를 할 필요는 없잖아.”
한빈은 자리에 앉아 팔짱을 꼈다.
그 모습에 암제가 살짝 주위를 둘러봤다.
순간 지붕 위의 낙엽들이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바닥에서 떠올랐다.
스슥.
공중에 떠오른 낙엽과 파편들이 일정한 높이에서 묘하게 멈추었다.
암제가 기막을 펼친 것이다.
기막을 펼친 암제는 조용히 한빈을 바라봤다.
암제는 사실 이 상황이 기가 막혔다.
그는 대표로 한빈이 나올 줄 예상하고 있었다.
협상하는 척하다 처참히 밟아 주리라 결심했다.
그런데 묘하게 말려들어 가고 있었다.
그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역시, 내공을 다루는 솜씨가 수준급이군. 내공이 얼마나 진하면 이렇게 눈으로 보여? 신기하네?”
한빈은 기막에 붙어 있는 파편과 나뭇잎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암제가 못 참겠다는 듯 외쳤다.
“빨리 말이나 하거라!”
“그럼 본론을 얘기하지. 영감이 살아난 거 말이야. 과연 어떻게 살아났을까?”
“…….”
암제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은 암제도 궁금해하는 점이었다.
그때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심장의 정중앙에 검이 꽂히고도 살아난 게 신기하지 않아?”
“내 무공이…….”
“그게 무공하고 상관있을 것 같아?”
“음.”
암제는 침음을 삼키며 한빈을 바라봤다.
그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강호에서 구르다 보면 수많은 기사를 보게 되지. 그런데 말이야…….”
“말해 보거라.”
암제의 말에 한빈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암제를 바라보며 용린검을 뽑았다.
스릉.
용린검의 검신이 달빛을 머금고 미소를 그리고 있다.
암제는 조용히 용린검을 바라봤다.
한빈에게 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에 여유 있게 검신을 바라봤다.
순간 암제의 눈이 커졌다.
“혹시…….”
“그래. 네 가슴에 박혔던 검이지. 그런데 그게 딱 붙었어. 그리고 이 검집 보이지?”
“그 검집은 혹시 화룡편?”
“그래 맞아. 진짜 신기한 일이지?”
“대체 어찌 그런 일이…….”
“그렇게 놀라지 말고 내 얘기 잘 들어. 나는 네가 뭘 하든 관계없어. 나는 지금부터 이 검에 얽힌 비밀을 풀고 천하제일이 될 거야.”
“천하제일이라…….”
“내가 여기서 도망치면 말이야. 영감이 과연 날 찾을 수 있을까? 뭐, 나도 영감을 못 찾겠지만, 영감도 나를 못 찾는 건 피차일반이지. 푸웁.”
한빈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토해 냈다.
“그냥 조용히 사라지면 될 것을 왜 내게 말하느냐?”
“영감도 저 늙은이들을 위협했잖아.”
한빈은 비무대 위에 모인 무림세가 고수들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암제는 침음을 삼켰다.
한빈의 말에는 일말의 거짓이 없었다.
그것은 암제가 장담할 수 있었다.
상대는 그다지 정의니 협의이니 하는 단어들과 거리가 멀었다.
그때였다.
암제가 만월을 잡았다.
초승달 모양의 도가 달빛에 반짝인다.
그는 만월을 앞으로 내뻗으며 한빈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순간 기막에 붙어 허공에 떠올라 있던 낙엽과 파편들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툭, 툭.
그 모습에 한빈이 외쳤다.
“기막 펼치라고 했더니, 내 얘기 듣기 싫어?”
“문답무용. 네 목을 베고 내 물건을 찾아갈 테다.”
“내가 비밀을 말해 주지 않으면 이걸 얻어도 소용없을 텐데.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내가 비밀을 얘기해 주지.”
“부탁이라니, 말해 보거라.”
“박아.”
“지금 뭐라 했느냐?”
“일단 박으라고.”
한빈은 자신의 발밑을 가리켰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무림세가 고수들은 눈을 크게 떴다.
조금 전까지는 암제가 기막을 펼친 덕분에 아예 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암제가 기막을 거둔 순간, 둘의 대화는 모두의 귓가에 생생히 꽂혔다.
한빈을 바라보는 그들의 생각은 동일했다.
무슨 수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지켜봤는데 오히려 암제의 성질만 돋우니 저게 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애송이가 일을 다 그르치는군.”
“역시 하북제일의 겁쟁이라는 소문이…….”
“겁쟁이는 아니지. 그냥 망나니일 뿐이지.”
모두가 웅성거리는 가운데 한빈은 뒤로 폴짝 물러섰다.
그러고는 팔짱을 끼고 암제를 노려봤다.
“더 이상 오면 그냥 도망칠 거야. 이렇게 말해 놓고 보니 내가 악당이 된 것 같네.”
“그럼 어서 내놓아라.”
“그 전에 내가 이 검을 통해 얻은 보법을 하나 알려 줄게.”
“…….”
암제가 눈을 가늘게 뜨자 한빈이 갑자기 발을 뻗었다.
한빈은 전각에 흩어진 파편을 정확히 걷어찼다.
탁.
파편이 암기가 되어 암제를 향해 날아들었다.
암제는 아무렇지 않게 소매를 휘둘렀다.
팡!
소매에서 뻗어 나온 진기가 파편을 흩어 냈다.
파편을 걷어 낸 암제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한빈이 눈앞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암제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천하제일이 될 기회를 눈앞에서 놓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것이 한빈의 격장지계라는 것을 암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과의 승부를 위한 격장지계가 아니었다.
자신의 속을 뒤집어 놓기 위한 수단이 분명했다.
그 이유는 모르지만, 한빈이 다시 자신의 눈앞에 나타날 확률은 없었다.
대체 어디에…….
암제는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한빈과 용린검밖에 없었다.
비무대 위에서 한빈과 암제의 대화를 지켜보던 이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지금 뭔가가 오간 건 맞지?”
“혹시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당한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암제가 소매를 휘두른 후 눈 녹듯 사라졌잖아.”
“헉, 저게 어떻게 인간의 무위야?”
“대체…….”
모두가 술렁이고 있을 때, 제갈공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한빈이 사라진 것은 맞았다.
하지만 암제의 손짓 한 번에 녹아내린 것은 분명 아니었다.
다만, 어떻게 신형을 감췄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제갈공민은 슬쩍 당무천을 바라봤다.
이곳에서 무공이 가장 높은 것은 바로 당무천이었다.
그는 당무천이 지금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기대도 잠시, 제갈공민은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당무천도 해답을 찾는 듯한 표정으로 제갈공민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당무천이었다.
“대체 팽 공자는 어디에 갔다는 말인가?”
“어르신도 못 보셨습니까?”
“나도 못 봤다네.”
“그럼 혹시 암제에게 당한 건…….”
“암제도 저리 당황하지 않나? 그걸 보면 분명히 무사히 저곳을 벗어났을 터인데……. 대체 어떤 경공술이기에 이렇게 지켜보고 있는데도 찾을 수가 없단 말인가?”
해답을 듣기 위해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당무천도 자신이 이곳에서 가장 무공의 경지가 높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눈을 피해 사라졌다고?
그것은 불가능했다.
신경이 분산될 때 몸을 숨기는 것은 쉽다.
하지만 지금처럼 모두가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상태에서 모두의 시선에서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천하제일의 경공술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것도 십대세가의 고수들의 눈을 피해서 말이다.
이전에 암제가 비무대 위에서 사라진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암제가 무림세가 고수들의 눈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럿이 달려드는 혼란한 상황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빈은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상태에서 사라졌다.
그때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