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 계가(計家) (5)
동시에 십대세가의 고수들이 비무대 위로 뛰어들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암제.
물론 그들이 무작정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제갈공민의 신호로 그들은 진을 펼쳤다.
제갈세가의 전통적인 병진인 팔괘진.
여덟 방위를 십대세가의 고수들이 점하고 나머지 고수들은 중앙의 한 점을 향해 나아간다.
여덟 방위를 맡은 십대세가의 고수들이 맡은 것은 방어이며, 나머지 모두는 중앙을 향해서 몰려든다.
암제를 노리는 이들의 앞에는 남궁장천과 당무천이 있었다.
파파박.
그들이 암제를 향해 기세를 뿜으며 달려들었다.
암제는 팔짱을 끼고 아무렇지도 않게 주변에서 몰려드는 고수들을 바라봤다.
“오늘따라 파리가 많군.”
암제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모두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광오함에 선두에서 달려들던 남궁장천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암제의 목을 뚫기 바로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단 두 걸음.
휙.
남궁장천은 길게 검 끝에 기를 모았다.
창천무애검법의 제팔식, 창천강웅(蒼天降鷹)이었다.
하늘 높이 뜬 매가 아래로 강하하며 먹이를 낚아채는 것처럼 남궁장천의 검이 암제의 머리 쪽을 향하다가 아래를 향했다.
이대로라면 암제의 심장을 꿰뚫을 수 있을 터.
챙.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남궁장천의 오른손이 저릿해져 왔다.
챙.
다시 소리가 울린다.
챙, 챙, 챙.
연속으로 울리는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남궁장천은 눈을 크게 떴다.
암제의 무기가 십대세가 고수의 공격을 모조리 쳐 냈다.
길게 뻗은 악소천의 창도.
일도양단의 기세로 내려치는 팽대위의 거도도.
모두 튕겨 나갔다.
암제가 쓰는 반월 모양의 칼은 빙글 돌며 그들의 공격을 쳐 냈다.
남궁장천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암제가 모두의 공격을 쳐 낸 것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암제가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굉음이 울려 퍼졌다.
쾅.
동시에 반월 모양의 칼이 어디론가 날아갔다.
그 방향은 굉음이 울린 방향과 일치했다.
남궁장천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백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전각의 지붕이었다.
전각의 지붕을 바라보던 남궁장천이 침음을 흘렸다.
“음.”
그 옆에서 지켜보던 제갈공민도 고개를 흔들었다.
“대체 언제 저기에…….”
“그게 문제가 아닐세. 저 거리에서 이기어검을 구사한다는 거지.”
남궁장천은 전각의 지붕을 가리켰다.
그 말에 제갈공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정도 거리에서 이기어검을 구사하는 것은 무림삼존도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제갈공민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기어검이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거리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내공이 뻗어 가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 말이다.
그때 누군가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 한숨에 제갈공민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당무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전각의 지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제갈공민이 말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건 우리 가문에서 사라졌던 무기일세.”
“네?”
“저자가 들고 있는 무기는 만월이라 불리는 무기일세.”
“만월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갈공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봐도 초승달 모양이었다. 만월이라면 보름달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 모습에 당무천이 말했다.
“본래 모양은 만월인데, 만월을 든 자의 내공이 높으면 높을수록 초승달 모양에 가까워지네.”
“그렇다면…….”
“어찌 보면 저자는 도망간 것이 아니라 우리를 놀리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
“흠.”
제갈공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전각의 지붕에서 내공이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만월이 맞네. 이제부터 밤새도록 목이 붙어 있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야. 내가 기회를 주지.”
“기회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제갈공민이 외치자, 암제가 답했다.
“너희의 목숨 줄을 붙여 놓을 공물을 바치거라.”
“무슨 헛소리를…….”
제갈공민은 말끝을 흐렸다.
멀리 전각 지붕에서 암제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갑자기 일어난 암제는 지붕 위에서 뭔가를 찾았다.
두리번거리던 암제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여기 있군.”
암제는 전각의 지붕에서 동그란 물체 하나를 집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 물체를 던졌다.
휙.
내공이 실린 동그란 물체가 비무대 쪽으로 날아왔다.
그 물체는 정확히 십대세가 대표들의 가운데에 떨어졌다.
툭.
십대세가의 대표들은 재빨리 뒤쪽으로 물러났다.
순간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헉, 저건…….”
“대체 언제…….”
그들 대부분은 경악에 어린 시선으로 바닥에 떨어진 물체를 바라봤다.
그것은 목이 잘린 채 뒹구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 수급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모두는 서로를 바라봤다.
하지만 누가 당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때 암제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다들 언제 그 꼴이 될지 모른 채 불안에 떨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일다경 안으로 협상할 사람을 보내라. 이곳으로!”
암제는 자신이 올라가 있는 전각의 지붕을 가리켰다.
그의 외침에 무림세가의 고수들은 이를 악물었다.
암제의 말이 맞았다.
암제가 싸우려고 덤벼든다면 정정당당히 맞설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싸울 마음이 없다고 대놓고 선포했다.
대신 암살 예고를 한 것이다.
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암제의 무위가 무림삼존에 버금간다는 데에는 모두 이견이 없었다.
무림삼존이 숨어서 누군가를 암살하려고 한다면 과연 막을 수 있는 집단이 있을까?
몇 날 몇 시 그리고 어느 세가라고 예고가 되어 있다면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암제를 막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무림 역사상 이렇게 비겁한 선전포고를 하는 이는 일찍이 없었다.
그렇다고 공물을 바친다고 약속할 수도 없는 법이었다.
모두가 결정을 못 내릴 때, 누군가가 말했다.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됐군요.”
그 말은 모두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빈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무림세가 고수 중 하나가 한빈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체 어디서 배운 말버릇…….”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갈공민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오.”
무림세가 고수들을 제지한 제갈공민은 한빈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한빈 앞에 선 제갈공민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팽 공자, 지금 한 말이 우리를 놀리려는 것은 아닌 것 같아서 묻겠네. 혹시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가?”
“일단은 닭을 지붕 아래로 불러야 하겠죠?”
“어떻게?”
“그건 제게 맡겨 주시죠. 그런데…….”
한빈이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 모습에 제갈공민이 물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가? 편히 말해 보게.”
“저자가 그냥 닭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죠. 저자는 투계(鬪鷄)입니다. 평범한 강아지는 나물 무치듯 처바를 수 있는 싸움닭입니다. 그러니 마지막까지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이번에 저자가 도망치면 못 잡습니다.”
“흠.”
“원래 백 명의 고수가 한 명의 도둑을 쉽게 못 잡는 법입니다. 그런데 저 도둑은 어느 고수보다 무공이 고강합니다. 어떻게 막겠습니까?”
“그럼 자네는 어떻게…….”
“그건 비밀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냥 지켜만 보십시오. 안 그러면 절대 못 잡습니다. 제가 협상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저자를…….”
한빈은 마지막 말은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그 말은 분명히 꼭 잡겠다는 것이었다.
제갈공민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생각이 복잡하기에 자신도 모르게 감정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는 한빈이 어떻게 암제를 잡겠다고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거기에 한빈을 협상자로 보내려면 일단 암제에게 굴복하는 척을 해야 했다.
이것을 무림세가의 사람들이 용납할까?
제갈공민 자신뿐이라면 마지막 수단으로 굴복하는 척하며 한빈을 협상자로 내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무림세가 사람들이라면?
굴복하는 척한다고 해도 하북팽가의 사 공자를 대표로 내보낸다고 하면 인정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제갈공민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말없이 주변을 바라봤다.
“…….”
그때 묵묵히 지켜보던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공영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의 등장에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제갈공영은 십대세가의 가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그것은 이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동생인 제갈공민은 어찌 보면 정의맹의 사람이다.
십대세가 대부분이 정의맹의 일원이긴 해도, 이 행사는 무림세가만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정리해야 할 것은 십대세가에서 두뇌 역할을 하는 자신이었다.
제갈공영은 주변을 쓱 훑어봤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제갈세가는 팽 공자에게 협상을 맡기겠소.”
“네? 팽 공자라니요?”
무림세가의 가주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저자를 옭아맬 수 있는 사람은 팽 공자밖에 없다고 제갈세가는 판단하오.”
그 말에 모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천하의 제갈세가가 이리 나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공영만은 진지한 표정으로 한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에는 믿음이라는 감정이 굳게 박혀 있었다.
귀락천 지하에서의 혈투를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제갈공영의 기억에 박혀 있는 암제는 천하제일인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의 수하들의 무공도 일반 무사들은 범접지 못할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그곳에 누가 오던 그 당시 제강공영을 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난공불락이라고 느껴지던 지하 공간에서 자신을 구한 것은 바로 한빈이었으니, 그를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갈공영의 시선에 모두의 시선이 한빈에게 몰렸다.
그 시선을 받은 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나머지 분들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한빈의 시선이 한 바퀴를 돌았을 때, 황보만청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주위들 둘러본 후 입을 열었다.
“나는 팽 공자를 믿겠네”
“나도 그 말에 동의함세. 팽 공자에게 이 일을 맡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네.”
산동악가의 가주 악소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것도 어찌 보면 기세였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때, 그들을 보고 있던 남궁장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다들 하북팽가의 사 공자를 믿는다고 하는지가 이해가 안 갔다.
그것도 잠시,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생각해 보니 자신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대체…….’
그때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맡겨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허락받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
모두는 한빈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모든 무림세가가 허락했는데 대체 누구에게 더 허락을 맡아야 한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되었다.
한빈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새로 합류한 강유찬과 광개 그리고 현문 같은 고수들이 모여 있었다.
한빈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금의위의 수장인 강유찬이었다.
한빈의 시선에 강유찬은 고개를 갸웃했다.
“팽 공자, 대체 왜 나를 그리 보는가?”
“이 일은 강 대인께 허락을 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무림세가의 일…….”
강유찬의 말이 끝나기 전에 한빈이 쓱 다가왔다.
강유찬은 눈을 크게 떴다.
한빈은 그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귀에 속삭였다.
그 말에 강유찬의 눈에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그게 정말인가?”
“네, 맞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말을 마친 한빈은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맞춰 어디선가 보따리 하나가 날아왔다.
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