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373화 (373/621)

373. 계가(計家) (1)

한빈이 움직이자 서창휘를 호위하던 무사는 검을 빼 들었다.

“더 이상 접근하면…….”

그 무사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빈이 그와 서창휘를 지나쳤기 때문이었다.

휙.

무사는 입을 벌렸다.

그는 한빈의 움직임을 볼 수 없었다.

그저 바람 한 줄기만이 지나갔다는 느낌 이외에는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서창휘를 지키던 호위 무사의 손이 살짝 떨렸다.

하지만 검 끝은 살짝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호위 무사의 검은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제갈공민은 눈을 가늘게 떴다.

호위 무사가 떠는 상황에서도 팔짱을 풀지 않고 있는 서창휘의 대담함에 놀랐기 때문이었다.

여러 감정이 담긴 시선이 복잡하게 얽혔다.

그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신창양가의 행렬 앞에 섰다.

동시에 신창양가의 행렬도 멈췄다.

그 모습에 무림세가 고수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한 것은 금선도 마찬가지였다.

난데없이 신창양가가 나타난 것은 그의 계산에 없었다.

동창 제독 서창휘도 신창양가의 출현이 흥미롭다는 듯 턱을 어루만졌다.

모든 시선이 한빈에게 몰린 상황.

신창양가의 가장 앞에 선 무사가 한빈을 향해 한 걸음 나왔다.

“잘 지내셨는지요, 팽 공자.”

그는 한빈을 오랜 친구처럼 대했다.

물론 그 무사는 신창양가의 무사 양예신이었다.

한빈도 마주 포권하며 예를 취했다.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안부를 물으십니까?”

“그래도 많은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많은 일이라…….”

“모두 보고 있었습니다.”

“안부 인사는 됐고, 일단 상방보검부터 꺼내 보시죠.”

“네?”

“급하니 빨리 꺼내 보시죠.”

한빈은 상방보검을 맡겨 놓기라도 한 것처럼 태연하게 재촉했다.

“일단 드리기는 하겠지만…….”

말끝을 흐린 양예신이 등에서 천에 싸인 검 한 자루를 내밀었다.

하지만 한빈은 검을 받지 않았다.

그 모습에 양예신이 물었다.

“달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일단 이걸 받으시죠.”

한빈은 쪽지 한 장을 내밀었다.

양예신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 쪽지를 받았다.

한 손에는 상방보검을, 다른 한 손에는 쪽지를 든 양예신은 한빈을 바라봤다.

그 시선을 받은 한빈이 턱짓했다.

쪽지를 펼쳐 보라는 뜻이었다.

양예신은 눈을 가늘게 떴다.

상방보검보다 쪽지가 더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양예신은 쪽지를 폈다.

쪽지를 본 양예신의 눈이 커졌다.

“흠.”

헛기침하는 양예신에게 한빈은 눈을 찡끗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팽 공자.”

“물론이지요.”

“상방보검으로 직접 저들을 막으면 될 게 아닙니까? 이 상방보검은 팽 공자에게 언제든 내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직접 나서지를 않으십니까?”

“신창양가는 동창의 천적이 아닙니까?”

“천적이라…….”

“이 상방보검은 어떤 가문이 쥐든 동창의 미움을 받게 될 겁니다.”

“그럼 신창양가는 상관없다는 얘기입니까?”

“신창양가는 동창과 원래 사이가 안 좋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동창이 어찌 신창양가를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한빈은 활짝 웃었다.

이것은 사실이었다.

신창양가는 황궁의 세력에 있어 천적이었다.

신창양가는 개국공신이자 구국 공신이었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신창양가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앞에 나섰다.

황제와 나라는 이 충신 가문에 진 빚이 많았다.

하지만 그 충신은 나라에 대가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상을 내리려고 해도 그들은 나라가 위기에서 벗어나면 자리에서 조용히 물러났다.

신창양가는 진정한 충신 가문이었다.

그게 바로 신창양가를 보는 세인들이 시선이었다.

양예신은 한빈에게 이용당하는 것 같으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신창양가가 나설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강호 역사에 있어 영웅이 될 기회를 신창양가에게 넘긴 것이다.

아마 다른 자라면 이런 기회를 양보하지 않았을 것이다.

철저한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라는 것을 양예신은 알고 있었다.

양예신은 한빈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신창양가가 팽 공자에게 진 빚은 이걸로 갚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러시지요.”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부담스러운 황궁 세력과의 협상을 이렇게 맡겼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양예신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생각보다 빚을 금방 털어 내는 것 같아서 마음이 홀가분했던 것이다.

그때 한빈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급한 일이 있어서…….”

“급한 일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양예신의 눈이 커졌다.

쪽지에 부탁할 내용만 적어 놓고 모든 일을 자신에게 맡기겠다는 것이다.

최소한 일이 잘 진행되느냐는 확인해야 하는 것이 상황에 맞았다.

지금 이 일보다 급한 일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금선이 여기서 나간다면 강호가 휘청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자리를 뜨려 하다니, 그보다 더 큰일이라는 말이었다.

양예신의 심각한 표정에, 한빈이 손을 저었다.

“개인적인 일이니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한빈은 바로 돌아서서 도열해 있는 신창양가 무사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양예신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이 급하다는 일이 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는 쪽지와 한빈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쪽지의 내용보다 급한 일은 없어 보였다.

양예신은 잠시 한빈을 지켜보기로 했다.

한빈이 부탁한 일은 잠시 미뤄도 되니 말이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무림세가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한빈과 양예신의 태도는 동창 제독인 서창휘를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서창휘와 그의 수하들이 눈썹을 꿈틀댔다.

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천천히 마차로 걸어갔다.

그에 맞춰 마차에서 누군가가 내려왔다.

그는 영아의 아비인 무진이었다.

무진은 한빈에게 달려와 포권했다.

“팽 공자님, 오셨습니까?”

무인은 아니지만, 한빈이 무인이기에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최대한 예의를 갖추려 한 것이다.

그 모습에 한빈이 손을 내저었다.

“그리 예를 차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예라니요? 공자님이 베풀어 주신…….”

“인사는 나중에 하고, 영아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이제 멀쩡합니다. 이게 다 공자님 덕분입니다.”

무진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한빈은 그 모습에 작게 웃었다.

“다행입니다.”

그때 마차의 문이 열렸다.

덜컹.

마차의 문이 열리고 장자명과 함께 영아가 걸어왔다.

한빈을 본 영아가 재빨리 달려오다 멈췄다.

그러고는 자신이 꼭 끌어안은 검을 바라봤다.

그 검은 한빈이 맡긴 용린검이었다.

영아는 용린검을 힐끔 보더니 조심스럽게 걸어왔다.

한빈의 앞에 선 영아가 말했다.

“공자님.”

“안색을 보니 너를 괴롭혔던 병은 다 나은 것 같구나.”

“네, 이제는 멀쩡해요. 그런데 이 검이…….”

영아가 말끝을 흐리며 용린검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한빈이 물었다

“무슨 일이지?”

“자꾸 이 검이 울어요.”

“마치 검이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그게 아니라 진짜 울어요. 여기요.”

영아는 용린검을 내밀었다.

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용린검을 바라봤다.

진짜 용린검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한빈은 대충 이해가 되었다.

용린검은 영아에게 남아 있던 용린의 기운을 모두 흡수한 것이다.

용린검이 품을 수 있는 용린의 기운에도 한계가 있는 법.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피워 냈다.

금선을 단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용린검법에 관한 깨달음이었다.

용린검이 영아의 몸에 깃들어 있는 기운을 완벽하게 흡수한 것이 분명했다.

이제는 그 기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되었다.

한빈은 검을 받았다.

용린검이 언제 그랬냐는 듯 울림을 멈추었다.

한빈의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한빈은 용림검을 잡고 조용히 구석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 장자명이 다급히 나와서 한빈을 불렀다.

“팽 공자, 어딜 가십니까?”

“비밀입니다.”

한빈은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한빈의 주변에 설화와 청화가 나타났다.

한빈은 둘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호법을 부탁한다.”

“네, 공자님,”

“믿고 맡기세요.”

설화가 청화가 동시에 답했다.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던 한빈은 뭔가 생각난 듯 장자명을 바라봤다.

“장 의원님, 뒤에 계신 분들에게 안부 좀 전해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장자명이 한빈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한빈도 마주 고개를 숙인 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양예신은 고개를 흔들었다.

의문이 풀리기는커녕 의문이 더욱 쌓였다.

양예신은 고개를 돌려 서창휘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들은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이곳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양예신은 그들의 모습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동창이라는 집단에 들어온 이후, 이리 무시를 당해 본 적은 없을 터였다.

이제까지는 그들이 말하면 그게 법이었으니.

황제가 만든 법은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것은 사서삼경에서나 나오는 이상적인 이야기였다.

법은 해석하기 나름이고 아예 법이 적용되지 않는 집단도 있었으니까.

현재에는 동창이 그랬다.

양예신은 한빈이 준 쪽지의 내용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상방보검을 든 양예신이 점점 서창휘와 가까워졌다.

터벅터벅.

양예신은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려는 듯 내공을 실어 걸었다.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은 양예신에게 모였다.

서창휘의 앞에 간 양예신은 인사도 없이 황금빛 천에 싸인 검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검을 감싸고 있는 천을 걷어 냈다.

황금빛 검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상방보검이다.”

“상방보검이 이렇게 흔한 것인가?”

“아닐세. 상방보검이 어찌 흔하겠나.”

“그럼 저걸로 금선을 잡아 놓을 수가 있다는 건가?”

“그렇지! 저걸로 금선을 잡아 놓겠다고 하면 그만이 아닌가?”

“하하, 금선이 자충수에 당했군.”

그들의 말에 금선의 표정은 구겨졌다.

강호에 상방보검을 가지고 있는 무림세가가 얼마나 있을까?

백번 양보해서 상방보검을 하사받은 가문이 있더라도 이렇게 가문 밖으로 가져오는 이가 있을까?

양예신이 상방보검을 들고 온 것은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모든 일을 예상하지 않고서는 말이다.

모두가 마른침을 삼키고 있을 때, 상방보검을 서창휘에게 들이댄 양예신이 말했다.

“상방보검을 사용하겠습니다.”

“…….”

서창휘는 아무 말 없이 양예신을 바라봤다.

양예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상방보검을 사용하기 전에 증인을 좀 부르겠습니다.”

“증인이라…….”

“네, 증인입니다. 이 일의 중대함 때문입니다.”

“마음대로 하시오.”

서창휘가 고개를 끄덕이자 양예신은 장자명이 있는 마차 쪽을 바라봤다.

양예신은 목소리에 내공을 담아 외쳤다.

“다들 나오시지요!”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어둠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모두는 고개를 갸웃했다.

양예신이 증인이라 부를 사람이 누군지 감이 안 잡혔기 때문이다.

그때 마차 뒤에서 몇 명의 사내가 천천히 양예신 쪽으로 걸어왔다.

서창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바라봤다.

그의 호위 무사도 그들을 바라보고 눈을 크게 떴다.

보통의 무림 고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중 하나의 보법이 어딘가 익숙했다.

“제독님, 저자는…….”

호위 무사가 막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서창휘가 필요 없다는 듯 손을 들어 수하를 제지했다.

그러고는 양예신을 쏘아봤다.

“증인이라면서 무림인들만 부르면 그게 어찌 공평하다 할 수 있겠는가?”

“무림인만 부른 것은 아닙니다. 자세히 보시지요.”

양예신은 걸어오는 사내 중 하나를 가리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