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2. 파국(破局) (10)
모두가 웅성거릴 때, 금선이 무릎을 꿇은 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향한 곳은 물론 동창의 제독인 서창휘가 있는 쪽이었다.
하지만 그는 얼마 가지 않아 멈췄다.
몇 발짝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
고요한 비무대 주변으로 그의 숨소리가 울린다.
그 숨소리는 맹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힘을 다 쏟은 토끼의 울음소리와도 같았다.
무림세가 사람들은 잠시였지만, 동창 제독인 서창휘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도 잊었다.
오르지 금선과 상방보검에 온 신경을 쏟을 뿐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멀리 있는 서창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상방보검을 앞으로 내리며 말했다.
“이 상방보검을 폐하께 바치니…….”
순간 멀리 있던 동창 제독 서창휘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폐하의 명이라 생각하고 받들겠소이다.”
순간 무림세가의 사람들이 멍해졌다.
제갈공민도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상방보검을 내민 순간 금선을 잡아 둘 명분은 없어졌다.
상방보검은 충신이나 개국공신에게 내린 황제의 약속.
황제 혹은 나라는 그 약속을 지킬 의무가 있다.
그 약속을 지키고 나면 상방보검은 다시 황실로 돌아간다.
금선은 지금 서창휘에게 부탁하는 것이 아니었다.
황제, 즉 나라에 부탁하고 있는 것이었다.
만약 여기에서 그를 막는다면?
그것은 반역에 준하는 행동이었다.
중원에 남아 있는 상방보검의 숫자는 과연 몇 개나 될까?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상방보검을 마지막으로 내린 것이 오십여 년 전이니까.
대부분의 상방보검이 회수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가정했을 때 금선이 가지고 있는 상방보검은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제갈공민은 조용히 한빈을 바라봤다.
아무리 천 리 앞을 내다보는 팽가의 사 공자라지만, 이번만큼은 방법이 없었다.
시간을 끌기 전에 금선의 목을 베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이것이 제갈공민의 결론이었다.
갑자기 정적에 빠진 비무대 주변.
금선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나를 여기서 데려가시오.”
그의 말에 무림세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한곳을 바라봤다.
물론 그곳에는 서창휘와 동창의 무사들이 있었다.
동창 제독 서창휘는 몸을 돌렸다.
그가 향한 곳은 북경이었다.
그는 북경 쪽으로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지시를 이행하겠나이다.”
난데없는 상황에 주변은 즉시 소란스러워졌다.
병장기를 잡은 무림세가 사람들의 손등에 힘줄이 꿈틀거린다.
그만큼 그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그때 당무천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 기세가 얼마나 흉흉한지 멀리 있던 동창의 무사들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당무천이 다시 몇 발짝 동창의 무사들에게 걸어간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동창의 무사들은 당무천의 걸음만큼 뒤쪽으로 물러났다.
동창 제독 서창휘와 그의 호위 무사 둘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서창휘의 호위 무사 둘이 검집을 잡았다.
언제든 검을 뽑겠다는 모습은 이 싸움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의지였다.
한마디로 일촉즉발의 상황.
누군가가 팽팽하게 당긴 시위를 놓는다면 이곳은 아수라장으로 변할 것이다.
물론 결과는 불 보듯 훤하다.
쓰러지는 자는 동창이 될 터였다.
하지만 무림세가는 몇 배의 대가를 치를 것이 뻔했다.
그때, 당무천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무림세가의 고수들은 병장기에서 손을 뗐다.
그들은 도리어 당무천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당무천이 나서자 오히려 현재 상황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판단하게 된 것이다.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당무천 어르신!”
“강호를 위해서 참으시지요!”
다른 이도 뒤따라 외쳤다.
하지만 당무천은 기세를 피워 내며 제갈공민이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이제 서창휘와 남은 거리는 열 걸음.
무림세가의 고수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상황을 지켜봤다.
서창휘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당무천을 경계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당무천이 기세를 거두었다.
동시에 서창휘의 옆에 있던 무사들이 헛숨을 토해 냈다.
“헉.”
그 모습에 당무천이 말했다.
“좋은 호위를 두셨구려. 저런 고수가 있다니, 역시 동창의 힘은 허명이 아니었소이다.”
당무천은 시선을 돌려 서창휘의 옆에서 버티고 있는 두 명의 호위를 바라봤다.
서창휘의 옆에 있는 호위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과연 어떻게 된 일일까?
서창휘의 옆에 있는 호위들은 이제까지 기막을 펼쳐 당무천의 기세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당무천의 기세를 그대로 받아 내야 했기에 지금 한계에 이른 것이다.
당무천이 그들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몸을 바쳐 주인을 호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창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을 이었다.
“칭찬은 감사하오만, 지금 내게 온 것은 황명을 막기 위함이오?”
“사천당가의 가주로서 밝히겠소이다.”
당무천의 목소리에는 내공이 담겨 있었다.
서창휘의 바로 앞에서 이렇게 목소리에 내공을 담는다는 것은 모두가 들으라는 뜻이었다.
“…….”
서창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말해 보라는 뜻이었다.
태연한 서창휘의 모습에 당무천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사라지려 할 때, 당무천이 입을 열었다.
“당연히 황명에 따르겠소이다. 저자의 뜻대로 하시오.”
당무천은 금선을 가리켰다.
뜻밖의 모습에 무림세가의 고수들이 여기저기서 헛숨을 토해 냈다.
“휴.”
“할 수 없지.”
모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씁쓸한 미소는 잊지 않았다.
주변의 반응을 살피던 당무천의 시선이 마지막에 멈춘 곳은 바로 한빈 쪽이었다.
한빈은 당무천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당무천도 마주 웃었다.
마치 이제는 네 마음대로 해 보라는 할아버지의 미소였다.
겉보기에는 인자한 미소였지만, 사실 당무천의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외통수였다.
하지만 검선을 잡아 둘 수도 없는 법이 아니던가?
서창휘는 당무천과 한빈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한빈의 미소를 본 서창휘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그것도 잠시, 서창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흠.”
“왜 그러시오? 표정을 보니 많이 아쉬운 것 같구려.”
질문을 던진 당무천이 서창휘를 바라봤다.
분명히 아쉬워하고 있었다.
순간 당무천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공독지체까지 얻어서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던 그였다.
하지만 방금 서창휘의 한숨에 두려움이라는 본능이 발동한 것이다.
서창휘는 무림세가의 심기를 건드려 검을 뽑게 만들려고 했음이 분명했다.
그 뒤에 이어질 것은 뻔했다.
무림세가의 말살지계.
그것이 마지막 종착지가 될 뻔했다.
그때 표정을 재빨리 바꾼 서창휘가 답했다.
“아니오. 아쉽긴 뭐가 아쉽겠소. 우리는 나라를 위해 일할 뿐이오.”
고개를 저은 서창휘는 그의 호위에게 말했다.
“너희는 가서 상단주를 모셔 오거라.”
“명 받들겠습니다.”
“존명.”
두 명의 호위는 금선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들 중 한 명이 먼저 금선의 옆에 자리한 내시들과 함께 그를 부축했다.
다른 한 명은 상방보검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금선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창휘 쪽을 걸어오려 할 때였다.
서창휘와 당무천 사이에 붉은 신형이 나타났다.
사사삭.
풀잎 밟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신형의 주인은 한빈이었다.
한빈의 등장에 서창휘와 당무천은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의 등장 덕분에 서창휘를 향해 다가오던 금선도 걸음을 멈췄다.
상방보검을 들고 오던 호위만이 재빨리 서창휘의 곁으로 돌아와 한빈을 막아섰다.
호위는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한빈을 쏘아봤다.
한빈은 그의 행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히 서창휘에게 포권했다.
“서 대인, 안녕하십니까? 무림 말학으로서 이 자리에 끼어드는 것이 부담스럽지만,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어 이렇게 나서게 되었습니다.”
“흠…….”
서창휘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한빈을 바라봤다.
그때 당무천이 나섰다.
“이 아이는 제 오른팔과도 같은 존재요. 그러니 한번 말을 들어 보시오.”
당무천의 말에 서창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보아라.”
“다름이 아니라, 상방보검은 회수된 것입니까?”
“그렇다.”
“그렇다면, 이제 저자는 더는 나라에 청을 할 수 없지요?”
한빈의 질문은 이상했다.
너무도 당연한 것을 물어보는 것이다.
한빈의 질문은 마치 서창휘에게 약속을 받아 내려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서창휘는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그것도 맞다.”
“그럼 하나만 더 여쭙겠습니다. 상방보검이 있다면 누구나 대인께 청을 할 수 있습니까?”
“맞다. 신하 된 도리로 상방보검을 가진 자의 청은 들어줘야 한다.”
“그렇다면, 청을 드릴 자를 모셔도 되겠습니까?”
“…….”
한빈의 말에 서창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갸웃했다.
반대편에 있는 당무천도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의 말은 수수께끼와도 같았다.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한빈이 상방보검을 가진 자를 데려온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그런 자는 없었다.
모두가 난감한 표정으로 한빈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당무천이 눈을 가늘게 뜨며 사천당가의 정문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당무천의 모습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곳에는 중간중간에 꽂아 넣은 횃불만이 일렁이고 있을 뿐이었다.
모두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였다.
제갈공민이 당무천에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누군가 이쪽으로 오는 것 같군.”
“그게 무슨 말씀…….”
제갈공민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귓가에도 마차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드르륵.
드르륵.
어찌 보면 동창의 행렬보다도 소란스러웠다.
제갈공민은 마른침을 삼키며 당무천에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들은 누구입니까?”
제갈공민의 미간은 종이 한 장 들어갈 틈도 없이 좁아졌다.
동창이 와 있는 상태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이 판이 그만큼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이었다.
금선을 서창휘에게 내주기로 한 상태에서 또 다른 불청객이 온다라? 이는 무림세가에 흉이 될 가능성이 더 컸다.
그때 제갈공민은 한빈의 말을 떠올렸다.
한빈은 방금 청을 할 사람을 부른다고 했었다.
제갈공민은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도 같았다.
제갈공민은 멀리서 오는 불청객이 아군임을 확신했다.
옆에 있던 당무천도 슬쩍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한빈의 표정을 읽은 것이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제가 말한 분들이 저들입니다.”
“대체 저들이 누구인가? 팽 공자.”
제갈공민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한빈은 멀리서 다가오는 마차의 위쪽을 가리켰다.
그것에는 깃발이 하나가 있었다.
펄럭이는 깃발이 횃불에 얼핏 비치자 제갈공민이 눈을 크게 떴다.
“저건…….”
“신창양가의 마차군.”
당무천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그 마차는 한빈이 근처까지 타고 왔던 신창양가의 마차로, 신창양가의 깃발을 달고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왔다는 것을 천하에 알리듯 말이다.
드르륵.
드르륵.
마차 소리가 커지자 무림세가의 사람들도 눈을 가늘게 뜨고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서는 꽤 많은 무사가 마차를 호위하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병장기를 움켜쥐었다.
뒤쪽에 있던 그들은 아직 상대가 신창양가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다만 반사적으로 병장기를 움켜잡은 것이다.
스릉.
그들의 병장기가 반쯤 뽑혀 나왔을 때 그들도 상대의 깃발을 알아챘다.
“신창양가다.”
“헉, 신창양가가 여기에는 왜?”
“그러게? 무가지회에 온 적이 없는 가문이잖아.”
“대체…….”
그들이 놀란 눈으로 신창양가의 깃발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한빈이 천천히 그들 쪽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