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 파국(破局) (9)
한편, 한빈이 있는 곳으로 행군하듯 다가가던 동창의 행렬은 아직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경계의 눈빛을 보내는 것이다.
중앙 정계의 암투라면 동창을 따라갈 집단이 없었다.
자신들이 함정을 파는 만큼 남들에게 접근할 때도 조심하는 것이었다.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한빈도 그들의 움직임을 보고만 있었다.
깃발과 옷의 색으로 동창이라는 알 수 있었지만, 그들이 어느 지역의 소속이냐는 별개의 문제였다.
한빈은 안력을 돋궈 동창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를 바라봤다.
관모와 그를 둘러싼 호위로 봐서 아마도 강남 지역을 총괄하는 제독으로 보였다.
신분으로만 본다면 사천성 성주의 바로 아래라고 보면 되었다.
하지만 끈끈한 동창의 유대 관계 덕분에 실질적인 힘은 사천성주를 능가할지도 모른다.
그를 바라보던 한빈은 미간을 좁혔다.
동창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에게서 기세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이 반박귀진을 쓴 것처럼 말이다.
이 의미는 두 가지였다.
한빈보다 경지가 몇 단계 더 위이든가, 아니면 무공을 아예 모르든가 말이다.
동창에서 문사 출신이 인물이 저 위치까지 오른다?
아무래도 지략에 능한 자라 봐야 했다.
하지만 경지를 알 수 없는 절대고수라면?
한빈은 남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동창에 그런 절대고수가 일을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한빈은 힐끔 뒤쪽을 바라봤다.
한빈의 뒤쪽에는 이미 제갈공민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빈과 제갈공민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제갈공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빈을 스쳐 지나갔다.
동창의 행렬로 걸어가며 제갈공민은 한빈을 다시 한번 힐끔 바라봤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서였다.
사실 황금빛 폭죽이 터졌을 때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금선이 터뜨린 그 황금빛 폭죽은 누군가에게 보내는 신호가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동창이 나설 줄은 제갈공민도 몰랐었다.
제갈공민은 최대한 천천히 걸어갔다.
이것은 상대를 살피기 위함이었다.
동창과 현재 무림세가의 힘을 저울질해 보았다.
무림세가와 동창이 여기서 맞붙는다면?
제갈공민은 오십여 명이 넘는 동창의 무사들을 바라봤다.
모두 내시일지는 몰라도 저들 중 반 이상이 초절정의 고수였다.
그 정도로 정예를 모아 왔다는 것은 목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무림세가 하나 정도는 하루아침에 박살 낼 수 있는 세력이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무림세가의 집단과 맞선다면?
아마도 일 합도 맞서기 힘들 것이었다.
그만큼 여기 모인 무림세가 고수들은 무림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동창이 무서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가진 정치적인 힘이다.
그렇다면 그 정치적인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올까?
바로 정보였다.
상대는 무림세가의 세력에 대해 속속들이 조사하고 왔을 것이었다.
어떤 가문에 암시장에서 황실이 금지한 물품을 얼마큼 구매했는지?
어떤 가문에서 그 지방의 현령에게 얼만큼의 뇌물을 먹이고 얼만큼의 이득을 취했는지?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가문은 없으니까.
동창이 옭아매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없던 죄도 만들어서 황제에게 보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부터는 무력의 싸움이 아닌 정치적인 싸움을 해야 한다.
제갈공민은 눈을 가늘게 뜨고 동창의 제독을 바라봤다.
눈앞에 있는 동창 제독의 이름은 서창휘.
오래전 한 번 인사를 나눴던 사이였다.
예순은 족히 넘어 보이는 외모였지만, 허리가 꼿꼿한 것이 마치 대쪽 같은 학자의 풍모가 풍겼다.
거기에 눈매는 잘 벼린 칼을 연상시킬 정도로 날카로웠다. 눈매에서부터 내려오던 날카로움은 턱선을 지나 목으로 내려왔다.
그는 얼굴 전체에서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내공도 느껴지지 않는데 저렇게 절대적인 기세를 뿜어내고 있다는 것은 그가 헤쳐 온 난관이 그리 만만하지 않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제갈공민은 그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이 바닥에서 살아남은 것은 제갈공민도 마찬가지였다.
제갈공민은 그에게 가볍게 포권했다.
“서 제독을 뵙습니다.”
그는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인사를 건넸다.
이것은 당연한 행동이었다.
적은 무림세가의 자제들로 위장하고 침투하려 했다.
아무리 동창의 제독이지만, 그가 진짜라는 보장은 없었다.
더욱이 그는 금선이 내민 도움의 손길을 보고 달려온 것이 아니던가.
정확히는 불꽃 신호를 볼 수 있는 곳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고 봐야 했다.
그런 자를 믿을 수 있을까?
지금은 돌다리도 두들기면서 건너야 할 때였다.
포권한 제갈공민은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 서창휘가 고개를 끄덕인다.
“제갈 군사이시군. 오랜만에 뵙소.”
“저를 기억하시는군요.”
“나이가 먹어도 제갈 군사 같은 분을 기억 못 한다면 일에서 물러나는 것이 맞지 않겠소이까. 섬서에서 뵈었을 때와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실수를 했구려.”
“실수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무인에게 예전과 똑같다는 이야기는 실례가 아니겠소.”
서창휘의 각진 턱이 보기 좋게 휘어졌다.
누가 이 대화를 지켜본다면 오랜 친우의 만남으로 오해할 정도로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제갈공민은 재빨리 분위기를 살폈다.
한빈이 부탁한 것은 서창휘와의 협상이 아니었다.
한빈은 협상을 할 사람은 따로 있으니 최대한 시간을 끌어 달라고 했다.
제갈공민은 이 부분에서 의문이 남았다.
이 자리에서 동창 제독 서창휘와 협상할 수 있는 적임자가 있다면 과연 누굴까?
무림세가의 대표들에게 묻는다면 백이면 백 모두 자신을 지목할 것이었다.
제갈공민은 정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동시에 그의 가문은 중앙 정계에 한 발 걸치고 있었다.
제법 많은 인원이 관료로 진출해 있는 상황.
관과의 인연이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것은 선조인 제갈공명에서부터 시작된 인연이니까.
그런 자신에게 시간만 끌어 달라?
제갈공민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민도 잠시, 제갈공민은 환하게 웃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누추한 곳에는 무슨 일로…….”
“하하. 누추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천하제일의 무인들이 모인 자리를 어찌 누추하다 하겠소.”
“서 제독이 직접 왕림하시기에는 누추한 자리지요.”
서창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는 마치 제갈공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지만, 본론을 꺼내야겠소.”
“본론을 꺼내기 전에 차 한 잔 정도는 대접할 시간을 주시지요.”
“그 차는 임무가 끝나면 마시겠소.”
“이렇게 왕림하신 것이 동창의 임무 때문이었군요.”
“관무불가침이라는 말이 아직 유효하거늘, 내 어찌 사사로이 무림의 행사에 놀러 올 수 있단 말이요.”
서창휘가 씩 웃었다.
자신이 여기에 온 것은 관무불가침이라는 지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다.
“동창이 무림세가에 병사를 끌고 온 것은 엄연한 관무불가침 위반이 아닙니까?”
“평상시라면 그렇겠다 할 수 있소. 하지만, 지금은 예외요.”
“예외라니요?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황실에서 한 달 뒤면 큰 행사가 있소.”
“저도 그 행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행사와 여기에 오신 이유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군요.”
“행사를 준비하다 보면 강남에서부터 올려야 할 물품이 산더미라오.”
“혹시 필요한 물품이 있다면 저희가 발 벗고 도와드리지요.”
“물품은 됐고 금와 상단의 상단주를 데려가야겠소.”
“흠.”
“그는 황실 행사에 도움을 주던 자요. 이것은 나라를 위해서니 내주시오.”
“그자는 무림세가를 해치려던 자입니다. 관무불가침의 지시는 황제 폐하께서 공표한 지침입니다. 무림에서 죄를 지은 자인만큼 내어 드릴 수는 없습니다.”
제갈공민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렇게 말했으니 아마도 저들은 무력을 동원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금선을 내어 주든가 아니면 동창을 막아서든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유혈 사태가 일어난다면 그 책임은 오로지 무림세가의 몫이고 말이다.
제갈공민은 서창휘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서창휘는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 미소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때 서창휘의 뒤로 젊은 내시 둘이 기다란 상자를 들고 걸어왔다.
내시 둘은 서창휘의 앞에서 멈춰 섰다.
옆을 힐끔 보고 확인한 서창휘가 그때야 입을 열었다.
“뭐, 그렇게 하시오. 못 내주겠다고 한다면 동창이 어찌하겠소. 황실의 행사를 막은 것은 나중에 논하도록 합시다.”
“…….”
제갈공민은 말없이 서창휘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아직도 변화가 없었다.
금선의 신호를 받고 왔으면서 이렇게 물러난다는 것이 말이 안 되었다.
나중에 죄를 논하겠다고 했지만, 서창휘의 목적이 어찌 무림세가를 벌하는 데 있겠는가?
그의 목적은 금선을 살리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물러난다고?
제갈공민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모습을 보던 서창휘가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의 끝에 서창휘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내 하나만 부탁하리다.”
“……말씀하시지요.”
제갈공민이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지금이 마지막 승부처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순간 서창휘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남성인지 여성인지 모를 내시 특유의 미소가 그의 입가에 피어올랐다.
“상단주가 강남 동창에 맡긴 물건이 있어 그것만 전해 주고 가리다.”
“흠.”
제갈공민이 헛기침하며 내시가 들고 있는 물건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서창휘가 말을 이었다.
“그것도 안 되겠소? 그 물건이 제갈 군사에게 필요한 물건일 수도 있지 않겠소?”
“그러시지요.”
제갈공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항력이었다.
이것까지 막는다면 동창과 한바탕 싸우겠다는 선전포고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제갈공민의 허락에 서창휘가 두 명의 내시에게 턱짓한다.
“너희들은 그 물건을 상단주에게 전해 주어라.”
“명 받들겠습니다.”
“존명.”
두 명의 내시는 그 상자를 들고 천천히 금선에게 향했다.
동시에 무림세가 사람들을 양쪽으로 갈라졌다.
이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무림세가 사람들은 금선에게 폭약이 심어진 기관 장치로 호되게 당한 후였다.
저 상자가 폭약이라면?
그 가정이 그들의 신체를 지배한 것이다.
다만 무림세가의 대표와 고수들은 금선의 옆에 남아 감시하고 있었다.
드디어 상자가 금선의 앞에 놓였다.
내시들은 그 앞에서 금선이 상자를 열기 기다렸다.
금선은 상자를 천천히 열었다.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제갈공민의 눈이 커졌다.
금선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혹시?
순간 제갈공민이 외쳤다.
“피해!”
그 외침에 주변에서 금선을 감시하던 고수들이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멀리 떨어져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무림세가 사람들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제갈공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피하라고 한 것은 저 상자 안에 무림세가 사람들과 동귀어진할 만큼의 진천뢰가 담겨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금선을 바라보던 제갈공민의 눈에 한계까지 커졌다.
금선은 양손으로 황금빛 비단에 싸인 물건을 들고 있었다.
그 물건은 분명히 검이었다.
황금빛 비단을 수놓은 것은 황실을 나타내는 금룡이고 말이다.
순간 금선이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황금빛 비단을 벗겨 냈다.
그곳에서는 황금빛 비단보다 더 찬란히 빛나는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검을 본 누군가가 말했다.
“상방보검이다.”
“헉, 상방보검?”
“저게 왜 여기에…….”
모두는 떨리는 목소리로 금선이 들고 있는 상방보검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