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370화 (370/621)

370. 파국(破局) (8)

그들의 시선에도 한빈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한빈은 머릿속에 현재까지의 상황을 그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여러 감정이 담긴 한숨이었다.

하북팽가는 미리 솎아 냈기에 배신자가 없던 것일 뿐이라 생각했다.

과거로 거슬러 오지 않았다면 이 승부는 적의 의도대로 흘러갔을 것이다.

전생을 돌이켜 보니 마교가 주적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마교나 정의맹이나 누군가의 손에서 놀아난 것이 아니었을까?

이 의문을 이제부터 풀어야 했다.

한빈은 고개를 돌려 사천당가의 정문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팔짱을 끼고 뭔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에 설화가 물었다.

“공자님, 뭐 하세요?”

“손님을 기다리고 있지.”

“손님이요?”

설화는 눈을 크게 떴다.

한빈이 묘한 미소를 지었기 때문이었다.

표정을 수습한 설화가 재빨리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고는 한빈의 의도를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마차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르륵.

드르륵.

마차뿐이 아니었다.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따가닥.

따가닥.

그 소리는 제법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죽을 고비를 한 번 넘긴 무림세가의 사람들은 각자의 병장기를 잡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러운 손님의 방문은 그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모두가 마른침을 삼키고 있을 때 설화가 손뼉을 쳤다.

짝.

정문 쪽을 보며 보기 좋게 미소를 그린 설화가 살짝 허리를 숙였다.

준비되면 바로 튀어 나갈 자세였다.

그 자세 그대로 설화는 다가오는 마차를 향해 달려가기 위해 심호흡했다.

그 모습에 청화가 물었다.

“왜 그래요? 언니.”

“공자님이 기다리던 손님이잖아. 진심으로 맞이해야지.”

“그게 진심으로 맞이하는 거예요? 어딘가 수상한데요?”

“진심으로 손님을 맞이한다는 건 항상 힘든 일이니까. 잘 봐 둬.”

“네, 알았어요. 잘 봐 둘게요.”

말을 마친 청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청화는 손님 하면 떠오르는 것이 계약서가 든 보따리밖에 없었다.

그런데 설화가 계약서가 든 보따리를 그냥 두자 하니, 이해가 안 되었다.

설화는 청화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진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전에서 다리로.

다리에서 발바닥으로 기를 모으는 설화를 본 청화가 눈매를 좁히며 끼어들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살벌하게 느껴지죠? 우혈람검은 왜 뽑으신 거예요?”

“아까 공자님 표정 봤잖아. 손님이란 게 진짜 손님이겠어?”

“그럼요?”

청화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자 설화가 어깨를 쫙 펴며 당당히 답했다.

“적이 분명할 거야. 그렇다면…….”

설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청화가 알았다는 듯 재빨리 끼어들었다.

“저도 갈게요, 언니.”

청화가 눈을 빛내자 설화가 고개를 끄덕인다.

동시에 청화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이 때마침 온 당무천의 눈에 띄었다.

당무천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청화의 모습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얘야, 무엇을 찾느냐?”

“할아버지, 혹시 남는 단검 있으면 빌려주세요.”

“단검이라니…….”

당무천은 청화를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모든 일이 끝난 이 시점에도 불안한 듯 무기를 찾는 손녀가 불쌍했다.

당무천은 청화가 이제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떠올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

상상의 날개를 편 당무천은 갑자기 가슴이 저렸다.

그것도 잠시, 당무천은 재빨리 표정을 수습했다.

이런 약한 모습을 손녀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당무천은 조용히 시선을 돌려 한빈을 바라봤다.

납치된 마두의 손에서 구해 준 것도 모자라 아무 조건 없이 청화를 가족처럼 돌봐 준 것이 고마워서였다.

거기에 친언니처럼 옆에서 버티고 있는 설화의 존재도 고마웠다.

당무천은 청화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다독였다.

“할아버지! 표정이 왜 그래요?”

“아, 아무것도 아니다.”

당무천은 손을 내젓자, 청화는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청화는 드디어 어디선가 단검 하나를 구해서 손에 꼭 쥐었다.

그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던 한빈이 둘의 어깨를 잡았다.

“잠시만, 기다려 봐,”

“왜요? 공자님.”

설화가 우혈랑검을 오른손으로 꽉 쥔 채 눈을 빛냈다.

그 모습에 한빈이 한숨을 쉬었다.

“설화야, 너는 지금 오는 사람이 대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공자님이 말씀하신 손님이 저분들이 아닌 건가요?”

“맞긴 맞지. 그런데 저자를 어떻게 하려는 게냐?”

“우혈랑검으로 그냥…….”

설화가 말끝을 흐리자, 한빈이 한숨을 쉬었다.

“네가 저자의 목을 베면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세력과 싸워야 한다.”

“거대한 세력이요? 그동안 싸웠잖아요.”

“암제는 거대한 존재라고 하기보다는 고구마 줄기 같은 존재였지.”

“고구마 줄기요?”

“고구마 줄기는 어디까지 묻혀 있는지 모르는 법이잖아. 하지만 줄기를 잡고 가다 보면 언젠가는 뿌리가 나오는 법이지.”

“아, 그러면 저들은요?”

“저건 고구마 줄기가 아니라 거목의 가지란다. 썩었을지는 몰라도 말이지.”

“썩어요?”

고개를 갸웃하던 설화가 눈을 크게 떴다.

횃불 아래에서 펄럭이는 붉은색 깃발을 보았기 때문이다.

붉은색 천 위에는 청색의 글씨가 수놓아져 있었다.

[동(東)]

“저 깃발은…….”

설화가 말끝을 흐리자 한빈이 그 말을 받았다.

“동창의 깃발이지.”

한빈이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설화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저들의 멱을 따면 나라와 맞서야 했다.

그때였다.

옆에 있던 당무천도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사천당가와 동창은 연이 없을 텐데……. 무슨 냄새를 맡고 여기까지 왔을꼬?”

“아마 금선이 불렀겠지요.”

한빈은 연무장 가운데에 포승줄로 묶여 있는 금선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당무천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가 마지막에 쏘아 올린 황금빛 불꽃이 이제야 기억난 것이다.

그 불꽃이 동창을 부르는 신호였던 것 같았다.

강남 제일의 상단을 운영하다 보면 중앙 정계와 연이 없을 수가 없었다.

당무천은 그 연줄을 간과했다는 것을 후회했다.

그는 금선을 바라보며 살기를 피워 냈다.

차라리 그 자리에서 피떡으로 만들 것을 그랬다는 후회까지 들었다.

금선의 행위는 도저히 용서가 안 되었다.

거기에 금선이 속해 있던 집단이 청화를 납치했다고 하니 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무림의 정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천당가를 풍비박산 내려고 한 것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었다.

눈썹을 꿈틀대던 당무천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와도 저자는 못 내어 주네. 내 목을 걸고 저자는 내 손으로 처단할 것이야.”

“죄송하지만…….”

한빈이 살짝 말끝을 흐리자 당무천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그러나?”

“하찮은 일에 목숨을 걸 필요는 없습니다. 사천당가의 가주뿐 아니라 이곳에 어떤 누구라도요.”

“허.”

당무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무천은 한빈이 북경의 정계를 너무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무천은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마 저자를 동창에 넘기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풀려날 것일세. 동창은 없던 법도 만들고 있던 법도 지울 수 있는 집단이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할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나라와 싸울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설마 저자를 넘겨주겠다는 것인가?”

“넘기지 않을 겁니다.”

“그럼 나와 함께 동창을 막을 텐가?”

“그것도 싫습니다.”

“허허.”

당무천은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한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한 가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르신.”

“말해 보게.”

“동창과 협상이 끝나기 전에는 무림세가 측이 어떤 협상도 하지 못하도록 막아 주십시오.”

한빈은 뒤쪽을 가리켰다.

한빈이 걱정하는 것은 하나였다.

금선을 통해서 밝혀내야 할 것은 한 가지가 아니었다.

암제라는 고구마 뿌리를 캐냈지만, 그 줄기가 어디까지 뻗쳐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물론 한빈의 몫은 아니었다.

십대세가의 대표들이 해야 할 일들이었다.

이번 무가지회에서 주제는 바뀌어야 했다.

사파를 어떻게 견제하느냐에서 금선과 연결된 줄기를 모두 드러내는 것으로 말이다.

하지만 동창이 온 것을 보고 감정을 드러내면 모든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다.

당무천 혹은 십대세가의 대표들이 통제하지 않는다면?

금선을 넘겨주기 싫어서 검을 뽑아 드는 무림세가가 나올 수도 있었다.

그 검이 동창을 향하거나 금선을 향하거나, 둘 다 문제였다.

금선의 목이 달아나는 순간 이제까지 힘들여서 수 싸움을 펼친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대국에 빗대어 말하면 파국을 맞이하는 것은 무림세가 측이라는 말이었다.

당무천이 기세를 뿜으며 무림세가 쪽으로 걸어가자, 술렁임은 이내 고요함으로 바뀌었다.

모두가 눈을 가늘게 뜨며 다가오는 동창의 행렬을 바라볼 뿐이었다.

동창의 행렬은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려는 듯 최대한 천천히 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빈은 설화를 바라봤다.

“설화야, 폭죽 남은 거 있지?”

“무슨 색으로요?”

“붉은색으로…….”

“여기 있어요.”

“당겨.”

“네?”

“그냥 시원하게 당겨 버려.”

한빈이 고개를 손짓하자, 설화가 뒤쪽으로 달려가 보따리에서 폭죽 하나를 끈을 당겼다.

순간 설화의 머리 위로 불꽃이 솟아올랐다.

쉬잉.

하늘 높이 날아간 폭죽이 터졌다.

팡!

달만 덩그러니 떠 있는 하늘을 배경으로 불꽃이 수를 놓았다.

마치 잘 그린 난처럼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불꽃에 모두는 눈을 크게 떴다.

무림세가 사람들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을 향해 달려오던 동창의 행렬도 움직임을 멈췄다.

그들도 하늘 위를 수놓고 있는 폭죽을 보며 의문을 떠올렸다.

* * *

모두가 폭죽을 보며 의문을 떠올릴 때, 사천당가에서 오백 걸음 떨어진 곳에 있던 무리는 들썩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움직일 때가 된 것을 기뻐하듯 눈을 빛냈다.

그 무리 중 가장 앞선 이는 양예신이었다.

“이제 출발하자!”

양예신의 외침에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신창양가의 무사들이 천천히 사천당가를 향해 나아갔다.

양예신의 표정은 비장했다.

그는 사천당가의 앞마당에서 벌어진 싸움을 모두 지켜봤다.

그 싸움을 보고 피가 끓지 않을 무인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양예신은 참았다.

한빈이 당부한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한빈은 별도의 신호가 있을 때까지는 나서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싸움이 끝날 때까지 아무런 신호도 없었다.

양예신은 자신을 여기까지 왜 불렀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가문의 상방보검을 가져오라 했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부탁을 할 거면 차라리 금은보화를 요구하는 것이 더 나았다.

가문의 상방보검까지 가져오라 했으면 그에 합당한 임무가 주어져야 한다.

한빈과 장자명이 가문에 베푼 은혜는 상방보검 하나가 아니라 가문의 모든 재산을 털어도 갚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실망도 잠시뿐이었다.

양예신은 사천당가의 정문을 지나는 행렬에 한빈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 번에 깨달았다.

상방보검을 가져오라는 뜻도 대충 알 수 있었다.

양예신은 모두에게 이동할 준비를 시켰다.

그러던 중 약속한 붉은 폭죽이 터진 것이다.

양예신은 자신의 역할이 그리 작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전쟁이라는 것이 모든 전력을 한 번에 털어 넣는 법은 없었다.

모든 전력을 털어 넣어 승리하면 그게 가장 최선이었다.

금선이 숨겨 놓은 한 수가 동창이라면, 신창양가는 한빈이 숨겨 놓은 한 수였다.

그렇게 생각한 양예신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올라갔다.

이번에야말로 은혜를 갚을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사천당가의 정문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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