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9. 파국(破局) (7)
허공에서 터진 피풍의는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다.
조그만 천 조각이 바람처럼 휘날리다가 갑자기 아래로 떨어진다.
어찌 보면 매화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국화 꽃잎과도 같은 천 조각이 바닥에 떨어졌다.
투둑. 투둑.
그것은 소나기였다.
사도련의 독고진이 눈을 크게 떴다.
“마치 화산의 앞마당을 보는 것 같군. 매화꽃이 흩날리는 늦봄의 화산이야. 아니, 국화가 날리던 곤륜의 모습과도 비슷한가? 역시 명불허전이라더니…….”
독고진은 추억을 떠올리는 듯한 눈빛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때 제갈공민이 언제 왔는지 끼어들었다.
“그것도 하늘을 덮은 꽃비군요. 만천…….”
제갈공민의 말을 독고진이 이었다.
“화우.”
그 순간 무림세가의 고수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만천화우라니!”
“저건 당가에서 사라진 무공이 아니던가?”
“그러게 말일세.”
“자, 잠시만 기다려 보게. 만천화우가 문제가 아니지 않나. 당무천이 어떻게 저런…….”
“헉, 죽은 거 아니었어?”
무림세가 고수들의 눈은 한계까지 커졌다.
말을 안 했지만, 십대세가의 대표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 무가지회를 사천당가에서 개최한 이유가 무엇이던가?
원인 불명의 병을 앓고 있던 당무천을 위해서였다.
수많은 무림세가가 모이는 무가지회를 개최해서 당무천을 치료하는 것이 숨은 이유였다.
그들이 놀라는 사이에도 꽃비가 된 피풍의 조각이 무서운 기세로 금선의 진영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투둑. 투둑.
금선이 있는 진영의 중심에 박히다 보니 그들은 점점 뒤로 밀렸다.
주변을 살피고 피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금선과 그의 수하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의 귓가에 날카로운 파공성이 울렸다.
휘릭.
고개를 돌린 금선의 눈이 커졌다.
뒤쪽으로 물러나던 수하 중 몇이 걸음을 멈춘 것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금선과 수하는 동작을 멈췄다.
순간 걸음을 멈춘 자 중 하나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툭.
데구루루.
금선이 외쳤다.
“더는 물러서지 마라!”
함정이 묘하게 바뀐 것이다.
적을 몰아넣기 위해 파 놓은 함정인데, 이제는 자신을 위협하는 칼날이 되어 돌아왔다.
아악.
억!
비명이 금선의 귓가를 덮었다.
만천화우에 당해 쓰러지는 수하들의 목소리였다.
뒤에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난공불락의 함정이 버티고 있고 앞쪽에서는 당무천이 만들어 낸 꽃비가 기세를 뿜어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금선은 자신도 모르게 적의 진영을 바라봤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누가 이렇게 완벽한 함정을 파 놓았단 말인가?
어떻게 당무천까지 저리 멀쩡하게 날뛰고 있단 말인가?
금선의 머릿속에서는 의문이 쌓여 갔다.
금선은 조용히 적진을 살폈다.
이 모든 계획을 애송이가 짰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제갈공민은 확신했다.
확신이 들자 그는 다시 머리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문제는 상대측이 자신의 계획을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하는 점이었다.
설마 자신의 마지막 수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의문을 피워 올리던 금선이 고개를 갸웃했다.
제갈공민의 표정 때문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제갈공민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이 일을 계획한 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때 그 옆에 애송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애송이는 분명히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설마?
금선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있을 때였다.
당무천이 서서히 이쪽으로 걸어왔다.
스륵. 스륵.
옷자락이 땅에 스치는 소리만이 살짝 들려온다.
그 소리는 당무천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당무천의 손을 잡은 소녀가 내는 소리였다.
그 소녀는 물론 청화였다.
청화는 당무천의 손을 잡고 적진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었다.
당무천은 청화를 보며 슬며시 웃었다.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표정이었다.
사실 당무천은 감정을 반쯤은 속이고 있었다.
본래 성격대로라면 상대를 모두 한 줌 피떡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것이 사천당가의 방식이니까.
하지만 하북팽가 사 공자와의 약속 때문에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마지막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모두가 한빈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당무천은 이제까지 참아 왔던 모든 것은 이번 한 수에 퍼붓고 있었다.
투둑. 투둑.
그가 뿌린 만천화우는 아직도 적들에게 떨어지고 있었다.
이것이 만천화우의 무서운 점이었다.
세상에 어떤 고수가 비를 피할 수 있을까?
이것은 그냥 소나기가 아니었다.
빗방울 하나하나가 막강한 기세와 독을 품고 있는 소나기였다.
한 번만 스쳐도 적에게는 치명적이었다.
터벅터벅.
당무천은 만천화우 속으로 걸어갔다.
그것도 청화의 손을 잡고 말이다.
순간 이를 지켜보던 무림세가의 고수들이 눈을 크게 떴다.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당무천과 청화를 가리켰다.
“헉, 저기를 왜 걸어가?”
“그러게 말이야. 저건 자만…….”
누군가는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둘의 모습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바닥에 비수처럼 꽂히는 만천화우가 당무천과 청화만은 피해 갔기 때문이었다.
말끝을 흐린 무림세가의 고수는 안력을 돋궈 당무천을 관찰했다.
“음.”
그는 침음을 삼켰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될 현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래로 꽂히는 꽃비가 당무천의 한 뼘을 두고 힘을 잃었다.
“설마…….”
그가 말끝을 다시 흐리자 옆에 있던 고수가 말을 이었다.
“저건 분명 호신강기일세.”
“만천화우를 튕겨 내는 호신강기라고?”
“호신강기로 만천화우를 튕길 수 있으면 그건 진정한 만천화우가 아니지 않나?”
“그러게 말일세. 우산으로 막을 수 있는 만천화우라면 그건 진정한 만천화우가 아니지.”
“이건 모순일세.”
무림세가 사람들은 당무천의 한 걸음 한 걸음에 마른침을 삼켰다.
마지막에 말한 자의 말은 모두가 공감하는 바였다.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과 무엇이든 막을 수 있는 창.
창은 물론 만천화우였다.
하지만, 그런 만천화우를 막을 수 있는 호신강기가 존재한다면?
물론 한두 방울의 비는 호신강기로 피할 수 있다.
하지만 계속 떨어지는 빗방울 모두를 호신강기로 피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고 하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그것이 만천화우의 무서운 점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독지체!”
모두는 그 목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사도련의 독고진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당무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 무림세가 진영의 사람들은 흥분한 목소리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공독지체라고?”
“자세히 보게! 호신강기가 아니야.”
그들은 하나같이 손을 들어 당무천을 가리켰다.
당무천을 가리킨 그들의 검지가 미세하게 떨린다.
그때 누군가의 웃음이 들렸다.
“하하.”
내공이 실리지는 않았지만, 호기로운 기세가 담긴 시원한 웃음이었다.
그 웃음을 흘린 이는 사도련의 독고진이었다.
그 웃음을 뱉어 낸 독고진이 한빈을 바라봤다.
“두 번째도 합격일세. 이제 마지막 시험만 통과하면 만통(滿通)일세.”
“아까부터 합격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건 비밀일세. 우리 누님이 비밀로 하라고 하셔서…….”
독고진은 흐뭇한 눈빛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상대는 사파의 반을 가지고 있는 자였다.
그런 자가 지금 과거 시험의 감독관처럼 자신을 평가하고 있었다.
과연 무엇을 평가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물어볼 수는 없었다.
아니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아직은 한빈이 의도한 대로 모든 것이 흘러가고 있으니까.
당무천은 천천히 금선을 향해 나아갔다.
사실 현 상황에 대해 가장 놀라고 있는 것은 당무천이었다.
만독지체를 넘어서 공독지체를 이루고 이제는 만천화우까지 펼칠 수 있었다.
사실 당무천은 독 기운으로 호신강기를 펼치려 했다.
만천화우와 같은 힘으로 펼친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하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아수라장으로 걸음을 옮긴 것이다.
그 행동에는 사천당가의 건재함을 보여 주겠다는 속셈이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선 의도는 손녀인 청화에게 할아버지가 건강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손녀인 청화의 공독지체의 경지가 자신보다 높았다.
청화는 당무천이 펼친 만천화우에 담긴 기운을 본능적으로 흡수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쏟아지는 만천화우가 당무천과 청화의 주변에서 힘을 잃고 흩어지는 것은 청화가 그 기운을 모두 앗아 갔기 때문이다.
놀람을 숨긴 당무천은 흐뭇한 눈빛으로 청화를 바라봤다.
후생가외(後生可畏)라 했던가?
이제는 후대에게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청화를 바라보던 당무천의 눈썹이 꿈틀했다.
청화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화는 한빈과 설화가 있는 쪽을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마치 오래된 가족처럼…….
당무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상황을 인정한 것이다.
전 같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아무래도 이번 일로 무공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경지가 높아진 것 같았다.
당무천의 눈썹이 반달 모양을 그렸다.
앞으로 오를 곳이 있다고 생각하니 즐거워진 것이다.
당무천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금선이 있었다.
당무천은 드디어 화풀이할 곳을 찾았다.
순간 당무천의 기세가 바뀌었다.
만천화우가 만들어 낸 꽃비가 소용돌이쳤다.
마지막 힘을 짜내듯 말이다.
숨 몇 번 지날 시간이 지나자, 만천화우의 기세가 사그라들었다.
당무천은 사람 좋은 얼굴로 상대를 바라봤다.
만천화우를 맞은 금선의 인피면구가 반쯤은 벗겨져 있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만천화우에 휩쓸린 덕분에 그들의 외모는 무림세가의 사람들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때였다.
휘리링.
산들바람이 다시 주변을 휩쓸고 지나갔다.
꽃비가 되어 쏟아지던 조각난 피풍의가 바람에 실려 덩실거리며 날아갔다.
이제는 만천화우의 기세가 사라진 것이다.
순간 금선과 그의 수하들이 무릎을 꿇었다.
자신의 의지는 아니었다.
갑자기 내공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과 함께 바닥에 널브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털썩.
털썩.
그 모습에 당무천은 오른손을 높이 올렸다.
그러고는 앞을 가리켰다.
“포박하라!”
그 외침과 더불어 사천당가의 무사들이 달려갔다.
금선과 그의 수하 그리고 배신자들이 포승줄에 묶이자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제야 끝났군.”
“이만하길 다행일세.”
그들의 웅성거림을 뒤로한 채 한빈은 비파를 들고 조용히 그들 사이를 지나갔다.
* * *
용봉지회가 열리던 비무대 주변.
폭발의 영향으로 아수라장이 된 곳 중 가장 멀쩡한 곳이 바로 비무대 주변이었다.
비무대를 중심으로 금선과 수하 그리고 가문을 배신한 반역도들이 포승줄이 꽁꽁 묶인 채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무림세가 사람들의 표정은 편하지만은 않았다.
평범한 전쟁에서의 승리라면 사기가 하늘을 찔러야 할 텐데, 이것은 평범한 전쟁이 아니었다.
대부분 가문에서 배신자가 한두 명은 나왔으니 말이다.
웅성거리던 그들은 조용히 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한빈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사실 한빈의 정체였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승리의 중심에는 한빈이 있었다.
하지만 한빈의 정확한 정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가문은 천하 십대세가밖에는 없었다.
나머지 가문은 한빈의 정체에 대해서 추측만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