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 파국(破局) (5)
제갈공민이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물었다.
“왜 나를 가리키는가?”
“군사님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군사님의 손을 말씀드린 겁니다.”
“내 손이라…….”
제갈공민은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손에는 검은 먹물이 아직도 묻어 있었다.
그러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들은 딱 둘로 구분되었다.
하나는 오른손이 검은 자고 또 다른 하나는 오른손이 멀쩡한 자였다.
제갈공민이 즉시 외쳤다.
“모두 손도장을 찍은 팔을 높이 들어라!”
순간 돌다리를 중심으로 손을 든 무사들과 손을 들지 않은 무사들로 나누어졌다.
손을 든 무사들의 손이 이전에 찍었던 손도장으로 인해 온통 검게 물들어 있는 것은 당연했다.
사사-삭.
금선 측 무사들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순간 한빈이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맞춰 횃불이 하나둘씩 켜졌다.
이전보다도 더욱 많은 횃불이 주변을 밝혔다.
주변이 더욱 환해지자 돌다리를 기준으로 금선의 측과 무림세가 측으로 완전히 갈라졌다.
자연스럽게 나뉜 진영을 본 제갈공민이 한빈을 바라봤다.
그의 입에는 미소가 한 다발 걸려 있었다.
제갈공민은 미소 어린 입술을 열었다.
“다 뜻이 있었군. 내 오해했네.”
“오해라니요?”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서약서 말일세. 어찌 보면 무리한 요구가 아니던가?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기 위한 도구라는 걸 이제야 알았네. 허허.”
제갈공민은 여러 감정이 뒤섞인 한숨을 토해 냈다.
그 모습에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게 아니었나?”
“서약서는 진짜입니다. 가문과 가문, 아니 가문과 저 사이에 맺은 진짜 계약입니다.”
“대체…….”
“설마 일이 끝나면 입을 씻으려고 하는 건…….”
“흠.”
제갈공민은 재빨리 헛기침으로 한빈의 말을 막았다.
한빈이 미간을 좁히며 제갈공민을 아래위로 훑었다.
“뒷간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더니 설마 군사님도 그러신 건 아니겠죠?”
“아니네,”
“남아일언!”
“중천금일세.”
제갈공민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끌려들어 가는 느낌을 자꾸 받는 것을 왜일까?
제갈공민은 이것이 이해가 안 되었다.
제갈공민의 표정을 본 한빈이 말했다.
“서약서는 나중에 지키시면 되고 지금은 가문을 지켜야 할 때가 아닌가요?”
“자네 말이 옳네.”
제갈공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의 말대로 이제는 적을 마무리해야 할 때였다.
제갈공민은 시선을 돌려 금선을 바라봤다.
돌다리를 기준으로 뒤쪽으로 물러서는 그들은 누구 봐도 당황한 모습이었다.
자연스럽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금선은 수하들에게 말했다.
“모두 사천당가로 들어간다.”
그 지시에 몇몇 무사가 다시 비파를 잡기 위해 뛰어갔다.
가장 먼저 도착한 무사가 말했다.
“비파가 없어졌습니다.”
“지금 뭐라 했나?”
“비파가 없어졌습니다. 우리가 쳐 놓은 함정을 해제할 방법이 없습니다.”
“대체…….”
금선은 고개를 돌려 제갈공민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제갈공민도 적들의 반응이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상황이라면 사천당가의 안쪽으로 들어가 농성을 벌이는 것이 맞았다.
사천당가가 천의 요새라고는 하나 모두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다면 살길이 있을 터였다.
그런데 적은 쭈뼛대면서 적진에서 멀뚱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갈공민은 재빨리 주위를 돌아봤다.
그때 옆쪽에서 물건을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쓰윽. 쓰윽.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린 제갈공민이 눈을 크게 떴다.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는 설화와 청화가 뭔가를 끌고 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비파였다.
제갈공민은 고개를 돌려 적진을 바라봤다.
그는 그제야 적들이 난감해하는 이유를 알았다.
그때 한빈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자기 꾀에 자기가 빠진 꼴이죠.”
“허허, 언제 저걸 다 뽑아 왔는가?”
제갈공민은 허탈하게 웃었다.
기관 진식에 관해서라면 자신을 따라올 자가 없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저 비파를 뽑아 올 생각까지는 못했다.
저 비파는 함정을 발동시키는 기관을 여닫는 열쇠였다.
그 열쇠를 가져온 것이다.
설치한 사람은 금선이지만, 이제는 통제권을 잃은 것이다.
즉 금선은 한마디로 독 안에 든 쥐가 되었다는 뜻.
제갈공민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오늘 처음 보이는 여유였다.
제갈공민의 모습에 한빈이 답했다.
“달빛이 사라졌을 때 심심해서 뽑아 놓은 겁니다. 참, 비파는 우리 아이들 겁니다. 그러니 다른 말 하기 없습니다.”
“흠, 또 장사를 하려는 건가?”
“장사라니요. 대의를 위해서입니다. 이제 서서히 정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한빈이 씩 웃자 제갈공민이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바라봤다.
“정리라…….”
당장에 저들을 정리하기에는 인원이 부족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길목을 막고 저들의 힘이 떨어지기까지 기다리는 것이었다.
제갈공민이 막 말을 이으려 할 때였다.
뒤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멀리서 횃불을 든 대규모의 병력이 이쪽으로 다가온다.
점점 가까워지는 횃불에, 무림세가의 고수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저건 누구지?”
“지금 누가 오는 거야?”
그들이 당황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뒤에서 오는 이들의 기세가 묘했기 때문이다.
모두 회색 무복을 입고 있었으며 익숙하지 않은 기세를 피워 내고 있었다.
터벅터벅.
이제는 발소리까지 귀에 들릴 정도였다.
그들의 행렬이 코앞까지 도달하자 그들은 동요했다.
“저기 보게.”
“뭘 말인가?”
“저기 휘날리는 깃발 말일세.”
“깃발이라……. 헉.”
모두는 뒤쪽에서 다가오는 깃발을 보고 까무러치도록 놀랐다.
그 깃발은 다름 아닌 강남 사도련의 깃발이었다.
“혹시, 이 모든 게 강남 사도련이 꾸민 일이란 말인가?”
“저자들과 관계가 없다고 해도 문제 아닌가? 지금 우리는 그야말로…….”
그는 말끝을 흐렸다.
자신이 말을 맺으면 사기가 더욱 꺾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무림세가의 무사들은 반으로 나뉘어 금선과 뒤쪽에서 다가오는 강남사도련의 행렬을 동시에 경계했다.
제갈공민은 이 상황이 황당할 따름이었다.
그가 판단하기에는 금선과 강남 사도련은 아무 관계도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때맞춰 나타났다는 것은 딱 한 가지 경우였다.
그들이 호시탐탐 정파를 노리고 있었다는 가능성밖에는 없었다.
제갈공민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묘책을 짜내려 하고 있을 때였다.
한빈이 한 발 나오며 외쳤다.
“이제 그만 나오시지요!”
말을 마친 한빈은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뒤쪽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터벅터벅.
땅바닥에 발자국을 남길 기세로 걸어온 고수는 조용히 한빈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제갈공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왔는데 바닥에 발자국이 선명했다.
분명히 내공을 싣지는 않았다.
오직 힘만으로 바닥에 발자국을 남긴 것이다.
그렇다고 걸음걸이에 흐트러짐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머리에 술이 가득 든 술잔을 올려놔도 흘러내릴 것 같지 않은 안정된 보법이었다.
그런데 힘만으로 발자국을 남겼다고?
그런 인물이 사파에?
그것도 강남 사도련에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생각을 이어 나가던 제갈공민의 눈이 커졌다.
생각해 보니 딱 한 명이 있었다.
제갈공민이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었다.
“설마…….”
말끝을 흐린 제갈공민은 재빨리 사내 쪽으로 달려갔다.
다급히 달려온 제갈공민을 본 사내가 말했다.
“나는 강남 사도련의 독고진이라고 하오.”
사내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독고진이라면……. 그렇다면 강남 사도련주라는 말입니까?”
제갈공민이 눈을 크게 떴다.
강남 사도련의 수장인 독고진은 강호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자였다.
그래서 바로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나타나다니?
강남 사도련주가 이 자리에 나타났다는 의미는 딱 하나였다.
자칫 잘못하면 무가지회에 참석한 고수들 모두가 세상에서 지워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뒤쪽에는 금선.
앞쪽에는 강남 사도련이라?
그것도 사파의 절대고수가 함께 왔다니!
제갈공민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그것도 잠시, 제갈공민은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지금은 활로를 찾아야 할 때였다.
제갈공민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귀인께서 오시다니……. 때마침 이런 상황에서 걸음을 하신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소?”
그 말에 독고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제갈공민의 질문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
독고진은 아무 말 없이 제갈공민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달빛을 받은 독고진의 얼굴에는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나타났다.
그 표정을 본 제갈공민은 적잖게 당황했다.
독고진이 답이 없다는 것은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순간 제갈공민의 머릿속에는 오만 가지 가능성이 한 번에 떠올랐다.
독고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가?
그는 정파의 적인가?
정의맹의 군사가 되고서 가장 당황한 순간이었다.
이전에 금선과 일대 격전을 벌일 때도 이리 당황하지는 않았었다.
밀려오는 폭발에도 이렇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입술이 바싹 마르는 상황이었다.
그 모습에 독고진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휴. 저들이 이 모든 일을 사도련에게 뒤집어씌우기로 했다고 들었소만, 아니오?”
“저들이라면…….”
제갈공민은 독고진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금선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아마 독고진의 목소리는 못 들은 것 같았다.
제갈공민의 생각대로 금선은 그들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다만, 새로 등장한 세력이 강남 사도련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거기에 강남 사도련의 수장까지 왔다.
금선도 강남 사도련주인 독고진의 명성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왔다.
세상에 얼굴을 비치지 않은 절대고수.
긴 머리에 하얀 얼굴.
여인처럼 홀쭉하지만, 역발산의 기세를 표출하는 지금의 모습.
거기에 반로환동한 듯한 외모는 독고진이 맞았다.
금선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무기를 휘두를 수 있었다.
그 무기는 바로 금력.
강남 사도련의 등장으로 금선의 눈빛은 다시 살아났다.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정파와 사파는 어차피 견원지간이 아니던가?
이 상황에서 사파에 미끼를 던져 준다면?
그 미끼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은보화라면?
강남 사도련은 넘어오지 않고는 못 배길 터였다.
금선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씩 적진을 향해 나아갔다.
천천히 나아가던 금선은 일정 거리에서 멈춰 독고진을 향해 외쳤다.
“나는 금와 상단의 금선이오! 정파의 목을 벤다면 당신에게 내 재산의 반을 떼어 주리다. 어떠하오?”
그 외침에 가장 놀란 것은 제갈공민이었다.
금선이 저렇게 나올지는 몰랐던 것이다.
그때였다.
독고진이 웃었다.
“하하.”
그 짧은 웃음에 모두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의미가 짐작이 안 되었던 것이다.
제갈공민도 그 웃음의 진의를 해석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멀리 있던 금선도 독고진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알 수 없었다.
모두가 마른침을 삼킬 때 독고진이 입술을 뗐다.
“지금처럼 말할 거라고도 하더군.”
“…….”
제갈공민은 말없이 독고진을 바라봤다.
살짝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 표정을 본 독고진이 손을 들었다.
그 신호에 뒤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그는 서생 복장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