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파국(破局) (3)
적진을 바라보던 금선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적진의 연기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어서 안력을 돋구지 않으면 적진의 상황을 살피기가 힘들었다.
금선은 그 연기 속에 널브러져 있는 적들을 상상했다.
만약에 살아남은 적이 있다면 어떻게든 포로로 잡아 그가 속한 무림세가의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 이득이었다.
이제는 마지막 연기만 걷히고 나면 강호의 반은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휘잉.
한 줄기 서늘한 광풍이 사천당가의 초입을 쓸고 지나갔다.
남아 있던 연기가 바람을 타고 사라졌다.
순간 번쩍이던 금선의 눈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시체나 부상자가 쌓여 있어야 할 적진에는 아무도 없었다.
“흠.”
금선이 눈을 가늘게 뜨며 헛기침을 뱉었다.
대충 상황은 이해가 되었다.
아무래도 장치한 폭약 중에 불발탄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무림세가의 무사들은 분명히 사천당가의 안쪽으로 숨어들었을 것이다.
뭐, 그리 상관은 없었다.
이쪽에서 비파의 현을 몇 번 튕기는 것만으로 삼도천을 건널 배에 적을 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금선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를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적진 한가운데서 누군가가 일어났다.
천천히 일어난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기지개를 켰다.
“아, 잘 잤다.”
그 목소리에 금선의 눈썹이 꿈틀했다.
지금의 목소리는 금선을 약 올리던 애송이가 맞았다.
금선은 황금빛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함정이 소용돌이치는 경계선의 앞에서 멈춘 금선이 외쳤다.
“또 네놈이구나!”
“그래, 나다.”
“허허, 알 수 없는 놈이로고. 나이를 보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 같은데……. 설마 반로환동이라도 한 노고수란 말이냐?”
“반로환동이라……. 뭐,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 한 이십 년은 젊어 보이나 모르겠네.”
한빈이 활짝 웃었다. 거짓이라고는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는 소탈한 웃음이었다.
물론 거짓은 아니었다.
반로환동한 것은 아니었지만, 세월을 거슬러 온 것은 맞았으니까.
그때 금선이 내공을 담아 외쳤다.
“거짓!”
“거짓은 네 얼굴이고!”
한빈이 금선의 얼굴을 가리켰다.
“이놈이…….”
말끝을 흐린 금선이 눈썹을 꿈틀댄다.
살짝 꿈틀대던 눈썹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요동쳤다.
상계에서 잔뼈가 굵은 그였다. 무림과 상계, 둘 중 어느 쪽에서 살아남는 것이 힘들까?
이 물음에 금선은 상계라고 답할 것이다.
목숨을 건 싸움보다는 돈줄을 건 싸움이 더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런 아수라장을 뚫고 강남에서 제일가는 상단인 금와 상단을 일으킨 것이 자신이었다.
돈과 생명을 걸고 상대를 하나씩 쓰러뜨리면서도 눈 하나 깜짝 안 했던 그였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 달랐다.
상대가 자신의 계책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서만은 아니었다.
대화하는 것 자체만으로 평정심에 금이 갔다.
금선은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상대를 갈기갈기 찢어 놓고 싶었다.
그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금선의 꿈틀대는 눈썹을 본 한빈이 피식 웃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였다. 아마 저리 동요하는 것은 승기가 자신에게 있다고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말없이 금선을 바라보던 한빈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미소를 지우고 진지한 표정으로 외쳤다.
“나랑 농담 따먹기 하다가 줄행랑칠 기회를 잃어버렸네. 이걸 어째?”
“지금 뭐라 했나? 혹시 네가 독 안에 든 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가?”
“쥐는 너고. 나는 독이 아닐까 하는데…….”
“이 싸움이 끝나면 네놈의 간사한 혀를 잘라 술을 담그겠다.”
“성공한다면 희대의 명주가 되겠네. 네 혀도 같이 넣어 주지 뭐……. 한번 맛보고 싶네. 쩝.”
한빈이 놀리듯 입맛을 다시자 금선은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비파를 든 무사들에게 눈짓했다.
순간 무사 중 하나가 비파를 두 손으로 잡았다.
마치 열쇠를 돌리듯 바닥에 박은 비파를 돌리자 공간의 변화가 생겼다.
한빈과 금선 사이의 함정에 길이 생긴 것이다.
금선은 한빈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쩝, 이제부터 사냥을 해 볼까? 기대하거라, 애송이.”
“그건 내가 할 말이지.”
말을 마친 한빈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모습에 금선이 걸음을 멈췄다.
한빈의 태도가 아무래도 수상했던 것이다.
금선은 조용히 주위를 둘러봤다
.
순간 금선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자신이 무심코 지나친 것이 뭔지를 깨달은 것이다.
금선은 재빨리 손짓했다.
순간 흑색 무복을 입은 무사들이 일제히 움직이며 진을 구축했다.
그때 한빈의 웃음소리가 주변에 울렸다.
“하하, 눈치는 제법 빠르네.”
“…….”
금선은 한빈에게 답하는 대신 조용히 몸을 돌렸다.
뒤쪽에서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순간 금선의 눈이 커졌다.
금선의 뒤쪽은 제법 큰 수로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수로의 건너편에 무사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대체…….”
금선은 말을 맺지 못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무림세가의 고수들이었다.
폭발에서 죽었거나 요행으로 사천당가의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멀쩡하게 금선을 포위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앞으로 한 걸음 나왔다.
그 모습에 금선은 눈을 크게 떴다.
금선이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정의맹의 군사 제갈공민이 서 있었다.
제갈공민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금선을 바라봤다.
“입장이 바뀌니 어떤가?”
“이런 쥐새끼 같은 놈.”
“십이지신 중 가장 앞에 있는 것이 쥐 아닌가? 그렇다면 대장이라는 이야기인데, 칭찬으로 알겠네.”
제갈공민은 정의맹의 군사답게 입심에서 지지 않았다.
하지만 금선은 감정을 수습하고는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금선이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검을 뽑았다.
스릉.
금선이 내민 검이 달빛에 예기를 뿜어냈다.
자신의 검을 흡족한 듯 바라보던 금선이 입을 열었다.
“차라리 그냥 도망갔으면 편했을 것을, 이리 수고를 덜어 주다니 고맙네.”
반대편에 있던 제갈공민도 한 걸음 나왔다.
“형님, 나오시죠.”
“형님이라고?”
금선은 고개를 갸웃했다.
제갈공민이 뱉은 형님이란 단어는 금선에게 혼란을 주었다.
제갈공민은 힐끔 뒤쪽을 바라봤다.
거기에 맞춰 뒤쪽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터벅터벅.
그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듯 발걸음에 내공을 실었다.
제갈공민의 옆에 선 사내는 평온한 표정으로 금선을 바라봤다.
그는 다름 아닌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공영이었다.
금선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분명히 귀락천에 있는 장원의 지하에 묻혔을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눈앞에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되었다.
금선과 시선이 마주치자 제갈공영이 말했다.
“내가 죽은 줄 알았나?”
“…….”
“자네 예상대로라면 진작 죽었어야 하겠지만, 이렇게 살아 있는 걸 어떻게 하겠는가? 아마 자네는 지금 상황을 판단하고 있겠지. 이 판이 누구에게 유리한가를 말이야.”
제갈공영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는 금선보다도 더 놀라고 있었다.
이곳에 와서 처음 접한 것이 아수라장이라는 것이 첫 번째 놀라움이고, 자신을 구하고 세상을 뜬 줄 알았던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버젓이 살아 있다는 것이 두 번째 놀라움이었다.
제갈공영은 저 멀리 있는 하북팽가의 사 공자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제갈공영은 금선을 향해 한 발 나갔다.
금선도 그를 향해 한발 나 가며 외쳤다.
“이미 승부는 기운 것 같소만은……!”
“여기 모인 고수들이 전부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허세.”
금선이 딱 잘라 말하며 수하들에게 손짓했다.
순간 뒤쪽에 있던 금선의 수하들이 병장기를 빼 들었다.
스릉.
스릉.
오늘따라 유난히 밝은 달빛이 그들의 병기에 반사되었다.
마치 축제의 불꽃이 일렁이는 것처럼 주변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때 제갈공영이 뒤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이곳을 지휘하고 있던 남궁장천이 있었다.
남궁장천은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싸울 때가 되자 다시 지휘권을 넘겨받은 것이다.
가장 앞에 선 남궁장천의 눈동자에는 불꽃이 타올랐다.
하지만 그는 몇 가지 의문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첫째는 금선이 저렇게 자신감을 보이는 이유였다.
눈앞에 보이는 적이 뒤에서 나타난다면 누구라도 기겁할 것이다.
그러나 금선은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남궁장천은 자신의 손목을 바라봤다.
손목에는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준 팔찌가 걸려 있었다.
그 팔찌가 적과 아군을 구별해 줄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두 번째 의문이었다.
적과 아군이 이렇게 분명한데 이 팔찌가 무슨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
더 이상한 것은 지하 통로에서 이 팔찌를 바꿔 줬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뀐 팔찌와 전에 나눠 준 팔찌의 차이점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궁장천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적의 목을 베면 해결할 필요도 없는 의문이기 때문이다.
남궁장천은 자신의 검을 빼어 들며 수로를 가로지르는 돌다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무림세가 고수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금선은 고개를 돌려 외쳤다.
“변(變)!”
단 한마디였다.
동시에 금선의 무사들이 인피면구를 벗었다.
휙, 휙.
그들은 얼굴에서 벗겨 낸 인피면구를 바닥에 던졌다.
그들의 얼굴이 달빛에 드러났다.
순간 세가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저, 저 얼굴은…….”
“왜 내 얼굴이 저기에…….”
무림세가의 고수들은 적잖게 당황했다.
남궁장천도 당황했다.
집을 나간 자신의 첫째도 거기에 있었다.
이건 분명히 변장술이 맞았다.
남궁장천은 뒤쪽에 신호를 보냈다.
절대 흩어지지 말라는 신호였다.
흩어져서 저들과 섞이기라도 한다면 적군과 아군의 구별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때 금선의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하의 남궁장천도 당황하셨나 보군.”
“…….”
남궁장천은 아무 말 없이 상대를 바라봤다.
그제야 적과 아군을 구별할 수 있는 팔찌가 왜 필요한지를 알았던 것이다.
남궁장천의 표정을 본 금선이 다시 말을 이었다.
“조금 있으면 여긴 아수라장이 될 거야.”
말을 마친 금선이 손짓했다.
그 신호에 맞춰 수하들이 팔찌를 손목에 걸었다.
그러고는 흑색 무복을 벗어 던졌다.
순간 그들은 완벽하게 무림세가의 사람으로 변했다.
“…….”
남궁장천은 할 말을 잃었다.
적군과 아군을 구분할 수단이 사라진 것이다.
생각해 보니 팔찌는 배신자들이 저쪽에 붙기 전에 한빈이 나눠 준 것.
낭군장천의 당황한 표정에 금선이 입꼬리를 올렸다.
“천하의 제갈세가도 이건 예측을 못 했을 테지…….”
금선은 씩 웃으며 손뼉을 쳤다.
그 신호에 주변을 비추고 있던 횃불이 하나둘 꺼졌다.
횃불이 꺼지자 금선은 하늘을 바라봤다.
그가 하늘을 바라보자 남궁장천도 따라서 고개를 들었다.
순간 남궁장천이 옅은 한숨을 토해 냈다.
“헉.”
그가 한숨을 토해 낸 이유는 간단했다.
휘황찬란하게 돌다리 위를 비추던 달빛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월식이라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제 알았나?”
금선이 피식 웃자 남궁장천은 이 상황을 타개할 계책을 떠올리기 위해 눈매를 좁혔다.
하지만 달빛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남궁장천은 왜 금선이 시간을 끌었는지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금선은 월식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 분명했다.
그때 제갈공민이 다가왔다.
제갈공민은 그의 귓가에 뭐라 속삭였다.
순간 남궁장천의 눈이 커졌다.
달빛에 어슴푸레 비친 남궁장천의 표정을 본 금선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금선은 품에서 인피면구를 꺼내 얼굴에 뒤집어썼다.
순간 금선의 얼굴이 남궁장천으로 바뀌었다.
금선이 팔찌까지 차자 남궁장천과 똑같아졌다.
그때 달빛이 완전히 사라지자 금선이 외쳤다.
“파고든다!”
사삭, 사삭.
은밀한 발소리가 돌다리 위를 스쳤다.
순간 적과 아군이 엉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