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 파국(破局) (2)
한빈이 손가락을 튕기자 두 줄기 백색 신형이 뒤쪽에서 튀어나왔다.
그들의 정체는 청화와 설화였다.
사사-삭.
그들은 전속력으로 무림세가의 무사들 사이를 질주했다.
툭, 툭.
설화와 청화는 그들에게 뭔가를 던져 줬다.
그것은 평범한 노란색 천이였다.
설화와 청화의 발길이 얼마나 급한지, 무림세가의 고수들은 말없이 그것을 받아 들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들이 다급하게 천을 나눠 주자 누군가가 말했다.
“이게 뭐지?”
“그러게 말이야, 이런 조그만 천으로는 얼굴을 가리는 것이 고작일 텐데…….”
“이 천이 천잠사라도 되는 게 아닐까?”
“천잠사라고…….”
그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뒤쪽을 바라봤다.
꾸아앙, 쿵!
계속해서 폭음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는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거린다.
그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천으로 얼굴을 가렸다.
무림세가 고수들 사이를 누비던 설화가 한빈의 옆에 도착했다.
설화가 제갈공민에게 노란색 천을 건넸다.
“남궁 할아버지, 여기 받으세요.”
“이게 대체 뭔…….”
남궁장천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의 옆으로 청화라는 아이가 다급히 지나갔기 때문이다.
청화는 제갈공민에게 노란 천을 건넸다.
“여기 받으세요. 군사 할아버……. 아니 아저씨.”
“그래, 고맙구나.”
제갈공민이 어색하게 웃었다.
남궁장천은 할아버지가 어울렸지만, 자신은 그 정도의 나이는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갈공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청화의 뒤에서는 따라온 당광현 때문이었다.
당광현은 청화를 보호하려는 듯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당광현은 청화의 소매를 잡았다.
“내 옆에 있거라, 청화야.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만은 지켜 주마.”
당광현은 이를 꽉 깨물었다.
그 모습에 청화가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제 나름대로 할 일이 있어요.”
청화가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지었다.
당광현이 대견하다는 듯 청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 컸구나. 하지만 네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는 말을 맺지 못했다.
폭음이 코앞까지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꾸아앙!
제갈공민은 뒤를 돌아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한빈이 한 수를 준비한 것 같지만, 이제는 늦었다고 생각했다.
신선이 와도 이번 위기는 벗어날 수 없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굉음에 이제는 진천뢰가 자신의 몸을 터뜨리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꾸아앙!
눈앞에까지 폭음이 밀려왔을 때였다.
제갈공민은 담장을 중심으로 피어나는 회색 연기를 보았다.
“음. 팽 공자, 대체…….”
제갈공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 * *
난데없는 상황에 반대쪽 진영의 금선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체 누가 독연을 푼 것이냐?”
그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금와 상단의 이름으로 진천뢰와 벽력탄을 심어 놓는 것은 수월했다.
하지만 독을 사천당가 내부에 심을 수는 없었다.
자칫하면 사천당가에 들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천당가는 그만큼 독의 냄새에 민감했다.
금선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가문을 배신하고 금선의 편에 선 남궁무진이 다가왔다.
그 기척에 금선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게냐?”
“저 독 말입니다. 사천당가에서 방어용으로 설치해 놓은 독탄이 터진 것이 아닐까 합니다.”
“흠…….”
“주제넘게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아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군. 하지만, 저것마저 저들의 계책일 수도 있는 법이다. 혹시 저들에게서 전해 들은 것이 있더냐?”
금선의 말에 남궁무진은 자신의 품을 뒤졌다.
그러고는 금선에게 쪽지를 건넸다.
그 쪽지는 한빈이 십대세가의 대표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었다.
그때 뒤에서 다른 가문의 후기지수도 그가 받은 쪽지를 금선에게 건넸다.
두 개의 쪽지를 읽고 난 금선은 자욱하게 연기가 퍼진 적진을 조용히 바라봤다.
상대는 실로 용의주도한 인물이었다.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기 위해서 하나의 꾀를 내었던 것이다.
바로 아군에게는 손목에 발광버섯으로 만든 팔찌를 채우라는 제안이었다.
그는 눈을 빛내며 남궁무진을 바라봤다.
“여기 나와 있는 야광 팔찌를 받았느냐?”
“네, 여기 있습니다.”
남궁무진은 허리 쪽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내 내밀었다.
그 가죽 주머니를 조심스레 열어 본 금선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렸다.
“저곳에서 죽어 갈 줄도 모르고 이런 것을 준비했군.”
말을 마친 금선은 가죽 주머니를 수하에게 건넸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일단 맡아 두어라. 적은 진짜 용의주도한 인물이니 우리도 준비해야 할 것 같다. 나머지 인원은 저 독연이 사라지기 전까지 한시도 눈을 떼지 말아라.”
“존명!”
금선의 수하가 포권하자 그는 다시 황금빛 의자에 앉아 적진을 바라봤다.
그의 입가에는 가느다란 미소가 맺혔다.
누가 보기에도 그 웃음은 비웃음이었다.
그것도 잠시, 금선은 입맛을 다셨다.
“쩝.”
그것은 그의 진심을 담고 있었다.
독연 속에 사라져 간 애송이에 대해서는 궁금한 것이 너무도 많았다.
자신의 계책을 꿰뚫어 보는 것도 그렇고.
암제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상대의 숨통이 제대로 끊어졌는지 확인하는 것.
금선은 뱀처럼 눈을 빛냈다.
* * *
지하 통로의 초입.
심미호는 궤짝에 들어가 있었다.
연신 울려 대는 폭음에 적혈맹호대 대원들에게 궤짝으로 들어갈 것을 명령한 뒤 자신도 몸을 피했다.
그 뒤에도 폭음이 계속 울려 퍼졌다.
툭, 툭.
궤짝의 밖에서 흙더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궤짝의 밖에서 누군가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마치 문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에 심미호는 마른침을 삼키며 궤짝의 뚜껑을 열었다.
덜컹.
뚜껑이 열리자 일렁이는 횃불이 심미호의 눈에 들어왔다.
그와 함께 얼핏 비치는 사람의 형태.
궤짝에 들어가 있던 시간은 반 시진 정도였지만, 어둠 속에 있다 나오니 눈이 적응되지 않았다.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 부대주, 정신이 드나?”
심미호는 눈을 비비며 상대를 확인했다.
상대는 다름 아닌 적혈맹호대의 대주 소대섭이었다.
소대섭은 재빨리 심미호의 귀에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
딱.
순간 심미호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적혈맹호대 대원은 손가락만 튕겨도 반사적으로 정신이 번뜩 들었다.
한빈이 설화를 부를 때 손가락을 튕기기에 저절로 훈련된 것이다.
정신을 차린 심미호가 물었다.
“시작됐나요? 대주님.”
“그래, 주군이 이제부터 손님을 받으라고 하더구나.”
“네, 알았어요. 나머지 대원도…….”
“벌써 다 준비하고 있다.”
소대섭이 턱짓으로 뒤를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궤짝에 들어갔던 적혈맹호대 대원이 밖으로 기어 나오고 있었다.
심미호는 무심코 천장을 바라봤다.
조금만 얕게 통로를 팠다면 그대로 묻힐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화력이었다.
한빈이 그녀에게 통로를 깊이 팔 것을 주문했을 때는 그것이 은밀히 접근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이렇게 생명 줄을 늘여 줄 줄은 오늘에야 깨달았다.
상념도 잠시, 심미호는 한빈이 전하고 간 계약서 뭉치를 들고 통로의 초입에 섰다.
얼마나 지났을까?
통로 쪽에서 기척이 들리기 시작했다.
사삭-사삭.
옷깃 스치는 듯한 은밀한 소리.
기척을 죽이며 다가오는 것이 분명했다.
심미호는 재빨리 커다란 접시에 검은색 먹물을 부었다.
먹물을 다 붓고 나자 누군가가 계단을 내려왔다.
그는 다름 아닌 제갈공민이었다.
그는 남궁장천과 함께 이 통로로 내려왔었다.
제갈공민은 설화의 안내를 받아 이곳에 도착하며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사천당가에서 가장 경계가 삼엄하다는 가주전의 뒤뜰에 이런 통로가 있다니?
제갈공민은 아래로 내려와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심미호를 바라봤다.
한빈이 말한 대로였다.
여기로 내려오면 수하가 기다릴 것이라고 했다.
제갈공민의 시선을 받은 심미호가 활짝 웃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어르신.”
심미호가 상냥하게 맞이하자 제갈공민이 물었다.
“이제부터 어찌하면 되는가?”
“이 통로를 이용할 세가는 서약서에 손도장을 찍고 가시면 돼요. 그게 주군이 말씀하신 조건이에요.”
“손도장이라…….”
제갈공민은 말끝을 흐리며 탁자 위를 바라봤다.
탁자 위에는 백 장은 족히 넘어 보이는 서약서와 손도장을 찍기 위해 마련한 것으로 보이는 먹물이 담긴 접시가 놓여 있었다.
이 상황에서 손도장을 찍고 가라니. 제갈공민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제갈공민은 위에서 한빈이 전한 말을 기억하고는 있었다.
아래로 내려가서 자신의 수하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했다.
제갈공민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을 지키자면 손도장을 찍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뭔가 찝찝한 이유는 무엇일까?
제갈공민의 표정을 본 심미호가 팔짱을 끼고 말을 이었다.
“손도장을 찍지 않은 사람은 이곳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음.”
“제가 한 말이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모든 것이 강호를 위한 우리 주군의 배려이니, 양해해 주세요.”
“좋네.”
“잘 생각하셨어요. 다른 무림세가 여러분께 말씀해 주세요. 제가 직접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군사님이 말씀해 주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음.”
제갈공민은 심미호를 바라보며 눈매를 좁혔다.
정의맹의 군사를 보고도 이리 담담하게 대하는 것을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얼핏 보기에도 무공의 성취가 그리 낮아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저렇게 담담한 태도라?
단순한 무림세가의 무사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대체 하북팽가는 무엇을 준비한 것일까?
자신이 놓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제갈공민의 머릿속에 수많은 의문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도 잠시, 제갈공민은 서약서로 시선을 옮겼다.
서약서를 쓱 살핀 제갈공민은 눈을 크게 떴다.
비밀 유지 조항에서부터 세가 간의 무역까지, 서약서의 내용은 세세했다.
어찌 보면…….
서약서를 받아 든 제갈공민이 살짝 멈칫하자 심미호가 재촉했다.
“어서 찍으세요, 나리.”
심미호가 빙긋 미소를 지어 보이자 제갈공민이 물었다.
“이건 마치 불공정 계약에 가깝지 않은가?”
“저는 몰라요. 주군이 받으라고 한 거니 일단 찍으시고 통과하세요. 아마 주군의 깊은 뜻이 있겠죠.”
“흠.”
제갈공민은 헛기침하며 뒤쪽을 바라봤다.
뒤쪽에서는 다른 세가의 고수들이 자신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갈공민은 지금의 행위가 하나의 시험이라 생각했다.
아직 남아 있을 적을 걸러 내기 위한 시험 말이다.
제갈공민은 손에 먹물을 묻혔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손도장을 찍었다.
서약서에 손도장을 찍자 심미호가 외쳤다.
“다음 분 오세요!”
그 목소리에 제갈공민은 눈썹을 꿈틀했다.
이것은 마치 전장의 점원 같은 느낌이었다.
그것도 잠시, 뒤쪽에서 남궁장천이 말했다.
“제갈 군사, 어서 비켜 주게. 나도 빨리 찍어야 하지 않나.”
“알겠습니다.”
제갈공민은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입구를 지나 조금 넓은 공간으로 이동했다.
내용이 과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정도에서 벗어난다고 할 수도 없었다.
한마디로 그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고 있는 요구였다.
제갈공민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저런 내용으로 어떻게 적을 걸러 낼 수 있다는 말인가?
제갈공민은 자신의 서약서가 대의를 위한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제갈공민과 남궁장천이 서약서에 손도장을 찍자, 나머지 세가의 고수들도 줄을 서서 달려들었다.
모두가 지장을 찍고 나자 젊은 무사 하나가 달려왔다.
“저는 안내를 맡은 적혈맹호대의 조호라고 해요. 이쪽으로 오시죠. 손님.”
제갈공민은 황당한 듯 상대를 바라봤다.
조호라고 자신을 소개한 젊은이의 표정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제갈공민을 비롯한 모두는 조호를 따르기 시작했다.
제갈공민은 지하 통로를 걸으며 입을 살짝 벌렸다.
이것은 급조한 통로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준비한 통로가 분명했다.
단순한 통로가 아닌, 진법에 적용된 기관 장치에 가까웠다.
이들의 안내가 없다면 이 통로를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데 자신의 군사직을 걸 수도 있었다.
얼마나 갔을까.
신선한 공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순간 제갈공민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한빈은 사천당가에서 아직 할 일이 있다면서 남았다.
자신들을 비밀 통로를 통해 피신시켰으면서 혼자 남은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정의맹의 군사 직책을 수행해 온 자신이지만, 이 문제의 정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