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 파국(破局) (1)
말을 마친 한빈이 팔짱을 끼고 금선을 바라봤다.
놀리는 듯한 한빈의 도발에, 금선이 눈을 뱀처럼 가늘게 떴다.
“이유라……. 그게 뭐지?”
“그건 저들이 아니면 가문을 끌고 나갈 이들이 부족해서 아닌가? 그런데 네가 착각한 게 하나 있어…….”
한빈은 말끝을 흐리며 씩 웃자 금선이 물었다.
“그게 뭔가?”
“왜 너만 첩자를 심어 왔다고 생각해?”
말을 마친 한빈은 품에서 야명주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 위에서 톡톡 튕겼다.
튕기던 야명주를 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적진을 향해서 던졌다.
‘백발백중.’
획!
백발백중의 기운을 품은 야명주가 금선을 향해 날아갔다.
백 걸음이나 떨어진 거리였다.
야명주를 쏘아 내는 한빈의 모습에 모두는 입을 벌렸다.
그들이 놀란 것은 한빈의 수법 때문이 아니었다.
한빈이 던진 것이 값어치를 환산할 수 없는 고가의 야명주였기 때문이다.
야명주는 품은 빛을 어둠 속에서 발산하며 그 빛의 양에 따라 값어치가 정해진다.
어둠 속에서도 저리 환하게 빛나는 야명주는 돈이 있다고 해서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금선이 자신의 얼굴로 날아오는 야명주를 잡았다.
탁.
야명주를 잡은 금선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한빈이 소리쳤다.
“너도 그 가치를 알겠지?”
금선도 야명주를 알아봤다.
돈이 있다고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이 정도의 빛을 발하는 야명주는 자신도 구하기 힘들었다.
이 정도 품질의 야명주는 자신의 사부인 암제에게 바친 것에 비교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이런 야명주를 자신에게 던졌다는 것은 상대가 얼만큼의 재신을 가졌는가를 측정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물론 금선은 이것이 자신이 암제에게 바친 야명주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금선은 조용히 상대를 바라봤다.
“…….”
저 애송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듣고 싶어서였다.
그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나한테 발가락에 낀 때만도 못한 재물이지.”
“지금 나에게 네가 부자라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건가?”
그의 말에 한빈은 씩 웃었다.
“자랑까지는 아니고 네가 매수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웃돈을 주고 다시 매수할 수 있다는 거지.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내가 문제 하나 내지. 네 수하는 과연 믿을 만할까?”
“헛소리!”
“돈 앞에서도?”
한빈이 피식 웃자 금선의 눈썹이 꿈틀했다.
금선은 돈의 무서움을 안다.
돈과 의리를 저울에 올려놓고 잰다면?
백이면 백, 항상 돈 쪽으로 기울던 것이 그의 기억이고 세상의 이치였다.
하지만 인정할 수는 없는 법.
금선이 표정을 수습하고 외쳤다.
“내 수하들은…….”
“암제도 똑같은 말을 하더라.”
“헉, 대체 네놈이 사부님을 어떻게…….”
금선의 목소리가 누구나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떨렸다.
한빈은 대답 대신 내공을 담아서 외쳤다.
그냥 내공이 아니었다.
바로 허장성세의 기운이 담긴 외침이었다.
“지금이다. 금선의 목을 베어라. 남궁무진!”
그 말에 모두는 넋이 빠졌다.
그렇지 않아도 목소리에 담긴 기세가 담겨 몸을 옥죄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그 외침에 당황한 것은 적들도 마찬가지였다.
비파를 든 고수들은 허장성세의 압박에 손을 놓았고 무공이 약한 적 중 몇은 넋을 잃었다.
모두가 섭혼술에 걸렸다고 생각하던 남궁무진. 그도 마찬가지로 움찔하며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거대한 기세가 덮쳐 오자 자신도 모르게 검집을 잡은 채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선은 검집을 잡은 남궁무진의 모습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터벅터벅.
그때 모두를 옥죄던 허장성세의 기운이 풀렸다.
남궁무진은 검집을 움켜쥐고 검을 뽑으려 하는 자신을 보고 깜짝 놀라 외쳤다.
“금선 어르신, 저는 배신한 것이 아닙니다!”
제법 큰 남궁무진의 목소리에 금선이 멈칫했다.
금선은 재빨리 몸을 돌렸다.
백 걸음 밖에서는 상대가 살짝 하얀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누가 봐도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금선의 낮은 목소리가 깔려 나왔다.
“네놈은 대체…….”
“어때, 맞췄지?”
한빈이 금선을 가리키며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옆을 돌아봤다.
옆에는 남궁장천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제갈공민도 눈을 크게 뜨며 지금의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제갈공민은 정의맹의 군사답게 재빨리 표정을 수습했다.
일단 겉보기에는 안정을 찾은 것처럼 보인 제갈공민이 말을 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뭐, 간단합니다. 저곳으로 건너간 자들은 배신자입니다.”
“배신자라…….”
“생각해 보십시오. 무가지회로 간 무림세가 사람들이 실종된다면 무림이 어떻게 될까요?”
“…….”
“저들도 그것을 바라지는 않았을 겁니다.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성과를 내길 바랐던 것이죠.”
“성과라니?”
“당연히 무림세가를 장악하는 겁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멀리 있는 금선을 바라봤다.
한빈은 천천히 적진을 향해 걸어갔다.
터벅터벅.
정확히 열 걸음 정도 걸어갔을 때 멈췄다.
그 모습에 금선이 놀랐다.
함정과 폭약이 장치되어 있는 살상 범위의 경계선이었다.
금선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빈을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금선의 눈빛이 떨렸다.
그가 기억해 낸 것은 한빈의 얼굴이 아니었다.
바로 한빈의 목소리였다.
자신의 사부인 암제와 일대 결전을 벌이던 적을 확인하지는 못했었다.
고개도 내밀기 전에 통로가 불바다가 됐으니까.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분명히 기억한다.
정확히는 목소리에 담긴 내공이었다.
금선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너는 귀락천의…….”
“잠시만, 그럼 너도 암제하고 같이 있었던 거야?”
“진짜 네놈이구나. 내 희망을 앗아 간 놈이 네놈이었어.”
“에이. 그건 비밀이니까, 네가 직접 밝혀내.”
“그래, 내가 직접 밝혀내지.”
금선의 목소리가 다시 서늘해졌다.
흔들리던 눈빛은 이제 찾을 수 없었다.
그는 피풍의를 다시 눌러쓰고 수하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다음 수를 고민하는 듯 보였다.
서늘해진 분위기와는 달리 이 상황을 바라보던 제갈공민의 눈빛에는 호기심이 타올랐다.
암제?
귀락천?
자신이 모르는 인물과 장소가 둘 사이에 오갔다.
금선이 한빈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원수지간임이 확실했다.
둘의 대화를 들어 보면 피해를 본 것은 금선이었다.
저리 용의주도한 인물에게 어떻게…….
고민도 잠시, 제갈공민은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팽 공자, 그렇다면 남궁무진을 비롯한 무림세가의 후기지수들이 모두 가문을 배신했다는 이야기인가?”
“지금 보셨잖습니까? 저들은 섭혼술에 걸린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포로가 된 척 항복을 받아 내려 했겠죠.”
“항복이라…….”
“모두 사로잡은 후 고문으로 가문의 비밀이나 권력을 승계받을 예정이었을 겁니다.”
“대체 어떤 집단이 그런 일을 벌인다는 말인가?”
제갈공민의 질문에 한빈은 말없이 적진을 가리켰다.
한빈이 가리킨 곳에는 남궁무진이 한 발 앞으로 나와 있었다.
아무래도 금선의 지시로 나온 것 같았다.
한빈은 제갈공민과 남궁장천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평정심을 유지하십시오.”
한빈은 말에 제갈공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장천은 아직도 석상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만은 적진에 있는 남궁세가의 식솔들 하나하나를 파악하고 있었다.
남궁장천의 머릿속에 얼마 전 일들이 쭉 떠올랐다.
얼마 전 폐관 수련에서 나오니 가문은 뒤집혀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첫째 아들이자 소가주인 남궁무천이 가문을 배신했다는 것이었다.
모두의 증언이 한결같았기에 남궁장천은 추격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추격대를 보내고 난 후 남궁장천은 자신의 처소에서 짤막한 문장이 적힌 쪽지를 발견했다.
그곳에는 누구도 믿지 말라고 적혀 있었다.
분명 가문을 팔아넘기려던 일을 들켜 도망간 첫째의 필체였다.
지금 보니 첫째인 남궁무천은 저들의 배신을 미리 알아챘던 것 같았다.
그리고 역으로 누명을 쓴 것이 분명했다.
남궁장천이 옛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 때, 남궁무진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그런데 제 사과는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더냐?”
“능력 없는 자가 가주 자리를 이어받는 것은 죄악입니다. 저는 남궁세가의 앞날을 위해 선택했습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이 강호의 도리가 아닙니까?”
“그럼 네가 대라는 말이냐?”
“제가 대가 아니라 힘이 대의라는 말입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적진의 남궁무진은 남궁장천을 향해 포권한 뒤 바로 돌아섰다.
그는 남궁장천의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무리 속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다른 무림세가의 후기지수가 나왔다.
그도 똑같은 말을 하고 들어갔다.
그들은 대부분이 가문의 이인자들이었다.
순간 무림세가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떤 이는 분노하고.
어떤 이는 망연자실했다.
그때 한빈은 제갈공민을 바라봤다.
의미심장한 한빈의 표정에 제갈공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향해 한 발 나아갔다.
“모두 정신을 차리십시오. 지금 우리는 수적으로 불리합니다. 가문의 식솔을 걱정할 때가 아니라 우리의 목을 걱정할 때입니다. 저들의 단죄는 우리가 살아남은 후의 일입니다.”
그의 말에 그들은 감정을 추슬렀다.
제갈공민의 말은 백번 맞았다.
가문을 배신한 무리는 자신의 수하까지 모두 적진으로 끌고 들어갔다.
지금은 수적으로도 밀리는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적진에서 금선이 토해 내는 비웃음이었다.
“하하하.”
그 웃음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모두가 바라보는 곳에, 금선이 손을 들고 있었다.
긴 웃음 뒤에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럼 잘 가시게.”
말을 마친 금선이 손을 내렸다.
그것은 누가 봐도 신호였다. 동시에 비파를 든 무인들이 비파의 현을 모두 뽑았다.
순간 앞쪽에서 연기가 흘러나왔다.
연기 속에 여러 줄기의 검기가 얽힌다.
그 검기는 달려가던 세 명의 무사들을 반으로 갈랐던 만년빙사가 분명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바닥에서는 창이 솟아 나왔다.
무림세가의 고수들과 금선 사이의 길이 완벽하게 막힌 것이다.
순간 무림세가의 고수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지금 저게 뭐지?”
“저건 독연이 아닌가?”
“독연뿐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함정을 한곳에 모은 것 같군.”
“일단 안으로 다시 들어가세.”
모두의 선택은 한 가지였다.
다시 사천당가의 담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안쪽은 위험하지 않나?”
“이미 터질 건 다 터졌으니 안쪽이 더 안전할 것이네.”
“그것도 일리가 있군?”
그들은 사천당가의 안쪽으로 이동하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사천당가의 안쪽에서 굉음이 울려 왔다.
꾸아앙!
아까보다 더 큰 굉음이었다.
사천당가의 안으로 향하던 모두는 발길을 멈췄다.
우르릉 쾅!
굉음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치 해일처럼 굉음이 그들 쪽으로 몰려들었다.
쾅, 쾅, 쾅!
연속으로 이어지는 굉음에 무림세가의 무사들 점점 뒷걸음쳤다.
그들은 한빈이 서 있는 곳까지 밀렸다.
하지만, 굉음은 멈추지 않았다.
꾸앙!
그 폭음과 동시에 바닥이 흔들렸다.
모두는 휘청이며 함정이 발동된 사천당가의 초입과 굉음이 가까워지는 사천당가의 안쪽을 번갈아 바라봤다.
사천당가의 안쪽에서 먼지구름과 함께 화약 냄새가 흘러나오고 뒤쪽은 독연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상황.
제갈공민은 이를 악물고 방법을 떠올리려 애썼다.
지금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폭발의 기세라면 이곳까지 닥쳐오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였다.
그렇다고 적이 만들어 놓은 함정으로 뛰어들 수도 없는 법.
그때였다.
한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떠날 준비 하시죠, 군사님.”
“…….”
제갈공민은 말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한빈은 손가락을 튕겼다.
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