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359화 (359/621)

359. 사천대국(四川大局) (2)

한빈이 재빨리 답했다.

“말로 하는 것보다는 문서로 남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혹시 그사이에 마음이 변하셨다면 상관없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주위를 쓱 둘러봤다.

한빈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십대세가의 대표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조금 떨어져 있던 제갈공민과 팽대위까지 돌아와 있었다.

한빈은 지금 가장 평범한 방법으로 압력을 넣고 있었다.

남궁장천은 이 상황에서도 실속을 챙기는 젊은이가 신기했다.

남궁장천은 재빨리 손을 저었다.

“아니네.”

“그럼 약조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계약서는 상황이 다급하다 보니 일이 끝나고 서명하도록 하죠.”

“흠, 그럼세.”

남궁장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산동악가의 악소천이 다가왔다.

“왜 나를 모른 척하나?

“아, 어르신도 계셨군요.”

“우리 비광과 의형제라면 이 중에서 내가 가장 가까울 텐데……. 나를 모른 척하니 섭섭하군.”

“죄송합니다.”

“아닐세. 농담일세.”

악소천이 활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 모습에 살얼음 위를 걷던 기분으로 서 있던 십대세가 대표들의 얼굴에 살짝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때 하남정가의 정인지가 씩 웃으며 한빈에게 다가왔다.

그는 자신의 동생 정휘지에게 죽을 뻔했던 인물이었다.

다시 한빈을 보니 갑자기 감회가 새로운지 복잡한 표정을 띄웠다.

“잘 지냈는가?”

“네, 선배님도 계셨군요.”

한빈은 그를 반갑게 맞았다.

그것도 잠시, 한빈이 진지한 표정으로 모두를 돌아봤다.

“이제부터는 여러분께서 저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한빈의 말에 이미 인사를 나눈 이들은 너나없이 나서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나선 것은 당광현이었다.

한빈 덕분에 몰락할 뻔했던 사천당가가 명맥을 잇게 되었으니 그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당연했다.

“맡겨만 주게.”

그를 시작으로 너도나도 한빈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동의하자 한빈은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청화가 한빈에게 메고 있던 짐을 한빈에게 건넸다.

한빈은 그 짐을 받아서 한 움큼의 서찰을 꺼냈다.

그것은 손바닥만 한 봉투였다.

모두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였다.

한빈이 모두를 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이곳에 적어 두었습니다. 절대 다른 가문에는 보여 주지 마십시오. 이대로 해야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재빨리 용린검법 중 초식 하나를 떠올렸다.

'백발백중.‘

초식을 떠올린 한빈은 재빨리 서찰을 십대세가의 대표에게 쏘아 보냈다.

그 십대세가의 대표 중에는 팽대위과 제갈공민도 포함되었다.

휙, 휙.

열 장의 서찰을 동시에 뿌린 한빈.

그 서찰은 바로 그들의 품을 향해 날아갔다.

십대세가의 대표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받았다.

탁. 탁.

열 개의 서찰을 던지고 동시에 그것을 받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한 송이 국화처럼 보였다.

물론 그 모습에 놀란 이도 몇몇 있었다.

가장 먼저 놀란 듯 한빈을 바라본 것은 제갈공민이었다.

근거리에서 열 개의 서찰을 동시에 쏘아 내는 것이 가능한가?

만약 이렇게 물었을 때, 이 장면을 보기 전의 제갈공민이라면 고개를 저었을 것이었다.

거기에 지금 날아온 서찰에는 내공이 전혀 없었다.

제갈공민의 놀란 모습을 보자 사천당가의 당광현도 그제야 입을 벌렸다.

지금 한빈의 한 수는 사천당가의 암기술에도 없는 기술이었다.

서찰을 품에 넣은 십대세가 대표들이 살짝 술렁이자 한빈이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이것은 한빈이 믿음이라는 감정을 들어 올리기 위해 만든 지렛대였다.

백발백중은 무공이 높은 자에게는 전혀 쓸모없는 초식이다.

하지만, 해석하기에 따라 천외천급의 무공이 될 수도 있었다.

한빈은 복어가 배를 부풀리듯 그들에게 해석하기 나름인 무공을 보여 준 것이었다.

술렁임이 진정되자 한빈이 그들을 향해 포권했다.

“어르신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제 출발하시죠.”

한빈이 정중히 예를 올리자 십대세가의 대표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남궁장천은 황당할 따름이었다.

진룡소협이라는 이름은 참으로 그럴듯했다.

거기에 더해 그가 자신을 구한 것도 맞았다.

하지만 십대세가가의 대표 중에 절반 이상이 그와 알고 있다는 것은 뭔가 이상했다.

남궁장천은 갑자기 서글퍼졌다.

자신이 이제 뒷방 늙은이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든 것이다.

남궁장천은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봤다.

“장강의 뒤 물은 앞 물을 밀어낸다더니……. 어느새 내가 앞 물이 되었구나!”

그 탄성에 옆에 있던 제갈공민이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하하, 저자를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이네. 대체 어떤 문파의 제자인지 신기해서 그러네.”

“문파라니요?”

“왜 나한테까지 숨기려고 하나? 정의맹에서 보낸 고수가 아닌가?”

“정의맹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생각해 보게. 저런 고수를 길러 낼 문파는 구파밖에 는 없네. 그리고 무가지회에 그 고수를 파견할 곳은 정의맹밖에 없지. 더 중요한 것은 자네가 저자를 알고 있음이야. 자네뿐 아니라 나머지 가문도 알고 있더군…….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는 것은 정의맹밖에 없지. 안 그런가? 군사.”

“…….”

제갈공민의 남궁장천의 착각에 헛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하지만 제갈공민도 한빈을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머지 무림세가들과 어떻게 알았는지는 그도 궁금할 따름이었다.

그때 남궁장천이 말을 이었다.

“모른 척하지 말게, 지금 마지막에 보여 준 수법은 분명히 사천당가의 수법이었네. 그런 암기술은 당문을 제외하고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수법이지.”

“듣고 보니 신기하네요.”

제갈공민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앞서가고 있는 한빈을 바라봤다.

남궁장천의 말이 맞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설산신녀라는 아이가 사용한 경공술은 분명히 구걸십팔보였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수법은 사천당가의 사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문제는 무엇보다도 하북팽가라는 그의 출신이었다.

하북팽가의 직계가 사천당가의 수법을 쓴다?

거기에 사천당가의 차기 가주의 딸을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데리고 다닌다?

사천당가와 하북팽가는 이제까지 어떤 접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의맹의 정보 조직에 구멍이 뚫렸다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제갈공민의 표정을 본 남궁장천이 말했다.

“내가 정곡을 찔렀나 보군.”

“하북팽가의 아이입니다.”

“그래, 진작에 사실을…….”

남궁장천은 말을 멈추고 제갈공민을 바라봤다.

제갈공민이 옅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휴, 저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저 아이는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맞습니다.”

“…….”

남궁장천은 급기야 걸음까지 멈췄다.

탁.

제갈공민도 같이 발길을 멈추고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면 조금 덜떨어진……. 하북팽가의 골칫덩이 아닌가?”

“그런 소문도 있지요. 하지만 보십시오.”

제갈공민이 앞서가는 한빈을 가리키자 남궁장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헛소문이었군. 대단하군. 대단해.”

“뭐가 대단하다는 겁니까?”

“저런 아이를 키워 낸 정의맹이 대단하다는 걸세.”

“정의맹이 키워 내다니요?”

“생각해 보게. 저 아이가 하북팽가의 진전을 물려받았다면 무공에 그 흔적이 남아 있을 텐데……. 어디에도 하북팽가의 흔적은 없네. 그렇다면 구파일방과 무림세가의 공동 후인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가능한 곳은 정의맹밖에 없지 않나?”

“그렇다면, 정의맹에 제가 모르는 일이 벌어진 것이군요. 하하.”

제갈공민이 유쾌하게 웃자 남궁장천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도 아니라는 것이군.”

“저 아이가 누구의 후인이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저 아이의 말대로 이곳에 환난이 닥쳐 왔다면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동감일세.”

남궁장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기세가 얼마나 강한지, 앞서가던 이들이 한 번씩 뒤를 돌아볼 정도였다.

* * *

사천당가의 외곽.

금빛 장포를 펄럭이는 사내가 사천당가의 담장을 바라보며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황금빛 무복의 왼쪽 어깨에는 흑(黑)이란 글자가 선명했다.

그는 마치 대가가 그린 풍경화를 감상하듯 연신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다만 조금 이상한 것은 피풍의(避風衣)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 피풍의로 얼굴의 대부분을 덮어쓰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때 바람 한 줄기가 그를 쓸고 지나갔다.

휘잉!

바람이 그의 피풍의를 살포시 건드린다.

펄렁.

얼굴을 가렸던 피풍의의 일부분이 살짝 들렸다.

동시에 그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종잇장이 바람에 흔들리듯 부르르 떨리는 그의 안면 근육을 본 수하들이 한 발씩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수하들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을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람 덕분에 드러난 그의 얼굴은 다소 기괴했다.

얼굴의 대부분이 촛농이 녹은 듯 뒤엉켜 있었다.

어렸을 때 입은 화상으로 인한 상처였다.

그렇지 않아도 기괴한 그의 얼굴이 일그러진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은 고통 때문이었다.

그는 얼마 전 다시 한번 화상을 입었다.

그 때문에 남은 얼굴의 반쪽마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그 고통에 바람만 스쳐도 뼛속까지 시릴 정도였다.

피부가 아픈 것인지 뼈가 아픈 것인지도 구별이 안 될 정도의 고통.

이 모든 것이 얼마 전에 있었던 귀락천의 참사 때문이었다.

그는 세간에서 금선이라 불리는 금와 상단의 상단주였다.

어릴 적 입은 화상은 변장술로 가리고 다녔기에 그의 진면목을 본 이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라나면서 언젠가는 자신의 얼굴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어디에 있던가?

그때 만난 것이 자신의 사부였던 암제였다.

암제에게는 놀라운 의술을 가진 의원이 하나 있었다.

그 의원의 의술은 얼마나 신기한지, 다른 이의 얼굴과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 수 있었다.

금선은 자신의 얼굴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암제와 사제의 연을 맺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힘들다고 했다.

보통 사람의 얼굴을 바꾸는 것과 화상을 입은 얼굴을 바꾸는 것은 다르다고 하며, 몇 가지 재료를 구해야 한다고 했다.

그 재료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들이었다.

자신의 얼굴을 찾아 준다는 약속에, 금선은 기다리며 암제와의 밀약에 따라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암제가 달빛도 베어 낼 수 있는 가공할 만한 무력을 휘둘렀다면, 금선 자신은 강호의 돈 줄기를 끊어 낼 수 있는 금력을 휘둘렀다.

암제와 금선의 궁합은 금상첨화였다.

그들은 남들이 모르는 사이에 세력을 키웠고 강호와 황실의 주인을 바꾸는 대계가 이제 시작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것이다.

금선에게 닥친 문제는 그야말로 청천의 날벼락이었다.

암제의 부름으로 귀락천의 장원을 찾았던 날이었다.

바닥과 연결된 비밀 통로로 들어가던 중에 바닥이 터지면서 화염에 휩싸인 것이었다.

사실 그때만 해도 죽는 줄 알았다.

하지만 어디선가 물줄기가 들어오며 쓸려 나갔다.

암제의 시체와 함께 말이다.

그 물줄기는 실로 기묘했다.

진법의 영향인지.

우연인지는 몰라도 빠른 속도로 그들을 쏘아 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되돌려 줄 암제를 구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암제의 심장에 박힌 반토막 난 검을 뽑았다.

하지만, 암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기억은 금와 상단과 가까운 강가에서 깨어난 것이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며 망연자실한 금선은 바로 마음을 바꾸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자신이 갖기로 결심했다.

미리 준비한 병력으로 이들을 몰살시키고 십대세가의 중심을 바꾼다.

그리고 암제가 남겨 놓은 유산을 자신이 독차지하면 그동안의 보상 중 일부는 챙기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 일이 끝나고 암제의 유산만 가져온다면 나라를 다시 세워도 된다.

암제는 아무도 모르게 암선이라 불리는 배를 암굴이라 부르는 곳에 넣어 두고 자신의 재산을 그곳에 모아 놨다.

이것은 금선이 최근에 안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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