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358화 (358/621)

358. 서천대국(四川大局) (1)

“봉화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뭐,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아군이 보낸 봉화이니까요. 아무래도 화향이 사천에 진동할 것 같습니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불꽃을 가리켰다.

지금 저 신호로 봐서는 아직 급박한 상황은 아니었다.

물론 시간이 충분하다는 신호도 아니었다.

약간의 여유가 있다는 신호였다.

가능한 한 십대세가의 대표들을 설득하는 것이 중요했다.

한빈의 표정을 본 서문무결이 혼잣말을 뱉었다.

“화향이라…….”

복잡한 감정이 담긴 목소리였다.

순간 한빈은 주변을 쓱 훑어봤다.

아직도 자신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이 있었다.

물론 십대세가의 대표 중 반 이상은 자신의 편이 되어 줄 가능성이 큰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한빈은 진중한 눈빛으로 서문무결을 바라봤다.

“대협,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아니 제가 아니라 무림을 위해서입니다.”

“알았네. 나는 자네를 믿네.”

서문무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주변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한빈을 아는 이들조차 서문무결의 반응은 의외였다.

이쯤 되자 남궁장천은 이제 한빈에 대한 의심을 티끌만큼도 갖지 않았다.

은둔형 고수인 서문무결까지 젊은이를 안다면 그가 적일 가능성은 조금도 없었다.

이제 진룡이라는 젊은이에게 말을 걸 때였다.

생각해 보니 저 진룡소협이라는 젊은이에게 목숨을 빚진 것이 사실.

그런데도 이렇게 바라만 보고 있다는 것은 남궁세가의 가주로서 안 될 일이었다.

남궁장천은 재빨리 그에게 걸어갔다.

터벅터벅.

일부러 내공을 담아 발소리까지 내며 말이다.

다른 이들의 시선이 모두 남궁장천에게 모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채 기세를 피우며 한빈에게 다가가는 남궁장천의 표정에는 비장함이 감돌았다.

그때 누군가가 기세를 피우며 남궁장천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휙.

남궁장천의 눈썹이 꿈틀댔다.

묘한 경쟁심이 생긴 남궁장천은 상대를 바라봤다.

순간 남궁장천의 눈이 커졌다.

그는 다름 아닌 사천당가의 차기 가주로 내정된 당광현이었다.

당광현은 남궁장천은 무시한 채 먼저 땅을 박차고 한걸음에 한빈의 앞에 착지했다.

파박.

모두가 그 모습에 깜짝 놀랄 때, 당광현은 한빈의 옆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설산신녀라 밝힌 소녀 말고 또 다른 소녀가 있었다.

당광현은 그 소녀를 꼭 껴안았다.

“청화야.”

“…….”

청화는 눈을 끔뻑이며 당광현을 바라봤다.

한빈의 손을 잡을 것이라 예상하던 이들의 눈이 커졌다.

그들은 처음에 한빈과 설화에게만 집중했었다.

하지만 당광현이 갑자기 그 옆에 있던 소녀를 껴안자 그제야 청화의 존재를 인식한 것이다.

십대세가의 고수 중 누군가가 말했다.

“망측하게, 저게 무슨 짓인가?”

“망측하다니, 자네는 저게 남녀 관계로 보이나?”

“아니, 당 대협의 자제는 하나인 것으로 알고 있네만…….”

“자네는 그렇게 좁은 시야로 어찌 강호에서 살아남았나?”

“그게 무슨 말인가?”

“숨겨 둔 딸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일세. 무림세가에서 그 정도는 흔한 이야기지.”

“흠, 그러다 당 대협 듣겠네. 그러지 않아도 사천당가 사람들 신경이 예민할 텐데 그 얘긴 그만하세.”

그들의 웅성거림 속에서도 당광현은 청화를 끌어안은 채 놓지 않았다.

오래전 잃어버린 딸아이를 찾은 것이 얼마 전이였다.

그것도 사천당가의 숙원이었던 공독지체를 완성해서 돌아왔다.

그 기쁨은 두 배, 아내 열 배, 백배였다.

그런데 그 딸아이가 얼마 전 사라진 것이었다.

물론 같이 사라진 한빈과 설화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조금은 마음을 놓고 있었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심장이 말라붙을 정도로 애가 타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오늘과 같은 일이 일어나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때였다.

청화가 당광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버지, 잠시만요.”

청화의 말에 주변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예상했던 대로 둘의 관계가 부녀지간이라는 것이 놀라운 한편, 어떻게 된 일인지에 대한 호기심도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당광현은 그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벌렸다.

감정이 담긴 호칭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몇 번 호칭을 듣긴 했지만, 그저 아버지이기에 그렇게 불러 주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때 다시 청화가 말했다.

“이것 좀…….”

당광현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청화를 품에서 놓았다.

“흠, 내 생각만 했구나.”

“그게 아니라, 공자님이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아요.”

청화의 말에 당광현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빈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당광현이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해 보게.”

“제가 드릴 말씀은 한 가지입니다.”

“말해 보게.”

“사천당가의 식솔들에게 일단 모든 일을 멈추라 지시해 주십시오.”

“그, 그게 무슨 말인가?”

“이건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천당가의 식솔을 위해서입니다.”

“자네 말이라면 일단은 알겠네. 돌아가는 대로 그리 명을 내리겠네.”

“네, 감사합니다.”

한빈이 가볍게 묵례했다.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남궁장천은 이를 악물었다.

이제는 자신이 진룡이라는 청년과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남궁장천이 막 한빈에게 다가가려고 하던 그때였다.

어느새인가 황보세가의 가주인 황보만청이 한빈의 옆에 떡하니 나타나 남궁장천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남궁장천이 황당함에 소리치려 할 때였다.

황보만청이 한빈에게 물었다.

“지금 자네 말은 일이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얘기인가?”

“네, 그렇습니다.”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황보만청은 주위를 둘러봤다.

적은 십대세가의 대표들을 한 줌 피떡으로 만들려 했다.

물론 그것은 한빈이 제때 나타난 덕분에 마무리되었다.

지금 주위는 절벽에서 떨어진 돌덩이와 나무들로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이 정도의 일은 단기간에 계획된 것이 아닐 터.

적들은 퇴로를 확보하고 꼭꼭 숨을 것이었다.

어쨌든 아군 중 상한 이들이 없다는 것은 다행이지만, 아쉬운 것은 적들의 정체를 밝히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빈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황보만청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자네의 생각을 듣고 싶군.”

“어르신은 바둑을 좋아하시니 제가 대국에 빗대어 말씀드리지요.”

“부탁하네.”

황보만청이 손을 내밀며 편히 말해 보라는 시늉을 했다.

한빈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에는 이건 첫수를 교환한 것에 불과합니다. 뭐, 포석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포석이라…….”

황보만청이 미간을 좁혔다.

바둑에 있어 포석이란, 싸움을 시작하기 전 기본적인 돌을 깔아 놓는 과정이다. 한빈의 말대로라면 아직 본격적인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

이 광경이 포석에 불과하다면 진짜 싸움은 어찌 될 것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 모습에 한빈이 설명을 이었다.

“네, 포석이 끝나면 분명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겠지요. 분명 첫 번째 두 번째……. 끊임없이 수를 서로 교환해야 할 겁니다. 아군과 적군이라는 돌이 바둑판을 가득 메울 때가 되어서야 승자가 정해지겠죠.”

“돌이라…….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 대결이 바둑이라면 우리 십대세가가 질 리가 없을 테니까.”

“네, 그냥 바둑이라면 그렇죠.”

“그게 무슨 말인가?”

황보만청이 표정을 굳히자,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뭐, 정당한 승부라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즉, 적들이 ‘바둑판 위에 돌을 미리 깔아 놓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이 들어가야겠죠. 그렇다면 십대세가가 그들에게 밀릴 리 없죠.”

물론 한빈의 가정은 암제가 죽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암제가 살아 있고 괴아를 비롯한 정체불명의 괴인들이 곳곳에서 날뛴다면?

정당한 승부라 할지라도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황보만청은 한빈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무가지회는 사천당가 중심으로 십대세가가 준비한 행사였다.

그런데 적이 돌을 깔아 뒀다라?

십대세가의 감시하에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한빈은 고개를 돌려 절벽을 가리켰다.

한빈이 절벽 위를 가리키자 황보만청도 고개를 돌렸다.

한빈이 말했다.

“벌써 깔아 두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확인했고요.”

순간 황보만청의 눈빛이 깊어졌다.

분명 한빈의 말이 맞았다.

그들은 미리 깔아 놓은 돌이 있었다.

너무 충격이 커서 그것이 깔아 둔 돌이라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자네 말이 맞네. 그것도 검은 돌이군.”

한빈은 이런 황보만청이 좋았다.

조금은 덜렁대는 구석이 있지만, 사태 파악만큼은 누구보다 정확한 이였다.

“맞습니다. 문제는 이 대결에서는 흰 돌이 후수를 뒀다고 해서, 계가할 때 덤으로 얻을 수 있는 집이 없다는 거죠.”

“…….”

“뭐,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적이 몇 개의 돌을 미리 깔아 뒀는지를 우리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흠.”

황보만청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조금 과장한다면 빗물을 받아서 식수로 써도 될 만큼 깊은 골이 팼다.

그 돌이 몇 개인지, 그리고 어디에 놓았는지를 모른다는 문제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앞이 막막해졌다.

황보만청은 바둑을 둘 때 스무 수를 내다보고 두는 이였다.

그런데 이번 대국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다.

이것은 마치 망망대해의 물결을 예측하는 것과도 같았다.

황보만청은 한빈의 말이 사실이 아니기를 빌었다.

한빈을 바라보던 황보만청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자신의 기분을 한빈은 더욱 잘 알 터였다.

하지만 한빈은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이 경우라면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황보만청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비밀입니다.”

한빈이 딱 끊자 주변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둘의 마지막 대화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황보만청은 희미한 웃음을 입가에 띄웠다.

한빈의 속마음을 엿본 것이다.

한빈이 저리 여유를 잃지 않을 경우는, 적보다 더 많은 돌을 깔아 놨을 때였다.

물론 승리를 완전히 확신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국에서 완벽한 승리를 예상하는 것만큼 무모한 것은 없으니까.

누가 어떤 돌을 깔아 놨는지, 그 돌이 적당한 곳에 깔린 돌인지 등 모든 변수가 이번 대국의 향방을 결정할 것이다.

황보만청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아직 남아 있을 때였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남궁장천이 헛기침하며 한 발 앞으로 나왔다.

“험.”

그 기침에는 중후한 내공이 담겨 있었다.

헛기침에 내공을 담은 이유는 간단했다.

한빈도 그것을 아는지 그제야 그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남궁 가주님도 계셨군요.”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남궁장천은 한빈이 보기에 가장 다루기 힘든 사람이었다.

이 정도의 뜸은 필요했다.

뭐, 모든 대화를 들었기에 자신에게 할 말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빈의 예상대로 남궁장천이 어색하게 웃었다.

“험, 미안하네, 자네가 내 생명을 구해 줬는데 인사도 못 했군.”

“괜찮습니다.”

“아니네. 나중에 이 빚은 꼭 갚겠네.”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뭐, 계약서로 남겨 주시면 더 좋죠.”

한빈이 진득한 웃음을 지었다.

여기서 고개를 끄덕인다면 남궁장천이라는 돌은 얻은 것이 된다.

남궁장천이 눈을 크게 떴다.

“계, 계약서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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