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357화 (357/621)

357. 화향만리(火香萬里) (8)

남궁장천은 설화와 한빈을 번갈아 봤다.

그 모습에 한빈이 작게 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흠, 이 아이는 그냥 시녀가 아닙니다.”

“시녀가 아니라면…….”

“설산신녀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설산신녀라…….”

남궁장천은 눈매를 좁히며 설화를 바라봤다.

상대의 말대로였다.

그냥 시녀라고 하긴 남달랐다.

바람처럼 날아온 설화의 경공은 일개 시녀로는 볼 수 없었다.

말끝을 흐리던 남궁장천이 말을 이었다.

“설산신녀라는 별호가 어울리는군. 후기지수 중에 그대와 같은 경신술을 보긴 처음이야.”

그의 말에 설화는 마른세수하며 혼잣말을 뱉었다.

“공자님도 참…….”

슬쩍 고개를 돌리는 설화의 모습에 남궁장천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별호를 부끄러워하는 무인이라?

눈앞에 있는 자들은 강호에서는 흔히 볼 수 없었다.

혹시 신비 세력?

그때 남궁장천에게 한 가지 의문이 강하게 들었다.

이것은 그들의 정체와도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한 가지만 묻겠네. 자네를 의심해서 그런 것은 아니니 솔직하게 말해 주게.”

“네, 말씀하시지요.”

“어찌 여분의 무복을 가지고 다니는가? 자네 같은 무인은 처음 보네만은…….”

남궁장천은 턱짓으로 보따리에 들어 있는 남은 무복을 가리켰다.

남궁장천이 눈매를 좁히고 한빈을 바라봤다.

의심해서는 아니라는 말과 달리 누가 봐도 의심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한빈이 그 모습에 웃었다.

사실 남궁장천이 그런 의문을 가지는 것이 이상했다.

한빈은 솔직하게 물었다.

“무인의 길에 예정된 싸움이 있습니까? 언제 눈먼 칼에 맞을지도 모르는 법이고 예정된 비무를 하더라도 언제 가슴이 뚫릴지 모르는 법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

“그게 제 답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뼈가 갈리지고 피륙이 상한다 해도 무사의 기개만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힘들 때일수록 건재함을 알리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이라 들었습니다. 여벌의 무복은 어찌 보면 급창약과도 같지요.”

“허허.”

남궁장천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한빈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론일 뿐이었다.

언제 눈먼 칼에 맞을지 모른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법은 흔치 않았다.

거기에 더해 거대 무림세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말이다.

남궁장천도 소싯적에 수많은 비무를 벌였다.

그 기록을 자신의 몸에 새겨 놓았고 말이다.

그렇지만, 여벌의 옷을 가지고 다닌 적은 없었다.

그때 상대가 다시 말을 걸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남궁 가주님.”

상대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왜 그걸 모르냐는 표정이다.

“…….”

남궁장천은 자신의 물음이 애초에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남궁장천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갈공민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얼핏 보니 제갈공민과는 아는 사이 같았다.

정의맹의 군사와 아는 사이이니, 사파의 사람은 아닐 것이고.

이 전장에서 제갈공민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아군이라는 말이었다.

막 고개를 돌리려던 남궁장천의 고개가 급격히 기울어졌다.

제갈공민의 옆에는 하북팽가의 대표 팽대위가 앉아 있었다.

자신의 뒤를 따라 절벽 위의 적을 쳐야 할 십대세가의 대표가 말이다.

남궁장천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었다.

“소심하기는…….”

그때였다.

슝.

화살 하나가 힘없이 날아와 땅에 박혔다.

적은 이제 화살마저 떨어진 것 같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남궁장천의 눈이 커졌다.

그 커진 눈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었다.

남궁장천은 자신이 이들에게 말려들었음을 알았다.

올라가서 적을 도륙 내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들 때문에 소중한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

뭐, 이들의 행동에 적의가 없음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적이었다.

남궁장천이 말했다.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만하자꾸나.”

말을 마친 남궁장천은 내공을 모으며 벽에 박혀 있는 검집을 바라봤다.

얼마 안 남았기에 절벽의 중간까지 단번에 뛰어올라야 했다.

이제는 화살도 거의 날아오지 않는다.

남궁장천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자칫하면 적을 놓칠 수도 있다 생각했다.

남궁장천이 지면을 박차고 날아오르려던 순간이었다.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굉음이 들려왔다.

쿠아앙!

섬광이 번쩍인 곳은 다름 아닌 절벽의 위였다.

위쪽에 있던 돌덩이들이 폭발하여 산사태가 나듯 쏟아졌다.

두두둑.

쏟아지는 돌덩이의 양은 무지막지했다.

거대한 바위에서 작은 돌멩이까지.

거기에 절벽의 윗부분도 폭발을 못 이겨 추락했다.

쾅!

묵직한 굉음을 마지막으로 소음이 멈췄다.

하지만 사방은 먼지로 가득 싸였다.

조금 과장하면 산을 반 토막 낼 기세의 폭발이었다.

주변을 가득 메운 먼지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 먼지 속에서 남궁장천은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만약 저곳으로 올라갔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만약 저곳에 올라갔다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폭발이었다.

분명 자신의 호신강기로도 몸을 보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진룡소협이라 자신을 소개한 젊은이였다.

그 젊은이가 시간을 끌지 않았다면 자신은 황천길로 갔을 것.

그 젊은이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있었을까?

물론 우연일 수도 있었다.

혹시 정의맹에서 보낸 반로환동의 고수?

남궁장천은 자욱한 먼지 속에 다급하게 한빈을 찾았다.

그때였다.

여기저기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콜록, 콜록.

하지만, 십대세가의 대표들은 평정심을 유지했다.

누구 하나 당황해서 소리치는 이도 없었으며 전열을 이탈하는 이도 없었다.

그들의 기침 소리가 잦아들 때쯤 자욱하게 깔린 먼지가 옅어졌다.

남궁장천은 자신의 옆에 있는 젊은이를 발견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절벽 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반짝이는 눈으로 말이다.

그때 젊은이에게 누군가가 달려왔다.

젊은이에게 달려온 이는 다름 아닌 황보세가의 가주, 황보만청이었다.

그 모습에 남궁장천이 다시 혼잣말을 뱉었다.

“대체 누구기에 황보세가의 가주와도…….”

한빈이 남궁장천의 시선을 못 느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그의 시선에 답할 필요는 없었다.

응답해야 할 사람은 남궁장천이었기 때문이다.

한빈은 달려온 황보만청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예까지 왔으면 인사라도 해야지. 그나저나 이번에도 우리 십대세가를 구했구먼. 어찌 알고 남궁세가를 구한 것이야?”

“뭐,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라……. 항상 운으로 치부하는구먼.”

“운이 맞습니다. 제가 여기 제때 도착한 것이 운이지요.”

“아, 그 말이었군. 그나저나 이제는 저 위를 조사해야 하지 않겠나?”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저 위에 있는 적의 시신이라도 찾아서…….”

“적은 이미 도망쳤을 겁니다.”

그때였다.

슝!

다시 화살 하나가 날아와 멀찌감치 있는 땅에 박혔다.

황보만청이 이해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도 화살이 날아오는데 적이 없다고?”

“저 화살이 사람이 쏜 것으로 보이십니까?”

“자네 말은 사람이 쏜 게 아니라는 것인가?”

“네, 맞습니다. 사람이 아니지요.”

한빈은 절벽 위를 바라봤다.

이것인 기관 진식에 능통한 자가 설계한 함정이었다.

금빛 도포를 휘날리던 사내는 진작 사라진 지 오래였다.

화살이 뜸해진 시점에서 나머지 적들도 다 후퇴했을 것이다.

폭약이 터지는 시점을 계산해 놓고.

활의 시위를 미리 당겨 고정한 후, 후퇴하면서 시위를 고정한 줄에 불을 붙여 놨을 것이 뻔했다.

지금 날아오는 화살은 폭발 반경의 옆에 설치해 놓은 것이다.

한빈이 이런 상황을 잘 아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귀검대 시절 수없이 써먹었던 수법이 바로 눈앞에 있는 괴멸진이었다.

남궁장천은 언제 저 위로 뛰어오르든, 고깃덩이가 되었을 것이다.

적이 남궁장천을 죽이려 했다는 것은 한빈에게 한 가지 진실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최소 남궁장천은 적에게 포섭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때였다.

십대세가의 대표로 이번 무가지회에 참석한 이들이 하나가 한빈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그는 다름 아닌 서문세가의 서문무결이었다.

그가 한빈 쪽으로 걸어오자 십대세가의 대표 중 몇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중 먼저 말문을 연 것은 모용세가의 대표였다.

“서문 대협이 왜 저기로 가는 건가? 저 젊은이와 아는 사이라도 된다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는가? 서문 대협은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사람인데 어찌 저 젊은이를 안단 말인가?”

위씨세가의 대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용세가의 대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서문무결과 한빈을 번갈아 봤다.

“그럼 저 젊은이가 혹시 서문세가의 사람…….”

“그럴 수도 있겠지.”

위씨세가의 대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그런 의문을 갖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서문무결은 가문 밖으로 나오는 이가 아니었다.

가문 안에서 수련만 하는 무인이었다.

십세세가의 검객 중 상위라고 평가받지만, 다른 이에게 진정한 실력을 드러내지 않은 자 중 하나였다.

사실 서문무결이 무가지회에 참석한 것을 보고 다른 십대세가 사람들은 조금 놀랐었다.

놀람도 잠시, 다른 이들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서문무결은 무가지회에 와서도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십대세가의 대표들은 그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였다.

뭐, 그가 은둔형 무인이라는 것은 이미 소문이 나 있는 상태이기에 모두는 그러려니 하며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가 젊은이에게 다가간다는 말인가?

이것은 한빈을 아는 이들조차 가지게 된 의문이었다.

서문무결은 한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잘 지냈는가?”

“네, 잘 지냈습니다. 서문 대협”

“자네를 보기 위해 무가지회에 참석한 건데, 얼굴이 안 보여서 섭섭했다네.”

“저를 보기 위해서라니요?”

“지난번에 못다 한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사천까지 왔네. 그런데 자네 얼굴을 보니 왠지 못마땅한 표정이군.”

“아, 아닙니다. 못마땅하다니요. 지난번에 저도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도움이라니, 내가 무슨 도움을 줬다고 그러나?”

“도움을 주신 것이 없다니요? 대협 덕분에 많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한빈이 빙긋 웃었다.

서문무결과는 영단산에서 처음 만났었다.

당시 하남정가에서의 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때 서문무결과 교류를 나누었다.

그냥 추상적인 친분을 나눈 것은 아니었다.

한빈은 그와의 비무에서 구결을 얻었으니 말이다.

한빈의 웃음에 서문무결이 답했다.

“나도 자네로부터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네.”

“축하드립니다. 얼핏 봐도 벽을 깨셨군요.”

한빈이 서문무결을 바라봤다.

대충 봐서 화경의 사 경 정도는 될 것 같았다.

그것은 전생에 한빈이 봤던 그의 경지와 비슷했다.

무려 십 년의 세월을 앞당겼다는 것이다.

“다 자네 덕분이네.”

서문무결의 말에 주변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젊은이가 서문무결과 저렇게 무공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그때였다.

산 너머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팡!

그 소리에 모두는 재빨리 병장기를 잡고 그쪽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청색 불꽃이 하늘에서 수를 놓고 있었다.

하늘 위에 풍경화를 그린 것처럼 아름다운 불꽃.

분명 전쟁터에서 쓰이는 신호탄은 아니었다.

긴장하던 십대세가 대표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병장기에서 손을 놨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봉화가 피어올랐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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