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 화향만리(火香萬里) (5)
꾸아앙!
지하 통로까지 폭음이 울렸다.
동시에 편안히 휴식을 즐기던 적혈맹호대 대원들이 재빨리 경계 태세를 취했다.
착. 착!
지하 통로에 울려 퍼지는 칼집을 잡는 소리.
심미호가 한빈의 앞으로 다가왔다.
“주군, 이게 대체…….”
“심 부대주.”
“네, 주군. 명만 내리십시오.”
“일단 마시던 술 마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주군.”
“무슨 말이긴, 하던 일 마저 하라는 거지.”
“지금 위에서는 난리가 난 것 같은데요.”
“심 부대주는 혹시 밥해 본 적 있어?”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장운현에서도 저놈들 제가 다 거둬 먹였어요.”
심미호는 엄지로 뒤쪽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한빈이 웃더니 말했다.
“그러면 뜸 들이는 게 중요하다는 것도 알겠군.”
“네? 뜸이라니요?”
“아까 말했잖아. 똥줄이 탈 때 손을 내밀어야 우리 가치가 올라간다고.”
“아, 그러셨죠…….”
심미호는 말끝을 흐리며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은 시종 여유를 잃지 않고 육포를 씹고 있었다.
심미호는 한빈의 표정에서 한 가지를 확신할 수 있었다.
이번 임무는 전처럼 위험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때였다.
꾸아앙!
다시 폭음이 울리며 천장에서는 흙이 쏟아졌다.
투두둑.
그 모습에 심미호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주군, 위쪽은 위쪽이라고 치고 우리도 위험한 거 아니에요?”
“에이, 우리가 이런 일 한두 번 당하나? 다 대비책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번 기회에 확실히 말해 줘야겠어.”
“뭘요? 주군.”
심미호가 고개를 갸웃하자 한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적혈맹호대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목소리에 적당한 내공을 담아 외쳤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
심미호를 비롯한 적혈맹호대 대원들을 긴장한 표정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흡족한 듯 표정을 지은 한빈이 말을 이었다.
“이번 임부는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니 걱정 안 해도 된다.”
그 말에 심미호가 다급히 물었다.
“정말이에요?”
“심 부대주는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
“본 건 아니지만…….”
“내 말 믿고 별도의 지시가 있기 전까지 편안히 술과 안주를 즐겨도 된다.”
한빈의 말에 심미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지시였다.
위에서는 어떤 아수라장이 펼쳐지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계속 휴식을 즐기라니!
이건 심미호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땅 짚고 헤엄치기라는 게 더 이해가 안 되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한 달 동안 땅굴을 파는 개고생을 왜 했겠는가?
또 그게 정말이라면 지금 아수라장이 되어 가는 곳의 바로 밑에서 대기를 왜 하고 있겠는가?
심미호가 한빈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을 때 나머지 적혈맹호대 대원들은 잔뜩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휴.”
“다행이다. 이번은 쉽게 넘어가겠어.”
“그러게 말이야.”
“사실 한 달 동안 햇빛도 못 보고 죽을 뻔한 걸 생각하면 이제는 좀 쉬어야지.”
“역시 주군이네. 우리의 이런 마음을 헤아려 주다니.”
그들은 한빈의 말을 듣고 다시 호리병을 잡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굉음이 울렸다.
쿠아앙!
후두둑.
순간 한빈이 진득한 웃음을 지었다.
“모두 준비한다.”
“이 순간을 기다렸어요, 주군.”
심미호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도를 쥔 채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일단 칼부터 치우고 말하지.”
“네?”
“칼부터 치우고,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 잘 들어.”
“네, 말씀하세요. 주군.”
“이제부터는 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거든.”
“음.”
“만약에라도 이곳이 무너지는 불상사가 생기면 바로 궤짝으로 들어가.”
한빈이 턱짓으로 적혈맹호대의 앞쪽에 있는 궤짝을 가리켰다.
심미호도 같이 궤짝을 봤다.
한참을 봐도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자 심미호가 다급하게 말했다.
“궤짝이요?”
“그래, 이 궤짝이 생각보다 단단하거든. 이거 천리 표국에서 보내온 거잖아.”
“그렇죠.”
“만든 건 하북 제일의 명장인 정철민 명인이 만든 거야. 그러니 웬만한 충격에서 버틸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무너져 내리면 이곳으로 피하라는 거죠?”
“간단하지?”
“헉, 아까는 위험한 일 없을 거라 하셨잖아요.”
“에이, 위험한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잖아. 안 그래? 심 부대주.”
한빈이 빙긋 웃자 심미호는 등골에서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그때 한빈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설화가 번개처럼 달려왔다.
“공자님, 여기 있어요.”
“그래. 고맙다, 설화야.”
한빈의 손에는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그 모습에 심미호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게 뭐예요? 혹시 계약서예요?”
“계약서는 아니고 각서 비슷한 건데, 일단 받아.”
한빈은 보따리를 아무렇지 않게 심미호에게 건넸다.
보따리를 받은 심미호가 고개를 눈매를 좁혔다.
“대체 이걸 제게 주시는 이유가 뭐예요?”
“이따가 사람들 데리고 오면 그냥 통과시키지 말고 여기에 손도장 다 받아. 다급한 상황이니 서명보다는 손도장이 좋을 거야.”
“헉.”
“왜 그렇게 놀라?”
“혹시 위험에 처한 사람들에게 장사하시려고…….”
“에이, 갑자기 왜 그래? 땅 파서 장사하는 것도 아니고 공짜가 어디 있어?”
“앗, 지금은 땅 파서 장사하는 게 맞는데요.”
“허, 그런가? 어쨌든 적혈맹호대의 임무는 이곳을 지키는 거니 그렇게 알아. 만약에 지킬 게 없다면 그냥 술만 마셔도 되고. 쉽지?”
“쉽네요, 주군.”
심미호는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쓸었다.
손가락 사이로 적혈맹호대의 모습이 모였다.
모두가 불안한지 마른침을 삼키고 있다.
그때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걸어갔다.
구석으로 걸어가는 한빈은 조용히 허공을 확인했다.
[용혈신공(龍血神功)]
[-진룡출세(眞龍出世).]
[-조일중원(照一中原).]
[-일조어주(逸藻於晝).]
[-월조어야(月照於夜).]
이제까지 모은 용혈신공의 문구였다.
사실 한빈이 용혈신공의 문구를 확인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 밑에 쓰여 있는 설명 때문이었다.
[천급 구결 사용까지 두 문장 남았습니다.]
두 문장을 더 얻어야 천급 구결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급까지는 아무런 제약 없이 사용이 가능했지만, 천급 구결을 사용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선행되어야 했다.
그것 중 하나가 바로 여섯 개의 문장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이미 충족되었다.
그것은 용혈의 주인이 되는 것.
이것은 모두 나루터에서 얻은 깨달음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한빈은 허공에서 다시 구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마 이번 대결에서는 천급 구결은 필요 없으리라 확신했다.
이번에 벌어질 대결은 무공의 수위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지략 싸움이니 말이다.
상대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늘의 대결을 준비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빈도 이날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준비했다.
물론 한빈이 밤을 새워 준비한 것은 아니었다.
뒤쪽에서 호리병을 든 채 멍하니 한빈을 바라보고 있는 적혈맹호대의 성과였다.
이제부터 그들이 준비한 것을 하나하나 꺼내 쓸 때가 된 것이었다.
한빈은 임시로 금이 간 부분을 고친 월아를 빼 들었다.
그러고는 용린검법 중 융합편 초식을 떠올렸다.
‘진룡파혼검.’
한빈이 초식을 머릿속에 떠올리자마자 용린의 기운이 온몸에 휘몰아쳤다.
사지에 있던 숨어 있던 기운들이 머리를 쳐들더니 노도처럼 단전으로 몰려들었다.
단전에서 한 번 정화된 기운들이 다시 심장으로.
그 심장에서 휘돌던 기운이 양팔로 뻗어 갔다.
투명한 기운이 양손에서 검파로 옮겨 간다.
검파로 옮겨 간 투명한 기운은 월아를 감쌌다.
이제는 파혼의 기운을 쓸 때가 된 것이다.
한빈은 월아를 들어 올렸다.
한빈은 천천히 월아를 내리그었다.
마치 검법의 기본기 같지만, 월아에는 일도양단의 기세가 담겨 있었다.
휙.
월아가 허공을 갈랐다.
순간 심미호를 비롯한 적혈맹호대 대원들의 눈이 커졌다.
눈앞에서 한빈이 진룡파혼검을 쓰는 것을 처음 봤기 때문이다.
심미호는 전에 본 적이 있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놀라웠다.
심미호의 뒤에 있던 적혈맹호대 대원들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었다.
살짝 굳었던 표정이 스르륵 녹으며 결의에 찬 듯 눈을 빛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빈의 무공에 대해서 대충 듣기는 했어도 이 정도일 줄을 몰랐다.
한빈의 진룡파혼검은 그만큼 압도적이었다.
한빈은 얼마 남지 않은 통로의 공간을 삭제해 버린 것이다.
지금 삭제된 공간에는 먼지도 일어나지 않았다.
먼지조차 모두 집어삼킨 초식.
눈앞에서 절대적 무위를 본 이들의 머릿속에 목표이자 배경이 생긴 것이다.
적혈맹호대 대원들은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쿵, 쿵.
평소 같았으면 칼로 바닥을 찍으며 예를 표시했겠지만, 소음을 일으킬 수 없기에 최대한 존경심을 담아 가슴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심미호도 한빈을 향해 예를 표했다.
쿵.
그 모습에 한빈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검지에 입술을 갖다 댔다.
“쉿.”
한빈은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뭐, 그들에게 목표를 심어 주기 위해서 진룡파혼검을 보여 줬지만, 아직은 화려하기만 한 초식이었다.
한참 동안 진기를 모아야 하는 진룡파혼검의 특성상 설전에서는 쓸 수 없었다.
이제까지 한빈이 진룡파혼검을 썼을 때는 모두 벽이나 땅을 파는 용도였다.
그때마다 자신이 광부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어쨌든 오늘은, 광부가 되었든 농부가 되었든 이제까지의 결실을 수확하는 날이었다.
한빈이 그들에게 보이는 미소는 진심이었다.
잠시 미소를 보인 한빈은 옷깃 스치는 소리만 남긴 채 사라졌다.
사사-삭.
뒤를 이어 설화와 청화도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보던 심미호가 고개를 돌렸다.
적혈맹호대 대원들은 돌이라도 씹어 먹을 듯한 기세로 아직도 가슴에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에 심미호가 외쳤다.
“각자 위치로!”
“명 받들겠습니다.”
적혈맹호대 대원들이 복명복창하며 자리로 뛰어갔다.
모두가 자리로 돌아가 경계 태세를 갖추자 심미호는 조용히 보따리를 풀었다.
한빈이 남기고 간 서류를 미리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두툼한 보따리를 열자 그곳에서는 서명을 받을 때 필요한 먹물과 벼루 그리고 미리 작성된 듯 보이는 계약서 뭉치가 있었다.
무심코 계약서를 힐끔 보던 심미호는 입을 떡 벌렸다.
“아…….”
그녀는 한빈이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눈빛에는 존경심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 * *
제갈공민은 지금 난공불락이라는 단어를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위쪽에서 떨어지는 화공에 뒤로 물러날 뿐 다른 대처 방법이 없었다.
쪽지에 적힌 대로 지금 상황은 적벽대전과 똑같았다.
조금 다른 것이라면 제갈량의 후손인 자신이 아래쪽에서 공격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람과 지형, 모든 것이 이쪽이 불리했다.
그렇다고 저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신을 비롯한 십대세가의 대표들은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계속 몰리고 있었다.
제갈공민은 그 쪽지를 준 사내가 누군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 사내가 여기에 있다면 해결 방안을 제시해 줄 것 같았다.
그런 생각도 잠시,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제갈량의 후손인 자신이 풀지 못하는 문제를 다른 이가 해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제갈공민의 옆에 기척도 없이 나타났다.
그는 제갈공민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제갈공민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붉은 무복의 젊은이가 있었다.
‘어디서 봤더라?’
제갈공민이 살짝 고민하고 있을 때 그가 물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