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 화향만리(火香萬里) (1)
유성을 본 현문은 말을 이었다.
“저건 아마도 무림을 위해 목숨을 바친 팽 공자의 영혼이 깃든 유성일 것이오.”
“네, 맞아요.”
제갈공려가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있던 제갈가의 공자들도 고개를 떨궜다.
자세히 보면 고개를 떨군 것이 아니라 일부러 숙인 것이었다.
그들은 경건한 자세로 묵례를 취하고 있었다.
제갈공영의 세 명의 아들 뒤로 있던 제갈가의 나머지 무사들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털썩.
털썩.
제갈세가의 무사들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으로 제갈공영과 제갈공려도 무릎을 꿇고 각오를 다졌다.
갑작스러운 광경이 펼쳐졌지만, 어색하지는 않았다.
모두가 가슴속에 같은 사람을 그리고 있었으니까.
* * *
같은 시각.
해가 완벽히 사라지고 풀벌레 울음이 주변을 가득 메운 공터.
모닥불 위에는 고기 꼬치가 지글지글 기분 좋은 소리를 내고 있다.
한빈은 모닥불을 바라보며 깨달음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번 깨달음으로 암제와 대결할 때보다 강해진 것일까?
그 물음에는 정확히 답을 할 수 없었다.
이 깨달음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면 지난번처럼 고전하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을 뿐이었다.
한빈은 고개를 갸웃하며 재빨리 귀를 후볐다.
갑자기 귀가 근질근질했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설화가 물었다.
“공자님, 왜 그러세요?”
“또 귀가 간지러운 걸 보면 또 누가 내 얘기를 하나 보네.”
“에이, 누가 공자님 얘기를…….”
설화가 다급히 말끝을 흐리며 한빈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모습에 이상한 한빈이 물었다.
“왜 그래?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그게 아니라 잘 생각해 보니 공자님 얘기할 사람이 꽤 많은 것 같아서요.”
“에이, 누가 내 얘기를 한다고 그래? 난 조용히 살고 싶은 사람이야.”
“네?”
설화가 눈을 크게 떴다.
그때 청화가 설화가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조용히 살고 싶으신 건 아닌 것 같은데요.”
“나도 그래, 청화야.”
설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그건 너희의 오해다. 나는 조용히 살고 싶거든.”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아니야, 조용히 살고 싶어. 그런데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지.”
“그게 뭔데요?”
“적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지.”
“적이 없는 세상이라고요? 그게 강호에서 가능해요?”
“불가능할 건 없지. 세상의 적이 다 죽거나. 아니면 내가 그 누구보다 강해지면 가능한 일이야.”
“음, 그거 좋네요. 공자님의 적이 없어지면 우리의 적도 없어질 테니까요.”
“그건 저도 찬성이에요.”
청화도 방긋 웃었다.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양예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의 말이 허언이 아닐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때 그의 옆에 있던 장자명이 대나무 통을 건넸다.
“양 공자, 한잔하시죠.”
“아, 장 의원님.”
“날이 춥습니다. 비록 값싼 화주지만, 야밤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술은 없지요. 지금 시간에는 이 술이 보약입니다.”
“네, 보약으로 알고 먹겠습니다. 장 의원님.”
양예신은 술잔을 든 채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는 한빈과 장자명 둘 다 은인이었다.
가문의 어떤 보물을 내놓는다고 해도 갚을 수 없는 은혜였다.
자신의 아비를 살린 인물들이었으니까.
반면 장자명은 양예신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그때였다.
설화가 말했다.
“저기 유성이 떨어져요.”
“앗, 소원을 빌어야 해요.”
청화가 다급히 말했다.
동시에 모두는 말이 없어졌다. 너나없이 각자의 소원을 빌고 있는 것이었다.
유성이 자취를 감추자 양예신이 활짝 웃으며 한빈을 바라봤다.
“영웅이 탄생하려는 모양입니다, 팽 공자님.”
“영웅이라니요?”
“원래 붉은색 유성은 영웅의 소멸을……. 푸른색 유성은 영웅의 탄생을 의미한다지요. 뭐, 산서 지방에 내려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게 팽 공자님이 아닐지…….”
“저는 영웅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네?”
“난세에는 영웅이 등장한다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제가 영웅이 된다면 그건 지금 세상이 난세라는 말 아닙니까? 난세의 영웅보다는 태평성대의…….”
한빈이 말끝을 흐리자 양예신이 눈매를 좁혔다.
“마저 말씀하시지요.”
“뭐, 태평성대가 더 좋다는 말입니다.”
“아.”
양예신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입을 벌렸다.
자신이 영웅이 되기보다는 태평성대를 바라는 한빈의 마음에 감동하여서였다.
하지만 옆에 있던 설화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평성대 뒤에 생략된 단어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한빈은 ‘부자’라는 말을 쓰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부자라는 말이 필요 없어졌다.
벌써 부자가 되었으니까.
설화는 한빈과 양예신을 번갈아 보다가 마차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영아가 남아 있었다.
한기에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마차 안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설화와 눈이 마주친 영아가 어색하게 웃는다.
용린검을 품에 안은 채 말이다.
혼자서 멀뚱히 있는 영아의 모습은 묘하게 측은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모습에 설화가 입술을 달싹였다.
설화가 막 입을 열려 할 때였다.
한빈이 먼저 외쳤다.
“무진과 영아도 이쪽으로 자리하시죠! 고기가 적당히 익었습니다!”
잠시 뒤 영아와 무진이 오자 한빈이 자리를 가리켰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무진에게 자리를 권한 한빈이 이번에는 영아를 바라봤다.
“검은 잠시 내게 맡겨도 된다.”
“가, 감사해요.”
“몸은 좀 괜찮아졌느냐?”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래, 다행이구나.”
고개를 끄덕인 한빈은 용린검을 건네받고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하루 뒤.
새벽에 밝아 올 때쯤 한빈 일행은 드디어 사천당가가 보이는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마을 어귀에 도착한 한빈은 행렬을 멈췄다.
“잠시만, 모두 멈추시지요.”
한빈의 지시에 모두가 발길을 멈췄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양예신에게 다가갔다.
한빈이 다가오자 양예신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준비됐습니다. 어떤 일이든 분부만 하십시오.”
양예신은 결의에 찬 눈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그가 산서의 신창양가를 떠나며 결심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한빈의 부탁이라면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정도(正道)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는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만큼 신창양가는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가문이었다.
그 표정을 본 한빈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표정이 왜 그렇습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 제가 부탁할 일이라는 건 별거 아닐 수도 있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무가지회가 열리는 사천당가 주변에서 대기해 주시면 됩니다.”
“네?”
“대신 한 가지는 지키셔야 합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뭐든 하겠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신창양가의 기준에서 큰일이라고 생각되면 그때 나서시면 됩니다.”
“대체…….”
“신창양가는 나라가 위험하거나 백성이 죽어 나갈 때는 꼭 나서죠. 그래서 충신의 가문이라는 명성을 얻었고요.”
“네, 맞습니다.”
“그 경우에만 나서면 됩니다. 다른 경우에는 모른 척하십시오.”
“그렇다면 대체 왜 저를…….”
“가장 좋은 증인이니까요. 뭐, 아무 일도 없다면 금상첨화겠지만요.”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는 없는지요?”
“뭐, 항상 하는 말이지만…….”
“아, 비밀이군요. 하하.”
양예신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한빈도 그의 표정을 보고 마주 웃었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겁니다, 하하.”
그들의 웃음소리가 잔잔하게 퍼지자 그들을 지켜보던 설화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점점 우리 공자님을 이해하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네. 좋은 거겠지?”
“그럼요, 언니.”
“하긴, 공자님을 이해하는 사람이 많다는 건 우리를 이해하는 사람도 늘어난다는 거니까. 헤헤.”
설화가 기분 좋게 웃을 때였다.
딱!
한빈이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설화가 청화에게 말했다.
“우리도 이제 몸 풀러 가자.”
“좋아요, 언니.”
순간 그들의 신형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사-삭.
풀잎 밟는 소리만 남긴 채.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을 본 양예신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그들이 사라진 자리를 볼 수밖에 없었다.
오늘따라 장창을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이 초라해 보였다.
부탁이라는 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일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그것도 잠시, 그는 장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 * *
수로 공사가 마무리되는 현장.
그 공사 현장에 있는 인부들은 모두 적혈맹호대의 대원들이었다.
지금은 한빈이 부탁한 공사가 거의 끝나 가는 시점이었다.
뭐, 진작에 끝나야 할 공사였지만, 통로 중간에 거대한 돌덩이가 굴러떨어진 덕분에 밤낮없이 총력을 다해 지금에서야 끝낼 수 있었다.
물론 그때 떨어진 돌덩이는 한빈이 만독 비고에서 탈출하며 몰고 온 것이었다.
그 때문에 적혈맹호대 대원들은 햇빛을 보지 못했다.
그 이유로 모두의 얼굴은 하얗게 되었다.
그들은 세안하고 몸을 푸는 등 마지막 작업을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두가 얼굴이 하얗게 변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본래 피부색을 유지하고 있는 자도 있었다.
세안하던 심미호는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는 주변을 바라봤다.
수하들은 햇빛을 보지 못해 얼굴이 하얗게 변했는데 자신만 검게 그을린 듯한 피부 그대로였다.
외부에서의 수련 때문에 피부색이 검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이게 본래 피부색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휴.”
심미호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침부터 웬 한숨이야?”
“이게 죽으려고…….”
고개를 돌린 심미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곳에는 한빈이 빙긋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 부대주 많이 컸어. 이제는 날 죽이려고 하네.”
“아, 아니에요. 주군.”
“심 부대주 얼굴 보니 잘 지낸 것 같군.”
“앗, 주군. 제가 어떻게 잘 지낼 수 있겠어요? 적혈맹호대 대원들 모두 이제는 한계예요.”
“한계치고는 너무 팔팔한데.”
한빈이 뒤쪽에 있는 적혈맹호대 대원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한빈이 온 것을 알아본 후 심미호의 뒤쪽으로 늘어서 있었다.
뒤를 힐끔 본 심미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쟤네 보세요. 햇빛을 못 봐서 얼굴이 하얗잖아요. 무슨 진주 가루를 얼굴에 펴 바른 것 같아요.”
“진주 가루라…….”
한빈이 말끝을 흐리며 심미호를 바라봤다.
심미호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심 부대주가 원하는 게 진주 가루였구나……. 그거 내가 이번 임무 끝나면 사 줄게.”
“헉.”
심미호가 탄성을 토하자 뒤쪽에서 설화가 튀어나왔다.
“제가 잘 적어 놨어요, 언니. 헤헤.”
설화의 말에 심미호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때 한빈이 표정을 바꾸었다.
“자, 이제부터 시작해 볼까?”
“네, 다 준비됐어요. 주군.”
심미호가 당당한 표정으로 포권했다.
잠시 뒤.
그들은 수로 공사라는 명목으로 만든 통로를 걷고 있었다.
이 통로는 사천당가와 이어진 통로였다.
심미호는 통로를 걸어가며 입에 침이 튀도록 그동안의 고생을 늘어놨다.
“여기 벽 보이시죠. 바로 이 부분에서 저희가 죽을 뻔…….”
심미호의 설명에 한빈은 영혼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걸어갔을까?
통로의 천장에서 미세하게 함성이 들려왔다.
잠시 걸음을 멈춘 한빈이 심미호에게 물었다.
“이 위가 연무장인가 보네?”
“네, 맞아요. 용봉지회가 열리는 비무대가 설치되어 있어요. 예선은 다 끝나고 오늘부터 본선이 시작된 것 같은데요.”
심미호가 천장을 가리켰다.
위쪽에서는 함성이 점점 커졌다.
와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