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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348화 (348/621)

348. 폭풍전야 (4)

사도련과 정의맹이 하나가 되어 병장기를 바닥에 찧기 시작했다.

쿵, 쿵.

지진이 난 것처럼 바닥이 공명하자 짐을 나르던 만금 전장의 일꾼들도 발길을 멈췄다.

그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발을 굴렀다.

그들은 보통 일꾼이 아닌 무사에 가까웠기에 지금의 이 분위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뒤쪽에서 구경만 하던 주양개와 나머지 거지들도 타구봉을 바닥에 찍었다.

쿵. 쿵.

그 울림이 잦아들 때 무진이 한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소협.”

“뭐가 죄송하다는 말이죠?”

한빈은 고개를 살짝 기울여 그를 바라봤다. 감사하다는 말이 아니라 죄송하다는 말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한빈의 시선을 받은 무진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아이가 검신을 만지는 바람에 망가졌다고 들었습니다.”

“하하, 괜찮습니다. 이 검은 상징적인 것일 뿐, 사람보다 중요한 것은 천하에 없지요.”

한빈이 완전히 망가진 듯 보이는 용린검을 들어 보이며 씩 웃었다.

물론 반만 진실이었다.

용린검은 망가진 것이 아니었다.

이런 모습이 된 것은 한빈이 그 안에 있는 구결을 들춰 냈기 때문이다.

한빈의 피에는 강호에 흩어진 용린검법의 구결이 녹아 있었다.

이제 용린검은 완벽하게 한빈의 피에 반응한다.

한빈의 피가 들어가면 언제나 온전한 용린의 모습을 찾는다.

“감사합니다, 소협.”

무진이 한빈의 앞에서 엎드리려 했다.

한빈은 재빨리 그의 소매를 잡았다.

“과한 예는 거두시지요.”

“아닙니다. 어찌 이런 은혜를…….”

무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묘한 시선들 때문이다.

무진은 주위를 둘러봤다.

사도련과 정의맹의 무사들이 눈이 촉촉해진 채 한빈과 자신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어떤 함성도, 어떤 몸짓도 없었지만, 그 눈빛에는 감동이란 두 글자가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아직 은혜를 논하기는 이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당신의 따님은 아직 완벽하게 회복된 것이 아닙니다.”

“네?”

“혹시 어렸을 적 영약 같은 걸 먹지 않았습니까? 아니면 정체불명의 물건이나요?”

“그러니까……. 그런 것을 먹은 적은 전혀 없습니다.”

뭔가 떠올리려고 애쓰던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다시 물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분명히 붉은색 기운이 담긴…….”

“붉은색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맞습니다. 아마 붉은색 기운을 내고 있었을 겁니다.”

“지금 생각났습니다. 서역에서 넘어온 붉은색 색소를 먹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때부터…….”

무진의 설명은 간단했다.

그때부터 영아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고 한다.

신기한 것은 부근의 또래 아이들이 전염병으로 다 죽어 나갈 때, 오히려 영아만은 멀쩡했다고 한다.

용린의 주인이 아닌 자가 그 기운을 감당하기는 힘든 법이다.

그 기운이 몸에 남아 있으니 이렇게 죽어 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기운 덕분에 전염병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운이 나쁜 것인지 아니면 좋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결론적으로 여기까지 왔으니 후자에 가까울 것이었다.

설명을 마친 무진이 조심스럽게 한빈의 표정을 살피었다.

“제가 설명해 드릴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런데 우리 딸아이는…….”

슬쩍 눈치를 보는 무진.

한빈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 색소가 감당하지 못할 기운을 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 살려 주십시오. 대협.”

무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소협에서 대협으로 호칭까지 바뀌었다.

한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진과 영아에게 다가갔다.

터벅터벅.

영아의 앞에 멈춘 한빈은 용린검을 그녀에게 건넸다.

“사천당가까지 나와 동행한다. 그리고 그동안 넌 이 검을 맡아라.”

“네?”

“임시로 내 검동(劍童)이 되라는 말이다.”

검동이란, 글자 그대로 검을 든 아이다.

고수 중 일부는 검을 관리하는 아이를 쓰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한빈은 이제껏 다른 이에게 검을 맡긴 적은 없었다.

물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경우만 빼고 말이다.

한빈의 제안에 옆에 있던 설화가 고개를 갸웃한다.

청화도 마찬가지 표정이다.

그들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은 작게 웃으며 용린검을 가리켰다.

그제야 영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 받들게요.”

영아가 고개를 끄덕인 것은 한빈의 뜻을 알아서가 아니었다.

그저 한빈의 말을 따르는 것이 이치에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감당하지 못할 용린의 기운을 품어 몸은 망가졌지만, 오감만은 누구보다 더 발달하게 된 영아였다.

영아는 조건을 보고 판단하기보다는 본능적으로 옮고 그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한빈이 그녀를 임시 검동으로 데려가려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용혈이 영아의 몸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남아 있는 용혈을 흡수할 방법으로는, 그녀가 용린을 품고 있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었다.

대충 계산을 해 보니, 사천당가까지만 가면 영아의 몸에 남은 기운을 모두 흡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빈은 무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딸아이와 함께 사천당가까지 갔다가 여기로 돌아오시면 됩니다.”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은공 대협.”

“대협이란 호칭은 거둬 주시죠. 그럼 준비하시죠.”

한빈이 저 멀리 있는 마차를 가리켰다.

그 마차는 양예신의 일행이 몰고 온 것이었다.

한빈과 양예신이 마차로 향할 때였다.

한빈은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생각지도 못한 기세가 멀리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과연 누굴까?’

한빈은 그 기세의 정체에 대해서 추측해 보았다.

하지만 감이 잡히는 인물은 없었다.

다행인 것은 기척이 잡히는 방향이 흑의살풍과 편육랑아가 사라진 방향이라는 것이다.

설마 강남 사도련주가 직접?

한빈은 재빨리 용린검법의 초식을 떠올렸다.

‘반박귀진.’

순간 한빈의 기세가 봄날 눈 녹듯 사라졌다.

기척을 완벽하게 지운 한빈은 마차로 걸어갔다.

신창양가에서 몰고 온 마차는 제법 넓었다.

장정 여섯이 들어가도 넉넉해 보였다.

마차 앞에 선 이들은 잠시 멈칫했다.

마부석에 누가 앉을까를 고민하면 설화와 청화가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무진이 그들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이래 봬도 말은 제법 모는 편입니다. 제가 고삐를 잡아도 될는지요.”

“그렇게 하시지요.”

“네, 감사합니다.”

작게 고개를 숙인 무진이 영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내 옆에 앉아라, 영아야.”

“네, 아버님.”

영아가 마부석으로 오르려고 할 때였다.

한빈이 사람 좋은 표정으로 말했다.

“영아는 아직 몸 회복이 안 된 상태이니, 같이 마차에 오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허, 은공…….”

무진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한빈은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손을 저었다.

한빈은 영아를 마부석에 태울 수는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용린검을 마부석에 놓아 둘 수는 없었다.

옆에 있던 설화는 한빈의 뜻을 읽었는지 무진을 힐끔 보고는 어색하게 웃는다.

그 웃음을 본 청화도 본능적으로 웃었다.

청화가 웃자 영아도 따라 웃는다.

자신의 딸이 웃는 것을 보자 무진도 희미하게 웃었다.

오늘에야 영아의 정상인 같은 표정을 보게 되자 가슴이 뭉클했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딸아이를 바라보던 무진은 감개무량한지 하늘을 바라봤다.

한빈은 그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차의 문을 열었다.

덜컹.

문이 열리고 한빈은 조용히 마차에 올랐다.

설화와 청화 그리고 그들을 뒤따라 영아도 마차에 올랐다.

영아까지 마차에 오르자 마차 문이 닫혔다.

설화는 보따리를 빈자리에 놓고 마차를 둘러봤다.

이제까지 탔던 마차보다 더 화려했다.

설화는 이 부분에서 살짝 의문이 들었다.

신창양가는 검소하기로 소문난 무림세가였다.

이런 화려한 마차와 신창양가의 분위기는 상극이었다.

금은보화도 허름한 수레에 싣고 다니는 것이 그들의 관습이었다.

그런데 이 마차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순간 설화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이 마차의 정체성이 의심되자 곧바로 신창양가를 의심하게 된 것이다.

그때였다.

마차 안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앗, 누가 여기 있어요!”

비명을 지른 이는 영아였다.

영아는 설화 쪽으로 바싹 붙어 마차 구석을 가리키며 벌벌 떨었다.

그곳에는 누군가가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설화는 재빨리 우혈랑검을 잡고 경계 태세를 취했다.

청화의 손에는 투명한 독 기운이 일렁인다.

일촉즉발의 상황.

한빈이 재빨리 손바닥을 보이며 그들을 말렸다.

“워어, 조심조심.”

“…….”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적이 아니다.”

“적이 아니라고요?”

이번에는 독 기운을 거둔 청화가 물었다.

한빈은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희가 아는 사람이다.”

한빈의 말에 설화가 눈매를 좁혔다.

뒤통수가 어디선가 본 듯 낯이 익었다.

자세히 보니 어깨를 가늘게 떨고 있는 모습이, 은신한 것이 아니라 겁먹은 꿩처럼 숨은 것이었다.

모두가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을 바라볼 때 한빈이 그의 목덜미를 잡아 일으켰다.

드디어 고개를 파묻은 꿩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설화가 소리 질렀다.

“앗, 의원 아저씨!”

“헉, 아저씨가 왜 여기 있어요?”

청화도 외쳤다.

꿩처럼 고개를 파묻은 이는 다름 아닌 장자명이었다.

장자명이 신음을 토했다.

“음, 대체 당신들…….”

살짝 말끝을 흐리던 장자명이 눈을 크게 떴다.

“어, 설화 아니냐? 너는 청화고…….”

“네, 설화 맞아요. 아저씨, 어떻게 된 거예요?”

“아까 팽 공자가 와서 큰 싸움이 벌어질지 모르니 숨을 죽이고 있으라고 해서 숨어 있었던 건데……. 싸움은 끝났느냐? 다친 사람은 없고?”

“싸움이요?”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다 장자명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장자명은 뭔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팽 공자.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 죽을 고생을 했는데 장 의원만 이리 호의호식을 하다니 억울하지 않습니까?”

“제가 원해서 이런 대우를 받는 것도 아닌데…….”

장자명의 눈이 촉촉해졌다.

그때 설화가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의원 아저씨.”

“그러니까…….”

장자명의 설명은 간단했다.

신창양가에 가서 보니 한빈의 말대로 장자명이 쉽게 치료할 수 있는 병이었다고 한다.

그 병을 치료하자 장자명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 줬다는 것이다.

마차도 평상시에 쓰지 않는 화려한 사두마차를 사들여서 장자명은 상전 받들듯 여기까지 모셨다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에 설화가 조용히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녀의 머릿속에 영단산, 칠음현 그리고 귀락천에서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자신과 청화 그리고 한빈은 죽을 둥 살 둥 위험을 헤쳐 왔는데, 장자명만이 호의호식을 했다 하니 조금 억울했다.

설화의 표정을 본 장자명이 물었다.

“설화야, 왜 그러느냐?”

“아저씨만 너무 편한 거 아니에요?”

“아, 그건 조금 미안하구나. 대신에 내가 간식을 준비했다.”

말을 마친 장자명은 마차의 구석에 있는 상자를 열었다.

장자명은 그곳에서 재빨리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당과 꼬치였다.

장자명이 당과 꼬치를 내밀자 설화의 눈이 커졌다.

“아저씨.”

“왜 그러느냐 설화야?”

“우릴 잊지 않으셨군요. 헤헤.”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장자명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잊을 리가 없지. 이건 청화가 좋아하는 떡이다.”

장자명은 이번에는 청화에게 간식을 건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영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가족이네요.”

“가족?”

당과를 먹던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자 영아가 씩 웃으며 답했다.

“제 눈에는 가족 같아 보여서요.”

“맞아. 가족이 맞지. 헤헤.”

설화는 활짝 웃으며 밖으로 지나가는 경치를 바라봤다.

* * *

한편, 그 마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는 여러 쌍의 눈이 있었다.

그는 언덕에서 한빈이 탄 마차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듣던 것보다 대단하군. 대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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