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 폭풍전야 (3)
조용히 한빈을 보던 선주는 표정을 풀었다.
그가 보기에 한빈은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물론 선주의 기억 속 한빈은 변장했던 적룡대협의 모습만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선주의 눈앞에 서 있는 한빈은 잘생긴 청년에 불과했다.
선주는 주변을 둘러봤다.
사파와 정파의 무인들이 청년과 자신만을 쳐다보고 있다.
아마도 청년의 신분은 대단히 높을 것이었다.
순간 선주의 눈이 살짝 빛났다.
장사꾼에게 위기는 기회가 아니던가?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자 갑자기 장사꾼 특유의 본능이 살아난 것이다.
열다섯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보고 있던 설화는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에 청화가 물었다.
“그, 그런 표정을 해요? 언니.”
“저 선주라는 사람이 잠자는 호랑이의 수염을 건드린 느낌이라서…….”
하지만 설화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그곳을 바라봤다.
청화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그럼 이번에는 제가 준비해도 돼요?”
“응, 네가 준비해도 돼, 내가 챙겨 줄게.”
말을 마친 설화는 이전에 서재오와의 계약에 썼던 물품을 정리해서 청화에게 넘겼다.
보따리를 넘겨받은 청화는 조용히 한빈을 바라봤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한빈이 손가락을 튕기는 즉시 달려가려고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설화가 청화가 한빈에게 관심이 있는 만큼 나머지 사람들도 천천히 모여들었다.
사도련의 무사들도 그렇고 정의맹의 무사들도 한빈에게 관심이 꽂힌 상황.
한빈이 어떤 대화를 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마치 고수의 비무를 구경하는 듯 그렇게 한빈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은 선주와 대화를 이어 나갔다.
물론 아직은 손가락을 튕기지 않았다.
그저 신기한 듯 선주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선주는 붉은 검신이 한빈에 손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고 나서 그 값을 요구하고 있었다.
“……정파로 보이는데, 그냥 뺏어 가지는 않겠지요? 어쨌든 제가 찾아 드린 게 아닙니까?”
뭐,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찾아 줬으니 그 값을 치러 달라는 것이었다.
한빈이 씩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사례는 해야겠지.”
한빈이 슬쩍 말투를 바꿨다. 선주는 한빈의 바뀐 태도를 알아채지 못하고 손을 내밀었다.
“그럼 그 값은 셈해 주시죠.”
“문제가 하나 있는데.”
“그게 뭔지 말씀해 주시죠.”
“내가 알기로는 저 부녀가 찾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
“그것은 맞지만, 저 부녀는 제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들의 물건은 제 물건이기도 합니다.”
“오호, 이해가 되네.”
“그러니…….”
“그런데, 아쉽게도 보관을 잘못했어.”
“네?”
선주의 눈이 커졌다.
순간 한빈이 쪼그려 앉은 채 용린검을 검집에서 뽑았다.
스릉.
용린검이 검집에서 뽑혀 그 자태를 드러냈다.
용린검은 전과는 다르게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 모양은 확실히 이상했다.
표면은 거칠었고 청록색 녹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날은 뭉툭해서 그 검으로는 종이 한 장 벨 수 없을 것 같았다.
선주는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까 봤던 묘한 기운은 모두 자취를 감추고 흉물스러운 쇠꼬챙이가 눈앞에 있을 뿐이라니!
“이게 대체…….”
“내가 말하지 않았나? 보관을 잘못했다고.”
“제가 그런 게 아닙니다.”
“자네가 그런 게 아니라고? 저 밧줄의 재료가 뭐지?”
“밧줄의 재료라면…….”
선주는 말끝을 흐리며 자신이 검신을 감쌌던 밧줄을 바라봤다.
그것은 특별한 밧줄이 아니었다.
“그저 짚을 꼬아서 만든 밧줄입니다. 짐을 고정하는 데는 써도 선상에서는 쓸 수 없는, 그저 흔하디흔한 밧줄인데 그게 무슨 문제입니까?”
“그래, 그 짚이 이 검에는 상극이거든. 게다가 사람의 손을 타도 그리 좋지는 않지. 이제 이 검은 보검의 지위를 잃고 평범한 쇠꼬챙이가 됐어. 그걸 어떻게 책임질 텐가?”
한빈은 선주의 코앞에 검을 갖다 댔다.
그 모습을 보던 정의맹과 사도련의 무사들은 이구동성으로 헛숨을 토했다.
“허, 보검이 사라졌네.”
“저 말도 맞지. 보검의 경우 보관하는 방법이 독특한 경우가 많으니.”
“맞아, 북해의 만년빙검은 그 지역을 벗어나서 삼 년이 지나면 검이 녹아내린다지.”
“그뿐인가? 남만의 야수궁의 철혈야수검은 반대로 추운 곳에 가면 부서진다고 들었어.”
“허허, 저자가 잘못했네.”
그들이 웅성대고 있을 때, 사도련의 무사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저건…….”
“왜 그러나?”
“적룡대협의 보검이 아니던가?”
“헉, 그럼…….”
“저자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목숨으로도 갚지 못할 것 같은데.”
그들은 한빈과 선주를 향해 한 발짝 더 다가섰다.
그러고는 모두가 이를 꽉 깨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됐기 때문이다.
보검이라는 것이 어떤 존재인가?
고수가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꼽으라면, 내공과 초식 그리고 병장기를 꼽는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날아간 것이다.
그들의 눈빛에는 신경 쓰지 않고 한빈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 미소를 본 선주는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 상황을 벗어날 궁리를 하기 위해 치열하게 머리를 굴렸다.
한빈과 지금까지 한 대화를 모두 떠올린 선주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밧줄은 제가 쓴 것이지만, 손으로 만진 것은 저 아이입니다.”
선주는 손가락으로 영아를 가리켰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영아와 무진 부녀에게 돌아갔다.
그 모습에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까 들어 보니 저들이 자네한테 빚을 졌다면서? 그래서 저 부녀의 물건은 다 자네 것이라면서.”
“…….”
“그럼 저 부녀의 잘못도 자네 것이 아닌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건 제가 말이 헛나와서…….”
“그럼 저 부녀와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네, 네. 전혀 상관없습니다.”
“그럼 확인서 하나 쓰게.”
“종이가…….”
“그건 자네가 알아서 찾아야지, 아무 종이나 꺼내.”
“네, 알겠습니다. 당장 쓰죠.”
선주는 자신의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는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하지만 실수로 여러 장의 종이가 딸려 나왔다.
순간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안(眼)의 구결을 사용하자 흩어진 종이 위에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 순간은 한빈에게 시간이 멈춘 것과 같았다.
한빈은 그 종이 중 하나를 낚아챘다.
휙.
깜짝 놀란 선주가 외쳤다.
“지금 무슨 짓을……!”
“쉿!”
한빈이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며 종이를 펼쳤다.
그러고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이건 차용증이네.”
“헉.”
선주가 입을 벌리며 뒷걸음친다.
마치 언제라도 도망갈 수 있도록 준비하는 듯 보였다.
한빈은 바로 손을 뻗었다.
픽!
그는 선주의 허벅지에 있는 혈도를 찍었다.
순간 선주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한빈이 제압한 혈도는 하반신만 마비시켰다.
하지만, 선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두려운 듯 떨고 있었다.
한빈이 약간 목소리를 높여 말을 이었다.
“그런데 빌려준 자가 ‘무조’라고 되어 있는데 무조가 누구지?”
한빈의 외침에 열 걸음 정도 떨어져 있던 무진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부친이십니다.”
“이리 좀 와 보시죠.”
“네.”
무진이 한걸음에 뛰어왔다.
정의맹과 사도련의 무사 중에도 몇몇이 뛰어왔다.
그들은 이 마을이 고향인 자들이었다.
그들이 마른침을 삼키고 있을 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빌려 간 자 이름이 ‘심삼조’로 되어 있는데, 심삼조가 누구지?”
순간 주변이 잠잠해졌다.
한빈은 힐끔 무진이라는 자를 바라봤다.
무진의 눈빛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겨우 감정을 수습한 무진이 말을 이었다.
“저자입니다.”
“이자가 확실합니까?”
한빈이 관자놀이는 톡톡 치며 선주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나머지 종이를 그의 품에서 꺼내 펼쳤다.
종이를 펼친 한빈은 빌려준 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읊었다.
이름이 튀어나올 때마다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한빈의 주변으로는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다.
더 놀라운 것은 똑같은 내용의 차용증이 하나가 아니라 두 장이라는 점이었다.
그 두 장은 빌려준 자와 빌린 자의 이름만 바뀌어 있었다.
한빈은 이런 경우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어설픈 자가 서명을 위조할 때 쓰는 방법이었다.
자신이 위조한 서명에 대해서 자신이 없으니 원본을 버리지 않고 보관하는 것이다.
대충 들어 보니 사건의 시작은 간단했다.
선주, 즉 심삼조는 마을에 전염병이 돌기 전에 마을 유지들에게 제법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
많은 배를 구입해서 사업을 벌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홍수가 나서 배가 다 떠내려가자, 심삼조는 무일푼이 되었다.
이제는 빚만 남은 상황.
그러나 홍수 후 전염병이 돌며 마을 유지들이 숨을 거둔 것이다.
마을 유지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줄초상을 치른 상황에, 심삼조는 그들의 집에 들어가 차용증을 홈쳐 낸 것.
하지만, 그의 범죄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차용증을 위조해서 빌린 자와 빌려준 자를 바꿔 쓴 것이다.
그는 위조한 차용증으로 유족들에게 돈을 요구했다.
나이 든 어른 대부분이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남은 이들을 속이는 것은 땅 짚고 헤엄치기였을 것이었다.
덕분에 그는 이 마을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부자가 되었고 그에게 돈을 뜯긴 가문은 하루아침에 몰락한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밝혀낸 것은 전생의 경험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사실 한빈은 선주가 하는 행동이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다 보니 전생에 기억이 있던 자였다.
정마대전 당시 무기를 조달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던 상인이었다.
그 기억을 떠올린 순간 한빈의 마음은 바뀌었다.
처음에는 무진 부녀만 구하려 했었지만, 그를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그가 팔아먹은 불량 병장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제명을 다하지 못했었다.
적과 마주친 검이 똑 부러지니 어떻게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한빈은 그런 이유로 전생에 심삼조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본래는 천천히 조이려 했지만, 뜻하지 않게 모든 악행이 드러난 것.
한빈도 그가 위조한 차용증과 원본 차용증을 동시에 들고 다닐 줄은 몰랐었다.
어쨌든 앞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사건의 싹은 확실히 잘랐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한빈이 손을 다시 들었다.
딱!
한빈이 손가락을 튕기자 이번에는 청화가 달려왔다.
청화는 설화와 마찬가지로 보따리를 풀었다.
그 모습을 보던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청화의 눈이 토끼 눈처럼 뻘게졌기 때문이다.
“청화야, 왜 그렇게 눈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청화가 손을 내저었다. 지필묵이 든 보따리를 가져오기 위해 지금까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한빈은 서찰 한 장을 썼다.
그러고는 선주에게 피해를 본 것으로 보이는 무사 하나를 불렀다.
“선주와 이 서찰, 그리고 나머지 증거를 관아에 넘기면 됩니다.”
“관아에 넘겨도…….”
“그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이 서찰을 무시할 만큼 간이 배 밖으로 나온 현령은 없을 테니까요.”
한빈이 씩 웃었다.
그 웃음은 피해를 입은 무사와 무진에게 믿음을 줬다.
서찰을 받은 무사 하나가 머리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담을 수 있는 최대한의 내공을 담아 외쳤다.
“진룡소협께 감사드립니다!”
그 외침은 전염병처럼 번져 나갔다.
“진룡소협.”
“진룡소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