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 폭풍전야 (2)
한참 동안 미소를 지어 보이던 한빈이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이 물건이 누구와 관련 있습니까?”
한빈은 배를 가리켰다.
그러고는 한빈,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고 다시 용린검을 가리켰다.
“…….”
갑작스러운 한빈의 행동에 서재오는 답을 할 수 없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청운사신과 적룡대협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인인 제가 맡기는 겁니다.”
“그게 비용과 무슨 관계인가?”
서재오도 물러설 수 없었다.
화산파의 매화검수이기 전에 만금 전장의 직계였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손해 보는 거래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한빈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 갑자기 섬뜩한 느낌이 든 서재오가 재빨리 물었다.
“그 웃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매화검협 님은 만금 전장이 앞으로 더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성장이라…….”
“만금 전장이 중원의 전장 중에는 세 손가락 안에 들지만,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봅니다. 근래 들어 틈틈이 나타나는 신흥 세가하며 황실 인척들도 여러 전장에 나누어 맡기는 추세이지요.”
“그건 맞는 말이네. 그런데 말하고 싶은 것이 뭔가?”
“아까 들어 보니 청운사신과 적룡대협이 무림이왕이라는 칭호로 불리더라고요.”
“무림이왕이라…….”
서재오는 그 칭호를 곱씹었다.
무림이왕은 조금 낯설기는 해도 근래에 들어 무림인들의 입에서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이름이었다.
사실 무림의 가장 높은 곳에는 삼존이 있다고 하지만, 사람들의 입에는 오르내리지 않는다.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림삼존의 칭호는 그냥 지명과도 같이 굳어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변화도 없는 지명에 누가 관심을 갖겠는가.
무림삼존이라는 이름이 이와 같았다.
하지만, 무림이왕의 이름은 그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잔혈마도와 맞서 싸워 사파인들을 구한 적룡대협.
그리고 하남정가에서 불의에 맞서 정체불명의 세력을 도륙한 청운사신.
그들의 발자취는 실시간으로 강호인들에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무림이왕의 칭호를 곱씹던 서재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 모습을 확인한 한빈이 말을 이었다.
“그 정도로 위명을 떨친 분들의 공동 후인이 맡기는 물건입니다. 그 물건을 맡는 순간 만금 전장은 무림이왕이 믿을 수 있는, 안전한 전장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것입니다. 솔직히 무림삼존의 이름을 걸고 홍보할 수 있습니까?”
“음.”
“없겠죠. 그분들이 그런 걸 허락할 리도 없고 무림삼존 중 맡길 돈이 있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무림이왕이라면 다르죠. 이제부터는 그 칭호는 마음껏 사용하십시오. 지금부터 만금 전장은 무림이왕과 함께합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물론 저도요.”
말을 마친 한빈은 빙긋 웃으며 계약서를 가리켰다.
서재오는 붓을 보고서 살짝 망설였다.
전장이라는 곳은 돈이든 물건이든 맡게 되면 그 보관 비용을 받는 곳이다.
위험이라든지 운송까지도 책임을 지는 일이 그들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물건을 맡는 것도 모자라 비용까지 치러야 한다.
이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망설이는 서재오의 모습에 한빈이 설화를 불렀다.
“설화야, 저기 있는 분 좀 모셔 와라.”
한빈이 가리킨 것은 배를 지키고 있는 주양개였다.
“네, 알았어요. 공자님.”
설화는 재빨리 주양개에게 달려갔다.
주양개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귓속말을 전하자 깜짝 놀란 그는 미친 듯이 달려왔다.
“왔습니다, 팽 공자님.”
“내 다른 게 아니라, 남는 전서구가 좀 있죠?”
“전서구는 왜 찾으십니까?”
“제가 천하 전장과 황금 전장에 전서구를 띄울까 해서 그럽니다. 그러니 전서구 두 마리 정도면 됩니다. 지금 필요하십니까?”
“설화를 보낼 테니 설화에게 보내 주십시오.”
“네, 저희야 남는 게 전서구입니다.”
“얼마면 되겠습니까?”
“아휴, 아까 주신 돈만 해도 충분합니다.”
“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한빈이 빙긋 웃자 주양개가 앞서 나갔다.
그 뒤를 설화가 쫓는다.
그때 서재오가 외쳤다.
“잠시만, 기다리게!”
그의 외침에 한빈이 말했다.
“설화야, 잠시만 기다려라.”
지시를 받은 설화는 주양개를 불렀다.
“거지 아저씨, 잠시만요.”
앞서 나가던 주양개가 씩 미소를 지었다.
주양개는 이제까지의 일을 모두 보고 들었다.
이것은 개방의 정보로 취합될 것이었다.
그것은 개방에 전달될 사실들이었고 개방의 본단으로 전달하지 않은 자신의 느낌이 진짜 정보라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주양개가 생각하고 있는 진짜 정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주양개가 주관적으로 평가한 한빈의 면면이었다.
주양개가 생각하기에 한빈에게 소협이라는 칭호는 어울리지 않았다.
한빈에게는 늙은 생강이라는 칭호가 더 어울렸다.
그만큼 한빈은 심계가 뛰어났다.
정파와 사파 무인들의 마음을 한 번에 사로잡으려고 한다면 과연 어떤 술책을 써야 할까?
정답을 말해 보라고 한다면 주양개는 그런 질문을 던진 이의 귀싸대기를 시원하게 날려 버릴 것이었다.
왜냐하면? 정답은 없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방법이 없었다.
정파와 사파가 하나가 된 것은 마교와 맞설 때뿐이었다.
그러니 둘에게 동시에 호응을 얻어 내려면 정마대전이 일어났을 때 영웅이 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한빈은 묘한 방법으로 정파와 사파 무인들의 지지를 한 번에 끌어내고 있었다.
게다가 만금 전장을 상대로 저런 거래를 한다고?
만금 전장과 거래를 하고 진룡소협이라는 칭호를 끌어낼 수도 있었다.
그런데 한빈은 그 전에 할 일이 있다고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주양개가 보기에 이것은 한빈이 바둑을 두는 것처럼 한 수 한 수를 설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뭐, 여기까지는 우연일 수 있었다.
그런데 한빈은 지금 전서구를 날릴 것처럼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한빈이 전서구를 날린다고 선포한 천하 전장과 황금 전장은 어디일까?
근소한 차이로 만금 전장의 뒤를 쫓는 경쟁자들이었다.
이것도 한빈의 한 수.
주양개가 보기에는 서재오는 축에 몰린 것이었다.
어떤 수를 쓰던 그 끝은 한빈의 의도대로 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동작을 멈추자 서재오가 한숨을 쉬었다.
“휴, 할 수 없군. 내 서명하겠네.”
“서 대협은 확실히 시원시원해서 좋습니다.”
“내가 시원시원한 거로 보이나?”
“그렇다고 해 두죠.”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네.”
말을 마친 서재오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사사삭.
고민은 많았지만, 일단 붓을 잡자 그의 붓은 거침없었다.
탁.
붓을 멈춘 서재오는 계약서 중 하나를 한빈에게 넘겼다.
“물품은 우리가 정리하겠네. 지켜볼 텐가?”
“제가 시간이 없어서요.”
“허.”
서재오가 허탈하게 웃었다.
이토록 철저하게 이득을 취하고는 그 알맹이를 확인도 안 하겠다니 대범한 것인지 아둔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아시다시피 제게는 모든 일을 지켜볼 쥐와 새가 많거든요.”
한빈은 힐끔 주양개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서재오가 다시 웃었다.
“내가 졌네.”
“서 대협께서는 이 물건을 만금 전장에 맡기신 뒤 무가지회가 열리는 사천당가로 다시 와 주십시오.”
“알았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그때였다.
멀리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휘이!
그 소리에 편육랑아가 눈매를 좁히며 흑의살풍을 바라봤다.
흑의살풍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가 봐야겠소. 소란을 보고 오긴 했지만, 공자와 약속한 곳에 가 있겠네.”
“네, 다음에 뵙겠습니다.”
한빈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자 흑의살풍과 편육랑아가 포권하고 다급히 사라졌다.
모든 것이 마무리되는 듯하여 보이자 서재오가 말했다.
“이제 출발할 텐가?”
“네, 그래야죠.”
한빈이 웃으며 나루터 밖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만금 전장의 일꾼들이 눈이 휘둥그레진 채 달려왔다.
숨을 몰아쉰 일꾼은 서재오에게 다급하게 다가갔다.
그의 귓속말에 서재오의 눈이 커졌다.
시시각각 변하는 서재오의 표정은 마치 경극 한 편을 보는 듯했다.
보고를 다 받은 서재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팽 공자, 대체 저 배에 들어 있는 물건은 어디서 났나? 팽 공자가 하는 일이야 그러려니 하겠지만, 저 배에 있는 물건은 감당키 어렵군.”
“목숨을 건 대가로 받은 물건입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물론 제 목숨만은 아닙니다. 이 아이들의 도움입니다.”
한빈은 슬쩍 설화와 청화를 가리켰다.
그 모습에 서재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보고를 받았기에 서재오가 그리 놀란 것일까.
지금 그에게 보고한 일꾼은 만금 전장 사천지부의 지부장이었다.
지부장은 전장 업계에서 몇십 년을 굴러온 사람이었다.
그는 이런 가치의 물건은 만져 본 적이 없다고 판단했다.
모든 물건을 파악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가 말하길, 만금 전장이 맡은 모든 재화와 비슷할 수도 있다고 했다.
중원제일 전장이라는 만금 전장이 맡은 재화는 타인의 것을 맡아 준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에 비견된다면?
당연히 중원 제일의 부자를 뜻한다.
지금 서재오는 중원제일의 부자가 바뀌는 순간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었다.
중원제일의 부자가 만금 전장에 물건을 맡겼다라?
어찌 보면 무림이왕의 명성보다 중원제일의 부자라는 명성이 더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계약서에 있는 비용은, 달리 생각하면 거저일 수도 있었다.
서재오는 한빈에게 포권했다.
“축하하네. 그리고 고맙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서 대협.”
“아, 아무것도 아닐세.”
서재오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한빈은 저리 아무렇지 않은데 자신이 조금 너무 나간 것은 아닌가 싶어서였다.
이것을 흔히 호들갑이라고 한다.
화산에서는 매화검수요.
강호에서는 매화검협으로 불리는 자신이 너무 가볍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는 조용히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은 계약서를 품에 넣고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서재오에게 환한 미소를 남기고 일행과 함께 발길을 옮겼다.
자리를 떠나려던 한빈이 뭔가 기억났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 모습에 설화가 물었다.
“공자님, 어디 가세요?”
“저쪽이 아직 마무리 안 된 것 같아서.”
한빈이 가리킨 쪽은 무진과 영아 부녀가 있는 곳이었다.
영아의 얼굴은 화색이 도는 것으로 봐서 그동안의 병이 치유된 듯 보였다.
그런 영아의 손을 꼭 잡은 무진은 한빈을 보며 계속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빈과 시선이 마주치자 중얼거리던 말을 멈췄다.
터벅터벅.
한빈이 걸어오자 무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한빈은 무진과 영아 부녀를 쓱 지나쳤다.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한 청화가 설화에게 물었다.
“지금 공자님은 어디 가시는 거예요? 언니.”
“나도 모르겠는데, 우린 이거나 먹자.”
설화가 당과를 내밀자 청화가 눈을 크게 떴다.
“아까 다 먹었잖아요, 언니.”
“세상은 넓고 쌓인 건 당과잖아. 어디선가 당과는 나타나기 마련이지. 우리가 원한다면 말이야.”
설화가 씩 웃었다.
그들 모두가 한빈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한빈은 그들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딘가에 쪼그려 앉았다.
한빈이 쪼그려 앉은 곳에는 선주가 아직도 멍한 표정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한빈은 슬쩍 그의 목 뒤쪽 혈도를 눌렀다.
픽.
순간 선주가 본래 눈빛을 찾았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꿈틀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본 한빈은 사람 좋은 얼굴로 말했다.
“선주 양반,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거든. 그러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요.”
“…….”
선주는 조용히 한빈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