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345화 (345/621)
  • 345. 폭풍전야 (1)

    용린검을 뽑은 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선을 특정인에게 두지도 않았다.

    대신 진득한 기세를 피워 냈다.

    한빈의 모습에 구경꾼이 사도련의 무사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그런데 어딘가 익숙해…….”

    그때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아까 적룡대협이 말씀하셨잖아! 저 검을 후인이 뽑을 거라고.”

    “앗, 그러고 보니…….”

    “봐 봐, 저들과 격 없이 어울리잖아.”

    “그러고 보니 설산신녀에 매화검협 그리고 삼서삼살과 신창양가의 대공자까지, 모두 저 사람과 인사하잖아.”

    “그래! 저분이 적룡대협의 후인이 분명해.”

    그때였다.

    정의맹의 무사 중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 붉은 무복…….”

    “왜 그러나?”

    “저 붉은 무복 말이네.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아. 광대도 아니고 저런 붉은 무복을 입고 다니는 무인이 흔하지는 않지 않나?”

    “그렇지, 저렇게 눈에 띄는 붉은 무복을 누가 차려입고 다녀!”

    “그런데, 청운사신의 후인이 붉은 무복을 입고 다닌다고 들었어.”

    “청운사신? 하남정가에서 푸른 구름을 타고 나타났다는 그 청운사신?”

    “그래, 그 청운사신이 얼마 전에 칠음현에도 나타났는데 자네는 모르나?”

    “칠음현이라…….”

    “그래 칠음현에서 황궁의 현비 마마를 구했다고 해서 황제가 친히 그를 청운사신의 공적을 칭찬했다고 하던데 그걸 모르나?”

    “내가 그걸 모를 리가 있나? 그게 저 붉은 무복의 고수와 무슨 관계가 있냐는 거지.”

    “그때 청운사신이 말했잖아.”

    “뭐라고?”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자신의 후인이라고!”

    “헉, 그런 소문이 있어?”

    “나도 최근에야 듣게 된 따끈따끈한 소문이니까. 어서 철전 한 닢을 내놓게.”

    “허허, 무슨 소문 가지고 철전을 내놓으라고 해.”

    “나는 개방에서 철전 한 닢을 주고 산 소문이라니까.”

    “내가 나중에 화주 한잔 살 테니 그걸로 대신하세.”

    그들의 대화를 듣게 된 주변 무사들은 한빈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물론 한빈은 그들의 시선을 즐기듯 검을 머리 위로 치들었다.

    그냥 즐기는 척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한빈은 이 상황을 진짜 즐기고 있었다.

    청운사신의 후인이 자신이라 개방을 통해서 소문을 낸 것도 자신이니까.

    한빈이 이것을 통해서 얻으려는 것은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말에 무게를 싣는 것이다.

    그 말의 무게가 며칠 후면 필요해질 것이라 한빈은 확신하고 있었다.

    한빈은 암제가 당시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활의 시위가 당겨졌다는 이야기.

    그 활의 의미는 무엇일까?

    십대세가의 대부분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거나, 혹은 십대세가를 무림에서 지운다는 것이 아닐까 한빈은 추측하고 있었다.

    암제라는 활에서 말살이라는 화살이 출발했다.

    과연 이 화살이 중간에 멈출까?

    한빈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활이 부러졌다고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 멈추는 예는 없으니까.

    얼마나 지났을까.

    한빈은 힐끔 설화를 바라봤다.

    시선을 받은 설화가 눈을 크게 뜨고 한빈에게 입 모양으로 물었다.

    ‘공자님, 왜요?’

    ‘팔 아프다. 네가 좀 분위기 좀 돋워라!’

    ‘네? 뭐라고요?’

    ‘그냥 아무거나 멋있는 거로…….’

    ‘아무거나요?’

    ‘그럼 이걸로 하자! 그러니까…….’

    한빈의 입 모양을 본 설화가 슬쩍 옆으로 빠졌다.

    순간 설화의 신형이 사라졌다.

    설화가 나타난 것은 사도련과 정의맹 무사들의 사이였다.

    슬쩍 사도련과 정의맹의 무사들 속에 숨어든 설화가 주변을 바라봤다.

    설산신녀라고 그렇게 외칠 때는 언제고 지금은 자신이 없어진 줄도 모른다.

    아무리 강호의 이름이 지나가는 가을바람 같다 하지만, 이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잊힐 줄은 몰랐다.

    하지만, 설화는 그것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설화는 재빨리 두 손을 입에 모았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살짝 바꿔서 외쳤다.

    “그러고 보니 적룡대협과 청운사신의 후인이 같은 인물이라니! 놀랍군, 놀라워!”

    설화의 목소리에 정의맹과 사도련의 무사들이 눈을 번뜩였다.

    “적룡대협의 후인이 저분이잖아.”

    그 목리에 맞춰 정의맹의 무사들이 외쳤다.

    “저분은 청운사신의 후인이기도 하지!”

    다시 서로를 바라보며 으르렁대기 시작한 정의맹과 사도련의 무사들.

    그 틈을 타서 설화가 외쳤다.

    “사도련과 정의맹을 대표하는 분들의 공동 후인이라니 놀랍군!”

    설화의 외침에 사도련과 정의맹의 무사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를 인정하자는 뜻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체 저분을 뭐라 불러야 하지?”

    모두가 눈을 반짝이며 한빈을 바라봤다.

    그때 설화가 준비한 별호를 외쳤다.

    “진룡소협. 그래 진룡소협이 좋겠어!”

    설화의 외침에 그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진룡소협이라고?”

    “그러고 보니 적룡대협의 후인이니 그렇게 말해도 되잖아. 진룡(眞龍)이라…….”

    “그래, 진룡소협. 듣기도 좋구먼.”

    그때 정의맹의 무사들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진룡이면 뭔가 적룡하고만 관계가 있는 것 같잖아.”

    “그러게 말이야. 진운이라고 하지.”

    그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자 설화가 다시 외쳤다.

    “푸른 구름을 뚫고 나오는 용이 진짜 용이니……!”

    설화는 끊임없이 별호에 대한 타당성을 주장했다.

    설화는 지금 자신이 장사치가 된 느낌이었다.

    만약 물건을 이렇게 열심히 팔았다면 천하제일의 거부가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한빈의 별호를 굳히기 위해 아는 지식을 모두 갖다 붙였다.

    설화의 진심이 통했는지 정의맹의 무사들도 진룡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진룡소협!”

    “진룡소협!”

    “그래, 무림이왕(武林二王)의 전인이 진룡소협이시다!”

    “진룡!”

    한빈을 향한 그들의 눈빛에는 경외감이 깃들었다.

    그들의 바뀐 눈빛과 새로 생긴 자신의 별호에, 한빈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높이 치들었던 검을 내렸다.

    한빈은 모두를 바라보며 내공을 실어 외쳤다.

    “진룡이란 칭호는 과분하외다!”

    순간 그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진룡의 칭호는 그대에게 딱 맞는 별호외다. 소협!”

    “맞소, 진룡소협이야말로 앞으로 강호를 끌어갈 인재입니다. 진룡의 칭호에 합당합니다.”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울려 퍼지자 그를 지켜보던 흑의살풍은 입맛을 다셨다.

    “쩝.”

    그 소리에 편육랑아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진짜 무서운 책략이군.”

    “무섭다니요?”

    “저건 손 안 대고 코 풀기의 대표적인 전략이 아닌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형님.”

    “생각해 봐라. 자신이 적룡대협 본인이라고 밝히면 어떻게 되겠느냐?”

    “뭐, 추앙받겠죠.”

    “그러니 네가 힘으로만 싸운다고 하는 것이다.”

    “그럼 형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게 뭔데요?”

    “적룡대협 본인이라 밝히면 여기저기서 도전장이 들어오겠지, 아마 시기하는 자가 생겨서 기습을 당할 수도 있겠고.”

    “그럼 후인이라 밝히면요?”

    “적룡대협과 청운사신의 기세를 빌어 그 후광만을 얻을 수 있지.”

    “후광이요?”

    “누가 적룡과 청운의 후인을 건드리겠냐? 사파에서 적룡의 후인을 건들겠냐?”

    “아.”

    “그렇다고 정파에서 청운의 후인을 건들겠냐?”

    “그럼 도전하는 일도 없을까요?”

    “도전이라고? 흥, 도전 같은 소리를 누가 하겠느냐? 본인이라면 몰라도 후인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것은 그야말로 곰이 힘자랑하는 것과 같은 아둔한 짓이지. 즉, 팽 공자는 호가호위(狐假虎威)의 이득만을 얻겠다는 뜻이다.”

    “아, 그렇군요.”

    “문제는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팽 공자가 왜 이런 계책을 썼냐 하는 점이다.”

    “왜라고 생각하십니까?”

    “강남 사도련의 핵심을 부른 것으로 봐서 앞으로 큰일이 터질 것 같구나. 일단 마음을 단단히 다잡거라.”

    “팽 공자와 같이하면서 큰일을 다 겪지 않았습니까?”

    “이제까지의 일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이제까지 있었던 일보다 더 큰일이요?”

    “그래, 난 그렇게 생각한다.”

    말을 마친 흑의살풍이 고개를 돌려 진지한 눈빛으로 한빈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옆에 있던 양예신이 물었다.

    “당신들을 팽 공자가 불렀다는 겁니까?”

    “그렇다네. 내 자네의 춘부장과 비슷한 나이라네. 그러니 이제부터 말을 놓겠네.”

    “네, 그러시지요. 그런데 은공이 사도련을 불렀다는 건 어찌 된 일입니까?”

    “나도 그건 모른다네. 윗선에서 내려온 지시였다네.”

    “헉, 윗선이라고요?”

    양예신의 눈이 커졌다. 흑의살풍도 사도련에서는 위명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가 윗선이라고 하자 짐작도 되지 않았다.

    강남 사도련의 윗선이라면 과연 누굴까?

    설마 강남 사도련주는 아니겠지?

    분명 아닐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세상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강남 사도련주가 얼굴을 드러낼 일은 결단코 없었다.

    양예신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자신이 너무 깊이 생각한 것이라 생각해서였다.

    그때 흑의살풍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다네. 그런데 자네도 우리와 같은 처지인가?”

    “저도 팽 공자와의 약속 때문에 가는 길입니다.”

    “허허, 혹시 사천당가로 왜 오라 하는지 이유를 모르는가?”

    “네, 모릅니다.”

    “그렇군요. 이유를 모르는 건 자네나 나나 똑같군.”

    흑의살풍이 웃자 양예신도 빙긋 웃었다.

    어쩐지 똑같은 처지라 생각하자 웃음이 나온 것이다.

    그때였다.

    검을 거둔 한빈이 이번에는 서재오를 향해서 다가갔다.

    그러고는 오른팔을 높이 들었다.

    모두는 한빈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마른침을 삼켰다.

    진룡소협이라는 칭호를 얻은 자.

    무림이왕이라 불리던 청운사신과 적룡대협의 공동 후인.

    거기에 앞으로의 큰 행보를 예고하듯 용린검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리지 않았던가!

    그가 다시 손을 높이 들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모두가 고개를 갸웃할 때 한빈은 아무렇지 않고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모두는 긴장한 눈빛으로 한빈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그때였다.

    설산신녀라는 별호가 생긴 설화가 구름을 밟듯 한빈의 옆으로 뛰어왔다.

    그것도 어깨에 뭔가를 메고 말이다.

    모두는 지금 이 상황이 일촉즉발의 상황이라 생각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한빈의 앞에 온 설화가 어깨에 멘 보따리를 풀었다.

    사삭.

    그러고는 바로 계약서를 쓸 준비를 마쳤다.

    그 모습에 구경꾼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자신들이 생각한 행동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한빈은 주위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붓을 들었다.

    그의 앞에 있는 서재오는 쓴웃음을 지었다.

    모두가 이게 뭔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지만, 한빈과 계약서를 써 본 사람이라면 알고 있었다.

    그 계약서의 내용이 조금은 맵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거부할 수 없는 매운맛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한빈은 일필휘지로 계약서를 적어 나갔다.

    휙, 휙.

    조그만 글씨로 계약서를 채우던 한빈은 붓끝이 멈춘 것은 눈 몇 번 깜빡일 시간이었다.

    다른 이는 몰랐지만, 주변에서 한빈의 붓놀림을 보던 모든 이는 입을 떡 벌렸다.

    물론 이것은 한빈이 붓끝에 전광석화의 효용을 담아 글을 썼기 때문이었다.

    양예신이 흑의살풍을 보고 말했다.

    “붓을 검처럼 쓰는군요.”

    “그 붓이 우리를 향하지 않은 게 다행이지 않나?”

    “네, 그렇습니다.”

    그들의 속삭임에 서재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둘을 바라봤다.

    “남의 일이 아느냐고 막말해도 되오?”

    서재오의 외침에 양예신과 흑의살풍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계약서의 먹물이 마르자 한빈은 그것을 서재오에게 건넸다.

    “읽어 보시죠.”

    “뭐, 어련히 알아서…….”

    계약서를 슬쩍 보던 서재오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그 모습에 한빈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물건을 맡기면 보관 비용을 내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최대한 그 비용을 깎으려 했는데, 왜 보관한 우리 만금 전장이 도리어 그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가?”

    그의 말은 합당했다.

    하지만, 한빈은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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