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344화 (344/621)
  • 344. 용혈의 주인 (5)

    눈앞에서 나타났다 없어지기를 반복하는 구결을 보고 있던 한빈은 눈매를 좁혔다.

    자신의 몸을 휘도는 구결의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다.

    한참을 보던 한빈은 본능적으로 이것이 용린이 주는 시험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빈은 조금 더 자세히 구결들을 바라봤다.

    구결들이 주변을 도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이대로라면 모처럼 얻은 깨달음의 기회가 그대로 날아갈 것이다.

    한빈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고민하는 중에도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마치 구결들이 나 잡아 보라 하며 술래잡기를 하는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술래잡기라?’

    순간 한빈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이번에 온 깨달음은 보는 것이 아니라 잡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었다.

    한빈은 휘도는 깨달음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휘리릭.

    구결들이 한빈의 손을 피해 달아난다.

    동시에 속도가 더 빨라졌다.

    한빈은 조용히 용린검법의 실력편을 바라봤다.

    [실력편 중급(中級)]

    [……]

    [안(眼) : 삼(三)]

    한빈에게는 동체 시력을 극단적으로 높이는 방법이 있었다.

    한빈은 재빨리 안의 구결을 사용했다.

    순간 한빈의 눈에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한빈은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뻗었다.

    이전처럼 빠르지는 않았지만, 정확했다.

    [용혈신공의 문장 중 일(逸)을 획득하셨습니다.]

    용혈신공이라?

    한빈의 눈이 커졌다.

    동시에 글귀가 나타났다.

    [첫 번째 문장을 완성하면 용혈의 주인이 됩니다.]

    한빈은 재빨리 손을 뻗었다.

    하지만, 더 빨라진 구결은 한빈의 손을 빠져나갔다.

    한빈은 재빨리 용린검법의 초식 중 하나를 떠올렸다.

    ‘전광석화’

    순간 한빈의 손이 번개처럼 빨라졌다.

    동체 시력에 맞춰 공격도 빨리진 것이다.

    [용혈신공의 문장 중 조(藻)를 획득하셨습니다.]

    [……]

    쉬지 않고 계속 손을 뻗던 한빈이 동작을 멈췄다.

    이제는 한계를 벗어난 속도였다.

    휘몰아치는 황금빛 구결들을 바라보는 한빈은 세상에 절대적인 힘이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이 정도면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저 구결들의 속도로 누군가가 자신을 공격해 온다면 어떨까?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막는다는 말인가?

    역시 무학의 길에는 끝이 없었다.

    끝이 안 보이지만, 언젠가는 근처에는 갈 것이라 결심했다.

    한빈이 구결의 회오리 속에서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였다.

    호법을 서고 있던 양예신은 입을 떡 벌렸다.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못 본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조부가 무아지경의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목격했었고.

    아버지의 깨달음의 과정도 봤었다.

    하지만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황금빛 광채가 이렇게 주변을 맴도는 것은 사실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양예신은 이 깨달음이 불가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빈의 주변을 맴도는 황금빛 광채는 불가의 후광과도 너무 흡사했다.

    양예신은 힐끔 주변을 바라봤다.

    자신뿐 아니라 나머지 인물도 마찬가지였다.

    산서삼살도 입을 벌린 채 멍하니 한빈의 깨달음을 구경하고 있었다.

    설화는 그나마 고개를 갸우뚱하는 정도였다.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도련과 정의맹의 무사들은 이 광경이 상세히 보이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위를 둘러보던 양예신은 고개를 갸웃했다.

    유일하게 한빈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양예신이 고개를 갸웃하며 바라보고 있는 자는 무진과 영아였다.

    영아는 눈을 뜨고 한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무진은 오로지 영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영아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있는 것은 병에 걸리고 난 후 처음이었다.

    무진은 지금 이 기연이 믿어지지 않았다.

    딸아이의 상세를 살피고 있던 무진은 눈이 한 단계 더 커졌다.

    영아의 몸에서 묘한 기운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과연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일까?

    그때였다.

    영아의 몸에서 빠져나가던 기운이 갑자기 멈췄다.

    무진은 고개를 돌려 한빈을 바라봤다.

    “뭐지?”

    무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을 휘돌고 있던 황금빛 광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주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하기만 했다.

    그때였다.

    한빈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빈은 기지개를 켰다.

    “시원하다!”

    마치 한숨 자고 일어난 것 같은 개운한 얼굴로 팔을 휙휙 돌리며 몸을 푸는 동작에, 설화가 재빨리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나는 괜찮다. 그런데 저 아이는 멀쩡해진 것 같네.”

    한빈은 몇 걸음 떨어져 있는 곳에서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영아를 가리켰다.

    한빈이 그쪽을 바라보자 무진이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는 한빈의 앞에 멈춰 넙죽 절을 하며 말했다.

    “은공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나중에 하시고 잠시만 물러나 있으시오.”

    “네?”

    “잠시 뒤쪽으로…….”

    한빈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 모습에 설화가 무진에게 속삭였다.

    “잠시만 뒤로 물러나 주세요, 아저씨.”

    “아, 알겠습니다.”

    다시 한번 고개 숙인 무진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상황이 정리되자 한빈은 용린검을 머리 위로 올렸다.

    그러고는 내공을 담아 외쳤다.

    “이 검은 내 후인을 위해 여기 두겠다! 만약 이 검을 탐하는 자가 있다면 정파와 사파, 모두의 적이라 간주하겠다!”

    적룡대협으로 변장한 한빈은 말을 마치고 용린검을 검집째 바닥에 꽂았다.

    푹.

    용린검은 바닥에 박혀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힐끔 용린검을 확인한 한빈은 조용히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았다.

    ‘구걸십팔보.’

    순간 한빈의 신형이 바람 소리만 남긴 채 사라졌다.

    사사-삭.

    적룡대협으로 변장한 한빈이 사라지자 사도련의 무사들과 정의맹의 무사들이 동시에 몰려왔다.

    그들은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웅성대기 시작했다.

    “저 검이 뭐야?”

    “방금 그 사람이 적룡대협이라는 사람이야?”

    “그런데 우리 여기 있어도 되는 거야? 아까 적룡대협인가 하는 그분이 멀리 떨어지라고 했잖아.”

    “에이, 이제 갔으니까 괜찮겠지.”

    모두가 웅성거리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따가닥. 따가닥.

    모두는 뒤쪽을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황토색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정의맹의 무사들과 사도련의 무사들은 동시에 검집을 잡았다.

    모든 상황이 정리된 줄 알았는데 갑자기 밀려오는 황토색 먼지가 그들의 본능을 깨운 것이다.

    모두가 침을 삼키고 있을 때였다.

    황토색 먼지를 일으키는 말과 마차가 점점 가까워지자 먼지 위로 커다란 깃발이 어렴풋이 보였다.

    [만금 전장]

    그 깃발을 본 무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만금 전장이다!”

    “만금 전장의 마차가 왜 이곳에 온 거야?”

    “혹시 나루터에 황실의 물건이라도 들어오는 거 아니야?”

    “그러게 말이야. 저 정도면 말도 안 되는 규모인데…….”

    모두는 입을 딱 벌렸다.

    그들이 몰고 온 마차와 수레는 적어도 스물이 넘어 보였다.

    만금 전장의 마차는 용린검이 꽂혀 있는 곳을 향해 쉬지 않고 달려왔다.

    따가닥. 따다각.

    가장 앞에서 말을 타고 행렬을 이끄는 자의 모습이 들어오자 다시 무사들이 입을 벌렸다.

    “화산파다.”

    “화산파? 화산파가 왜 여기에 와?”

    “만금 전장에 왜 화산파가?”

    모두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만금 전장의 공자가 화산파에 가 있다고 들었어.”

    “아, 맞다. 그 공자의 이름이…….”

    “이름은 모르겠지만, 별호는 알지.”

    “별호가 뭔데?”

    “매화검협”

    “나는 이름도 안다네, 매화검협 서재오.”

    “그래, 기억났어. 강남뿐 아니라 강북에서도 위명을 떨치고 있다는 화산파의 매화검협 서재오 대협이야.”

    그때였다.

    말에 탄 화산파의 무인이 외쳤다.

    “모두 비켜 주시오!”

    그 외침에 사도련의 우두머리가 외쳤다.

    “모두 길을 비켜 드려라.”

    사도련의 무사들이 썰물처럼 자리에서 빠져나갔다.

    정의맹의 우두머리도 외쳤다.

    “빨리 길을 비켜 드려라!”

    정파의 무인들도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말을 탄 무인은 그들의 말대로 서재오였다.

    서재오는 한빈이 보낸 전서구를 받고 급히 오고 있었다.

    덕분에 만금 전장 사천지부에 있는 모든 인력이 이곳에 동원되었다.

    만금 전장 사천지부에 있는 인원을 이리 끌고 올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만금 전장의 본점이 있는 서안을 운영하는 전주가 바로 서재오의 아비이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서재오의 아비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한빈이었다.

    비록 얼굴은 한 번도 마주하지 못했지만, 그의 아비는 아들을 사람으로 만들어 준 한빈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한빈과 관련된 일에는 협조하라 신신당부했다.

    뭐, 서재오도 억지로 온 것은 아니었다.

    매화검수이긴 해도 사형들에게 천덕꾸러기 취급받던 그였다.

    그런데 한빈과 만남 이후로 매화검협이라는 칭호까지 받았다.

    서재오는 슬쩍 자신의 소매에 가득 찬 매화 문양을 바라봤다.

    이제는 매화검수의 끝자락이 아닌 매화검수 중에도 상급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말을 몰아 나루터로 간 서재오는 급하게 한빈을 찾았다.

    고개를 돌리던 서재오는 설화를 발견했다.

    그러고는 말에서부터 그대로 설화를 향해 날아올랐다.

    탁.

    설화의 앞에 착지한 서재오는 다급하게 물었다.

    “설화야, 사 공자는 어디 있느냐?”

    “잘 지내셨어요, 화산파 아저씨? 우리 공자님은 곧 오실 거예요.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허, 숨도 쉬지 말고 달려오라 해서 왔더니 일찍 왔다니.”

    “에이, 그래도 숨은 쉬셨잖아요.”

    “그래, 숨은 쉬었지. 아무리 고수라 한들 숨을 안 쉬면 죽기 마련 아니더냐?”

    “헤헤, 그건 그래요.”

    설화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자 다시 주변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정의맹의 무사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설화와 서재오를 가리켰다.

    “매화검협과 설산신녀가 서로 아는 사이인가 봐?”

    “둘 다 산 출신이잖아.”

    “산이라니?”

    “하나는 화산, 하나는 설산.”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냥 고수들끼리 알고 지내는 거겠지.”

    “그런가?”

    그들은 점점 몰려드는 고수들에 대한 추측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제는 정파와 사파의 구분이 없을 정도였다.

    그들의 대화에 서재오가 설화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설화도 별호가 생겼구나. 설산신녀라, 어울리는 것도 같구나.”

    “놀리지 마세요, 화산파 아저씨.”

    설화가 웃으며 손을 휘휘 저을 때였다.

    그들의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흠.”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몸에 딱 맞는 붉은 무복으로 갈아입고 수염을 떼고 온 한빈이 웃고 있었다.

    한빈을 본 서재오가 반가운 얼굴로 한 걸음 다가섰다.

    “사 공자, 왔는가?”

    “시간 맞춰서 잘 오셨네요.”

    “그런데, 대체 만금 전장에 맡길 물건이 뭐기에 이리 많은 인원이 필요한 것인가?”

    “뭐, 별건 아닙니다. 바로 저기 들어 있는 물건입니다.”

    한빈이 뒤쪽에 있는 배를 가리켰다.

    “아, 저기 우리가 옮길 짐이 들어 있다는 거군.”

    “네, 저기 있는 물건을 모두 만금 전장에 맡길 겁니다.”

    “그럼…….”

    “참, 계약서를 쓰기 전에 하던 일 좀 마저 하겠습니다.”

    “지금 하던 일이라고 했나?”

    서재오는 눈매를 좁혔다.

    상황을 보니 한빈은 이전까지 이곳에 없었다.

    방금 모습을 보인 것 같은데 하던 일이라니?

    서재오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한빈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휘적휘적 어디론가 걸어갔다.

    한빈이 향한 곳은 용린검이 박혀 있는 곳이었다.

    그곳으로 간 한빈은 용린검을 뽑았다.

    휙!

    단번에 용린검을 뽑은 한빈은 그것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0